글: 복녕객(福寧客)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무측천의 심정은 처량했을 것이다. 그녀가 여황제로 있을 때, 모든 것은 더할 나위없이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무측천은 자신이 하늘과 통한다고 여겼고, 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여겼다.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사서에서는 무측천이 말년에 이빨이 새로 났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무측천은 자신이 중생을 초월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녀가 황제를 칭할 때의 나이가 66세이다. 70여세때에도 여전히 용모는 변하지 않았고, 정력이 왕성했다. 74세때 '장생약'을 먹고, 도가양생지법으로 세상사람을 초월하여 장생불로하기를 희망했다.
다만,무측천은 어쨌든 사람이었다. 병마가 그녀를 덮치자, 그녀도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저의 가치관은 곤혹스러운 가운데 변하게 된다. 그녀는 비록 여전히 극력 불도로 장생을 추구했지만, 후사를 안배하는데 더욱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측천으니 황태자를 무(武)씨로 성을 고치게 한든다. 그리고 황태자, 상왕(相王), 태평공주 및 양왕(梁王) 무삼사(武三思), 정왕(定王) 무유녕(武攸寧)등을 불러서 명당에서 선서의식을 거행하여, 하늘과 땅에 고한다. 영원히 평화공존하겠다고. 이어서, 무측천은 또한 고심을 거듭하여 원래의 이가와 무가의 통혼을 이루게 한다. 이렇게 친한 가운데 더욱 친하게 만들어 자신이 죽은 후에 서로 무기를 들고 싸우지 않게 하려 했다.
무측천은 확실히 감정을 중시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신체가 쇠약할 때, 그의 두 애인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에게 조정대사를 주재하도록 맡겨서, 그들은 당시 최고의 유명인사들이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공덕이 없는 사람들이다. 법을 마음대로 집행하고, 태자를 협박하기도 하여,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산다. 무측천은 그들을 비호하여, 조정이 더욱 큰 위기를 맞이한다. 마침내 신룡원년(705년) 정월, 무측천이 다시 한번 병으로 쓰러지자, 조정에 정변이 발생한다.
계묘일에 재상 장간지(張柬之), 최현위(崔玄暐) 그리고 좌우림장군 환언범(桓彦範), 좌위위장군 설사행(薛思行)등이 좌우 우림군 오백여명을 이끌고 현무문으로 간다. 이들이 정변의 주요역량이었다.
별도로 좌우림대장군 이다조(李多祚), 우우림대장군 이담(李湛) 그리고 내직부, 부마도위 안양 왕동교등을 함께 동궁에 보내어 태자를 영접하게 한다.
태자는 본래 밀모에 참가했다. 다만 중요한 순간에 겁을 먹고 나서지 않앗다. 왕동교는 이렇게 권하여 나가자고 권유한다: "선제는 신기를 전하에게 넘겼습니다. 돌연 유폐되시니 사람과 신이 모두 공분했으며 23년이나 되었습니다. 오늘 흉수를 주살하여 이씨 시작을 복원하려 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잠시 현무문으로 가셔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주십시오."
태자는 말한다: "흉수는 당연히 없애야 한다. 그러나 황상의 신체가 좋지 않으니, 그 어르신을 놀라게 하지나 않을까? 여러 분들은 나중에 다시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담이 화를 내며 말한다: 여러 장군과 재상들이 가족을 돌보지 않고 사직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전하는 어찌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실 수 있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친히 나서서 막아주십시오." 뜻은 아주 명백하다. 태자가 나서지 않으면 정변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 장수들은 모두 묻힐 곳도 없어진다는 말이다. 이 일은 미룰 수가 없다는 말이다.
태자는 그제서야 나선다.왕동교는 태자를 안고 말에 오른다. 함께 현무문으로 가서 회합한다. 그후에 관문을 열고 쳐들어간다. 직접 무측천이 있는 영선궁(迎仙宮)으로 간다. 장이지, 장창종 형제를 보고,장간지는 두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의 목을 베어버린다. 정변장병은 무측천의 침실이 있는 장생전에 도착한 후, 궁전을 겹겹이 포위한다.
무측천이 놀라서 일어나서, 묻는다: "난리를 일으킨 게 누구인가?"
바깥에서 대답한다: "장역지, 장창종이 모반했고, 신등이 태자의 명을 받들어 주살했습니다. 누설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병력을 이끌고 궁안으로 들어왔으니 그 죄는 죽어마땅합니다."
무측천이 태자를 보았다. 그리고 태자에게 이런 담량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여 이렇게 묻는다: "너란 말이냐? 소자(小子)를 이미 주살했는데, 너는 왜 동궁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자는 감히 대답을 하지 못한다.
환언범이 한 걸을 앞으로 나서서 말한다: "태자가 어찌 돌아간단 말입니까? 당초 천황(天皇)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폐하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지금 나이가 이미 성장했고, 오랫동안 동궁에 있는데, 이것은 정리에 맞지 않습니다.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은 모두 오랫동안 이씨를 생각해왔습니다. 군신이 당태종, 천황(당고종)의 덕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자를 받들어 적신을 주살했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황위를 태자에게 넘겨주시고, 하늘과 백성의 바램에 부응해주십시오."
무측천은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알았다. 그래도 마지막 노력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의부(李義府)의 아들 이담(李湛)도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말한다: "너도 장역지를 주살한 장군인가? 나는 너희 부자에게 잘 대해주었는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담은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띄우고 감히 대답하지 못한다.
무측천은 다시 최현위에게 말한다: "다른 사람은 모두 다른 사라이 추천해서 승진시켰지만, 너만은 짐이 친히 발탁했었다. 너도 그들과 같은 편에 선단 말인가?"
최현위는 정면으로 대답한다: 이것이 바로 폐허의 대덕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확실히 깊은 뜻을 포함하고 있다.
무측천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하에서, 무측천은 사실상 연금되고, 그녀는 태자에게 황위를 넘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상양궁(上陽宮)으로 옮겨간다. 비록 그녀의 아들인 새 황제가 여전히 군신을 이끌고 문안인사를 하고, 그녀를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로 받들어 모신다. 그러나 무측천의 내심은 분명 씁쓸했을 것이다. 가장 권력에 열중했던 무측천은 아마도 꿈에도 자신에게 이런 결말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햇을 거이다. 이것은 그녀에게 가장 치명적인 타격이다.
그러나, 인간세상의 일을 확실히 추측하기 힘들다. 선종(禪宗)의 돈오(頓悟)와 마찬가지로,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후,무측천은 비록 목숨은 간당간당 했지만, 일생동안 부처와 인연을 가졌던 이 여인은 임종직전에 인생의 도리를 깨달은 것같다.
원래 모든 권력과 부귀는 헛것이다. 연극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끝날 때가 있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자신의 일생은 많은 것이 편집적이었다. 소위 "성신황제'도 그저 한바탕 지나가는 연기요 구름일 뿐이다.
그는 마침내 피로함을 느끼고 편안히 쉬고 싶어졌다. 다시 이씨집안의 며느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그녀는 임종유언에서 이전의 정적(政敵)과 정적(情敵)을 용서하고, 자신을 선황(당고종)과 합장해달라고 아고, 황제가 아니라 다시 이당의 황후가 되겠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무측천의 이 유언을 기이하게 여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하에서 지혜를 발휘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지혜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무측천의 존귀함을 보면 대실패후 아무런 반격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녀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준다. 이뿐아니라, 그녀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일으킨 많은 억울하고 잘못된 사건들을 명예회복시킨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지혜라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그만치도 그녀의 존귀함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후세에 얼마나 많은 왕조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할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가?
무측천의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유언은 다시 한번 그녀의 비범함을 드러내주었다.
이 유언으로 인하여, 무측천의 영구는 아들 중종황제가 친히 호송하여 장안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당고종과 건릉에 합장된다. 장례의식에서 읽은 <측천대성황후애책문>에서 무측천을 "영재원략(英才遠略), 홍업대훈(鴻業大勛), 뇌정기무(雷霆其武), 일월기문(日月其文)"이라고 칭송한 것이다. 그녀는 이로 인하여 영원히 이당의 태묘에 배향될 수 있었고, 이씨자손의 예를 받을 수 있었다. 당현종때까지도, 측천순성황후로 시호를 추가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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