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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28

석중귀(石重貴): 오대(五代) 후진(後晋)의 마지막황제 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 ​ 북송 개보(開寶) 6년(973년) 삼월, 방주(房州)에서 정왕(鄭王) 시종훈(柴宗訓)이 병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시종훈은 후주(後周)의 마지막 황제이다. 그는 비록 오대시기의 마지막 황제이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오대시기 황제는 아니었다. 요원한 북방에 일찌기 군림천하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974년에 병사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바로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오대의 황제였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이고, 20여년간이나 포로로 지내야 했을까? ​ 난세에 황제에 오르다. ​ 그는 바로 후진의 마지막 황제인 석중귀이다. 석중귀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숙부인 석경당(石敬瑭)에 의해 길러진다. 소년시기에 석중귀는 말이 적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며, 질박하고 순후했다. 그.. 2024. 2. 20.
송요(宋遼)백년평화시기: 300여차례의 외교활동과 민족의식의 맹아 글: 추산산인(秋山散人)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논쟁이 많은 왕조이다. 어떤 학자들은 송나라를 "적빈적약(積貧積弱)"으로 평가하고, 어떤 학자는 상품경제가 발달했다고 찬양한다. 진인각(陳寅恪) 선생은 더더욱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 중국문화의 수천년에 걸친 발전은 조송(趙宋)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았다. 이런 서로 다른 평가는 송나라사회의 여러 다양하고 복잡한 특징을 보여준다. 그중 송나라와 요나라간의 외교활동이 특히 눈길을 끈다. 송요간에 어떻게 하여 100년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송나라는 "사대부와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與士大夫共治天下)"의 정치원칙을 가지고있었는데, 요나라와의 교류과정에서, 이들 사대부들은 어떤 심리를 지녔고, 구체적인 정책에는 또한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1. 북송의 북방변방.. 2022. 12. 27.
북경 향산(香山) 영안릉(永安陵)의 수수께끼 글: 왕밀림(王密林) 전문사택아중승(傳聞舍宅阿中丞) 승사잔료설폐흥(勝事殘遼說廢興) 유갈난심응조석(遺碣難尋鷹爪石) 한무장몰영안릉(寒蕪長沒永安陵) 부증상(傅增湘)의 에서 언급된 영안릉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북경의 서산 지역에 두 개의 황제릉이 있었다. 하나는 명대종(明代宗) 주기옥(朱祁鈺)의 경태릉(景泰陵)이고, 다른 하나는 요선종(遼宣宗) 야율순(耶律淳)의 영안릉이다. 그런데, 경태릉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영안릉은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두 명의 서산에 뼈를 묻은 황제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국가의 위기때 옹립된 황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후세 사가들에 의하여 '사직을 지킨 공로가 있다'고 인정받는 주기옥과는 달리, 야율순은 '명부정(名不正), 언불순(言不順), 사불성자(事不成者)".. 2020. 7. 8.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의 지리적위치는 얼마나 중요한가? 글: 지역사(知歷史) '연운십육주'를 얘기하자면, 그것이 거란의 야율덕광(耶律德光)에게 할양되고난 후, 이후의 4백년간 중원한족왕조의 운명을 직접적으로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연운십육주'는 말그대로 16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유주(幽州), 계주(薊州), 영주(瀛州), 탁주(涿州), 막주(莫州), 단주(檀州), 순주(順州), 신주(新州), 규주(嬀州), 유주(儒州), 무주(武州), 운주(雲州), 응주(應州), 환주(寰州), 삭주(朔州), 울주(蔚州)이다. 비록 겨우 16개의 주이긴 하지만, 는 이 땅에 대하여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유, 연의 여러 주는 기후와 지형으로 한족과 외족을 나누고 있어, 장정 1명이 관문을 막으면 만명의 적도 막아낼 수있다"(幽燕諸州, 蓋天造地設以藩漢之限, 誠一.. 2020. 5. 18.
후한(後漢): 오대십국시대 최단명왕조, 멸망원인은? 글: 장저(張姐) 오대십국의 후반기에 중원에는 한족정권이 하나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오대십국중 하나인 후한왕조이다. 후한왕조는 비록 중원정통왕조중 하나이지만, 존속기간은 겨우 4년에 불과했다. 그 멸망원인을 따져보면 모두 살륙이 지나쳤다는 것에 있다. 후한왕조의 개국황제.. 2019. 9. 30.
고대에 외국인들은 왜 중국을 거란(契丹), 도화석(桃花石)이라고 불렀을까? 글: 부찰존병(富察存兵) 우리는 알고 있다. 서방의 동방민족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깊지 않았다. 그래서 만주(滿洲)를 타타르(韃靼)라고 칭하고, 혁명당도 이를 만주인을 멸시하는 말로 써서 "구축달로(驅逐韃虜)"라는 구호를 내놓았다. 실제로 서방은 만주에 대하여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 2019. 2. 11.
송(宋)과 요(遼)는 왜 통혼하지 않았을까? 글: 니퇴간객(泥腿看客) 중국고대의 중원왕조는 역대이래로 번속국과 통혼, 화친하는 관습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화친을 가장 많이 한 황조는 한, 당이다. 예를 들어 한나라때, 유방이 종실녀를 휴노에 시집보낸 것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한무제때도 다시 세군공주, 해우공주를 오.. 2019. 1. 16.
한족의 이민족에 대한 호칭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글: 자주군(煮酒君) 부지불식간에 발견한 것이 있다. 한족의 이민족에 대한 칭호도 재미있는 변화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포폄(褒貶)간에 역사의 궤적을 따라가면 한족의 심리가 바뀌어왔음을 알 수 있다. 최초에 한족은 이민족을 극단적으로 차별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으로 보지 .. 2018. 12. 12.
요(遼)나라의 일국양제(一國兩制)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글: 여빈(呂斌) 요나라의 '일국양제'를 얘기하자면, 한지고(韓知高)라는 한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요나라에서 가장 먼저 조정에 중용된 한인 중 한 명이다. 그의 가족은 요나라때 가장 혁혁한 한인가족이다. 그의 손자인 한덕양(韓德讓)은 심지어 한때 요나라의 실질적인 대권.. 2018. 11. 28.
명망청흥(明亡淸興)(1) - <달단전기(鞑靼電記)> 글: 경화연운(京華煙雲) 이야기의 시작은 전원시같은 낙원을 방불케 한다: "사람들의 생존과 행복에 필요한 물건을 위하여, 먹는 것이건 입는 것이건 기교(奇巧)하고 사치스럽다. 이 왕국의 경내에는 풍부한 산물이 있고, 외국에서 수입할 필요가 없다. 나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 2018. 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