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
북송 개보(開寶) 6년(973년) 삼월, 방주(房州)에서 정왕(鄭王) 시종훈(柴宗訓)이 병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시종훈은 후주(後周)의 마지막 황제이다. 그는 비록 오대시기의 마지막 황제이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오대시기 황제는 아니었다. 요원한 북방에 일찌기 군림천하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974년에 병사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바로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오대의 황제였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이고, 20여년간이나 포로로 지내야 했을까?
- 난세에 황제에 오르다.
그는 바로 후진의 마지막 황제인 석중귀이다. 석중귀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숙부인 석경당(石敬瑭)에 의해 길러진다. 소년시기에 석중귀는 말이 적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며, 질박하고 순후했다. 그리하여 석경당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외에 석중귀는 말타고 활쏘기에 능하여, 사타(沙陀) 선조의 유풍을 이었다. 936년 5월, 석경당이 거병하여 후당(後唐)에 반란을 일으킨다. 당시 석중귀는 계책을 내고 기획을 하거나, 직접 전쟁터에 나서서 더욱 석경당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리하여 그는 북경유수(北京留守),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를 맡는다.
937년, 석중귀는 경성으로 가서 부임한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개봉윤(開封尹),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고, 정왕(鄭王)에 봉해진다. 이때의 석경당에게는 막내아들 석중예(石重睿)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막내아들 석중예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싶었으나, 당시 시국이 어지러워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군주가 국면을 장악해야 했다. 그래서 석경당이 죽은 후, 재상 풍도(馮道), 시위친군도지휘사 경연광(景延廣)에 의해 나이 28세의 석중귀가 황제로 옹립된다. 그때가 942년 육월이다.
2. 거란에 항거하다.
석경당은 거란인이 지지를 받아 용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거란에 대하여는 시키는대로 따랐다. 석중귀가 즉위한 후, 사신을 거란에 보냈는데, 야율덕광(耶律德光)에게 단지 손(孫)이라 칭했을 뿐, 신(臣)이라 칭하지는 않았다. 야율덕광은 분노하여 남정을 일으켜 무력으로 석중귀에게 교훈을 줄 생각까지 한다. 그후 거란, 후진간의 관계는 갈수록 긴장되었고, 결국은 전쟁이 벌어진다. 제1차전쟁에서 석중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친정하여, 야율덕광의 10만대군을 물리친다.
얼마 후, 쌍방간에 제1차전쟁이 벌어진다. 석중귀는 다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선다. 후진군대는 백단위촌(白團衛村) 전투에서 거란군대를 대파한다. 예전에 기고만장했던 야율덕광은 낭패하여 패주한다. "해거(奚車)를 타고 십여리를 갔는데, 추격병이 다가오자 낙타를 하나 얻어 올라타서 도망쳤다." 유주로 돌아온 후, 화가난 야율덕광은 "추장에게 각 수백대의 곤장을 때렸다" 두 차례의 승리후에 석중귀는 자신이 생겨서 946년에는 병력을 북상시켜 연운십육주를 수복하고자 한다.
3. 이국에 포로로 끌려가다.
석중귀는 병력을 고모부 두중위(杜重威)에게 맡긴다. 동시에 경성 금군의 주력도 그에게 넘긴다. 그런데, 두중위는 거란군에 포위된 후 20여만명을 이끌고 투항해 버린다. 그후 거란군은 병력을 이끌고 칼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직접 개봉으로 쳐들어온다. 석중귀는 그 소식을 듣고, 즉시 각로의 군대를 소집하는데 이미 때는 늦었다. 거란에 투항한 장수 장언택(張彦澤)이 기병 2천을 이끌고, '봉구문을 깨부수고 들어온다.' 이어서 거란군대가 개봉으로 진입한다. 석중귀는 스스로 불로 자결하려 했지만, 부장의 제지로 거란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947년 정월 초닷새, 야율덕광이 명을 내려 투항한 석중귀에게 광록대부(光祿大夫)의 벼슬을 내린다. 그리고 그에게 모욕적인 작위를 내린다: 부의후(負義侯, 부의는 배신이라는 의미임). 그후 석중귀는 가족을 데리고 황룡부로 출발한다. 그곳이 그의 유배지이다. 석중귀의 북방에서의 생활은 아주 힘들었다. 딸과 비빈들은 거란귀족들이 끌고 갔다. 그들 일가는 그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974년 육월, 석중귀가 병사하니, 향년 61세이다. 이때의 중원은 이미 왕조가 3번 바뀌어 북송의 통치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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