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부찰존병(富察存兵)
우리는 알고 있다. 서방의 동방민족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깊지 않았다. 그래서 만주(滿洲)를 타타르(韃靼)라고 칭하고, 혁명당도 이를 만주인을 멸시하는 말로 써서 "구축달로(驅逐韃虜)"라는 구호를 내놓았다. 실제로 서방은 만주에 대하여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 대하여도 잘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거란, 선비라고 잘못 불러왔다.
거란(契丹, Khitan)은 중세기 유럽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칭호였다. 오랫동안 유럽인들은 중국에 대한 인식이 모호했고, 칭호도 통일되지 않았다. 중국에 관한 여러 호칭 중에서, 일부 유럽국가는 "거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처음으로 중국을 거란이라고 칭한 것은 마르코 폴로가 <마르코폴로여행기>라는 책에서 원나라를 '거란'이라고 부른 것이다. 다만, 진정으로 유럽인들에게 중국이 통일적인 호칭을 알린 것은 이탈리아에서 중국으로 온 선교사 마테오 리치이다. 그는 1605년 이탈리아로 보낸 서신에서 중국이 바로 마르코 폴로가 말한 거란이라고 단정해서 말했다. Китай의 어원은 몽골어의 "걸탑(乞塔)"이다. 원래는 중국북방의 소수민족인 거란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럽인들은 이를 중국의 호칭으로 썼다. 이 단어의 뜻은 13세기 몽골의 서정(西征)이 점차 확대되면서, 몽골인들은 중국북방을 거란이라고 불렀다. 몽골인들을 통하여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널리 중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몽골인 통치하의 지역 및 이들 국가와 지역과 왕래가 있는 나라는 모두 이미 Katai라고 중국을 부르는 것이 습관화 된다. 1404년, 스페인 공사인 클라비호(Ruy González de Clavijo)가 사마르칸트로 가서 테무르칸을 만나 <클라비호동사기(東使記)>를 썼는데 여기서도 중국을 거란이라고 부른다. 대부분 유럽인들은 15세기부터 중국을 거란이라고 부른다. 이는 거란이 강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러시아는 이반3세(1440-1505)부터 서방문화를 배우기 시작하는데, 러시아는 당시 유럽의 일부국가의 습관에 따라 중국을 거란이라고 부른다. 킵차크한국시기에, 많은 투르크어와 몽골어의 어근과 단어는 고대러시아어에 들어간다. 몽골인들은 중국북방을 거란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는 중국전지역을 지칭하는 말로 된다. 러시아는 타타르몽골의 질곡에서 250년간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몽골은 무력이 강성했고, 나라도 오래갔다. 그래서 몽골인의 습관대로 중국을 거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거란"이라는 칭호는 동에서 서로 전파되면서 점점 변화한다: 몽골어로는 Хятад(Khyatad) / Kitad; 위구르어로는 Xitay; 카자흐스탄어로는 ытай, Qtay; 카잔타타르어로는 Qtay; 러시아어로는 Китай(Kitay); 우크라이나어로는 Китай(Kytay); 불가리아어로는 Китай(Kitay); 폴란드어로는 Kitaj; 슬로베니아어로는 Kitajska; 중세기라틴어로는 Cataya, Kitai; 이탈리아어로는 Catai; 스페인어로는 Catay; 포르투갈어로는 Cataio;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북노르만어계로는 Cathay이다. 현재 투르크어와 슬라브어의 대다수 언어에서는 여전히 중국을 '거란'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의 Китай이다. 영어에서는 'Khitan'이 변화하여 "Cathay"가 되었다. 이것도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 시가(詩歌)에서 쓰였다. 이 단어는 한어에서는 "국태(國泰)"로 번역한다. 예를 들어, "국태항공(Cathay Pacific)", "국태영화관(Cathay Theatre)"등이 있다.
현재 누군가의 통계에 따르면 근 10개국가에서 중국을 거란이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상 거란은 확실히 한때 강성했는데, 그렇다면 왜 거란과 한인은 서로 섞여버렸을까?
먼저, 복장이 섞였다. 현재 출토된 거란의 고묘벽화를 보면 한인, 거란인이 별 차이가 없다. 다음으로 문자이다. 비록 거란문이 있었지만, 거란문의 외형은 한자와 비슷하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외관의 차이가 없다. 어쨌든 그들은 모르는 글자이니까. 그리고 외국에 보내는 서신은 한자로 썼다. 한화된 거란은 머리모양만 한인과 달랐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중국을 거란이라고 칭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중국을 거란으로 가장 먼저 부른 것은 몽골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칭호를 유럽과 중동으로 가져갔다.
어떤 사람은 몽골어에서는 한인을 hiatad라고 부르는데, 이는 "마르고 왜소하다"는 복수형식이라고 한다. 거란 hiadan은 몽골어에서 "산애(山崖), 암석, 산봉우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양자는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몽골인들의 한인에 대한 칭호를 중국에 대한 칭호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고대투르크어에서 '중국'은 '도화석'이라고 불렀다. '도화석인', '도화석칸'은 각각 '중국인' '중국군왕'의 뜻이다.
남송말기, 이지상(李知常)이 쓴 <장춘진인서유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현지의 토착군중들은 한인장인의 기술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도화석은 모든 일이 뛰어나다(桃花石, 諸事皆巧)" 이것은 '도화석'이라는 단어가 한문저술에 나오는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1072년-1074년 사이에 만들어진 <투르크어대사전>에서는 '도화석'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너무나 분명하게 해석해놓고 있다: "도화석. 이는 마진국(摩秦國)의 이름이다. 상진(上秦)은 동방에 있어 '도화석'이라 부르고, 중진(中秦)은 거란이라고 부르며; 하진(下秦)은 바르한(巴爾罕)이라고 부르는데 즉 카슈카르(喀什噶爾)이다." 이는 바로 당시 이 책의 작자는 자칭 '도화석'인 즉 중국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칸은 '중국의 군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의 '마진'은 '마진(麻秦)', '마진(瑪秦)'이라고도 번역하는데, 분명히 중국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건 이상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도 인도, 터키등지에서는 중국을 '진(秦)'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도화석(tavya)은 '탁발씨(拓跋氏)'에서 왔다. '탁발씨'는 선비(鮮卑)의 한 부족이고, 바로 '탁발씨'가 북위(北魏)제국을 건립한다.
19세기말에 몽골고원의 어얼훈강과 투라강유역의 루닉(Runic)알파벳의 고대투르크비문이 발견된다. 여기에서 '탁발'이라는 단어의 연구에 새로운 단서가 나온다. 궐특근비, 비가칸비 및 약간 늦게 발견된 돈욕곡비에는 모두 특정단어가 등장하는데(루닉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당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로마자로 표기하면 "t(a)bg(a)" 혹은 "tabya"이다. "tabgatch"로 쓰기도 한다. 모두 고대투르크어의 알파벳표기이다.
이 당나라를 가리키는 명사의 뜻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하여 오랫동안 논쟁이 있었다. F Hirth는 tabya는 당가(唐家)라는 단어의 투르크어표기라고 보았다. 나중에 쿠와바타 지츠오(桑原騭藏)은 이를 기초로 '당가자(唐家子)'설을 내놓았다. 당연히 당은 바로 선비 척발부가 건립했다는 뜻이다. 그는 또한 tabya와 비잔틴 역사학자 Theophylact Simocatta가 언급한 Taugast 그리고 <장춘진인서유기>에서 한인을 '도화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공통의 어원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쿠르크비며자료와 전해지는 문헌사료를 결합하여 얻어낸 것이다. 문제는 Theophylacte Simocatta가 말한 Taugast국에서는 대립하는 2개의 정권중 하나가 큰 강을 건너 통일전쟁을 실현했다고 했는데, 일반적으로 이를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한 전쟁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시기는 당나라보다 앞선다.
그리고, P.A.11Friedrich Hirth(NachwortezurInschriftdes
<장춘진인서유기>에 나오는 중앙아시아인들이 한인을 부르는 '도화석'이라는 단어는 1917년 터키에서 바견된 Mahmud Kashgari의 <투르크어대사전(DwLuytat-Turk)>에서도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투르크어대사전>에는 tawy라는 단어가 있는데, 뜻을 마진(馬秦, Msn)이라고 했다. 마진은 상진(Sn)과 거란(Khity)의 범위이다. 통칭하여 tawy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tawy는 바로 중국을 가리킨다. '도화석'은 바로 tawy의 중문번역표기이다. 그러므로, 돌궐비명의 tabya, 비잔틴사료의 taugast, 그리고 11세기에 유행한 중앙아시아투르크족의 tawy는 모두 중국을 가리킨다(최소한 중국북방)
이 몇 개 단어는 어원이 같다. 돌궐비명의 tabya는 그중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다. 그것은 북위통치집단의 핵심부족인 '탁발'부족명칭의 투르크어음역이다. Sir Gerard Clauson은 <십삼세기이전쿠르크어어원사전(An Etymological Dictionary of Pre-Thirteenth Century Turkish)>에서 tavaç이라는 단어(즉 tabya)를 '한 투르크부락명이며 중문으로 쓸 때는 '拓跋'이라고 쓴다"라고 하였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러시아경내의 한 몽공린은 투바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연방내에는 투바공화국도 있다. 대청국시기에는 오량해(烏梁海)라고 불렸다. 어던 사람은 투바라는 단어의 어원이 바로 '탁발'이라고 한다. 오량해몽골인의 일부분은 만주족에 들어가 오량해씨가 된다. 한족성으로는 일반적으로 양씨(梁氏)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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