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역사(知歷史)
'연운십육주'를 얘기하자면, 그것이 거란의 야율덕광(耶律德光)에게 할양되고난 후, 이후의 4백년간 중원한족왕조의 운명을 직접적으로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연운십육주'는 말그대로 16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유주(幽州), 계주(薊州), 영주(瀛州), 탁주(涿州), 막주(莫州), 단주(檀州), 순주(順州), 신주(新州), 규주(嬀州), 유주(儒州), 무주(武州), 운주(雲州), 응주(應州), 환주(寰州), 삭주(朔州), 울주(蔚州)이다.
비록 겨우 16개의 주이긴 하지만, <거란국지>는 이 땅에 대하여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유, 연의 여러 주는 기후와 지형으로 한족과 외족을 나누고 있어, 장정 1명이 관문을 막으면 만명의 적도 막아낼 수있다"(幽燕諸州, 蓋天造地設以藩漢之限, 誠一夫當關, 萬夫莫前也)
연운십육주의 전체 지역은 동서로 약 600킬로미터, 남북으로 약 200킬로미터의 너비를 가지고 있다. 면적은 약 12만평방킬로미터로 한반도정도의 크기가 된다. 지도로 보면, 이 지역은 현재의 텐진(天津), 베이징(北京), 허베이(河北) 북부, 산시(山西) 북부를 포함한다. 기본적으로 장성 내측(남측)이다. 즉 장성이라는 중요한 군사방어선 배후의 전략적 요지라는 것이다.
그중의 영주, 막주의 두 주는 더더구나 하북의 복지로 수백리 깊이 들어가 있다. 지형으로 보면, 연운십육주는 연산산맥과 북태행산산맥의 두 산맥이 연결된 성벽과 같이 화북평야 북쪽에 서 있고, 두 산이 만나는 곳은 더더구나 하늘이 만들어준 '성각(城角)'과 같아서, 북방과 이를 통해 완전히 격리되게 된다.
험준한 산맥은 연운지구를 전략적으로 북방철기가 남하하는 것을 막아내는 첫번째 방어선으로 삼을 수 있다.
이 험준한 지역을 잃었다는 것은 중원왕조로 하여금 전체 북방에서 호인의 철기를 막아낼 수 있는 천연적인 장벽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기나 천리는 남하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이, 황하까지 일마평천(一馬平川)할 수 있다. 중원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셈이 되는 것이다.
석경당은 이로 인하여 천고에 욕을 먹고 있는 것이다!
연운십육주가 북방소수민족의 수중에 들어간 후, 이로 인한 영향은 군사전략방어상의 손실만이 아니었다. 이전에 북방유목민족정권은 군사력은 비록 강대했지만, 그들은 선진적인 문화제도나 고정적인 재정수입이 없었다. 이러한 제약으로 중원왕조와 전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군사승리는 거둘 수 있어도, 결국은 한, 당과 같은 중원왕조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다만, 소수민족이 연운십육주를 점거한 후, 이러한 국면은 철저히 바뀌어버린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첫째, 경제적으로 연운십육주는 북위39도-41도의 사이에 있다. 온난대계절풍의 낙엽활엽림기후이다. 강수량은 400-800밀리미터사이이고, 온난하며 습기있는 환경은 농업에 적합했다.
그리고,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연운지구는 중국에서 농업이 가장 발달하고, 경제가 가장 번성했으며, 인구가 가장 조밀했던 지역중 하나이다. 그리하여 거대한 경제적가치가 있다. 유주는 자고이래로 중국북방에서 중요한 경제적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란이 이 지구를 획득한 후, 대량의 연운십육주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거란왕조에 생활방식, 생산양식에서 변화를 가져다주게 된다. 농업경제가 유목경제를 대체하여 일약 거란의 주요한 경제방식이 된다.
그후에, 연운지구는 거란의 농업경제중심이 되고, 주요한 세금징수지가 된다.
<요대석각문편>에는 이런 문구도 있다. 연경석진부(燕京析津府) 한 곳이 "병사는 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부세는 전체 성의 절반을 차지한다(兵戎冠天下之雄), 여부당성중지반(與賦當城中之半)"
이 인용문만 보더라도 연운십육주가 거란왕조에서 얼마나 중요한 재정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둘째, 인구적으로 위에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연운지구는 인구가 조밀하고, 많은 한족인구는 요나라에 충분한 병력자원을 제공해주었다. 즉 연운십육주는 요나라의 중요한 병력자원공급지였다.
요나라의 전국군대는 어장친군(御帳親軍), 궁위기군(宮衛騎軍), 대수령부족군(大首領部族軍), 중부족군(衆部族軍), 오경향정(五京鄕丁)과 속국군(屬國軍)으로 나뉜다. 그중 '오경향정'은 한족으로 대부분 충당했다.
요나라는 오경(五京)을 두었는데, 임황(臨潢)은 거란의 옛 땅이다; 요양(遼陽)은 한나라의 요동이고 발해고국이다; 중경(中京)은 한,요의 서쪽땅으로 당나라이래로 거란이 차지했다; 이 삼경의 정적(丁籍)으로 기재된 사람은 22만6천1백명이다. 석진(析津), 대동(大同)은 옛 한족의 땅으로 정적이 86만6천7백명이다.(<요사권36>)
이상의 기재에서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오경향정의 병사수를 보면, 연운십육주의 남경, 서경은 다른 삼경을 합친 것보다 3배나 많았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연운지구가 가진 거대한 경제적가치로 거란왕조에 강력한 재정적 기초를 형성했고, 그 조밀한 인구는 충분한 병력자원을 공급해주었다.
요나라황제가 석경당이 바친 연운십육주를 접수한 후, 유주를 연경으로 하고, 운주를 서경으로 결정하면서, "친왕이 아니면 통치할 수 없다!"고 규정한 이유를 알만하다. 그리고 연운십육주라는 이 창구를 통하여, 북방유목민족은 중원을 이해하고, 점점 중원문명을 접촉하게 되며, 중원의 선진적인 생산방식도 학습하게 된다.
이때부터, 유목민족이 건립한 거란왕조는 비로소 부유한 중원왕조와 진정으로 중국역사상 제2차대결국면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북방유목민족이 장기간 중원왕조와의 군사대결에서 피동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을 일거에 바꾸는 계기가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체 중원왕조가 완전히 북방철기의 공격하에 노출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막아낼 험준한 지형이 없으므로, 중원왕조의 통치계급은 심리적인 '마지노선'을 잃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대신 여중(呂中)은 이렇게 한탄했다:
"연계(燕薊)를 회수하지 않으면, 하북의 땅이 탄탄하지 못하고, 하북의 땅이 탄탄하지 못하면, 하남도 베개를 높이하고 잠을 잘 수 없다."(<기사본말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연운십육주가 중원왕조에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점이다.
연운십육주를 빼앗긴 후, 연운십육주는 중국정치국면과 역사발전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일대사건이 된다. 직접적인 결과는 원래 중원왕조가 가졌던 군사적 우세와 경제적 우세가 역전되었다는 것이다. 중원왕조는 더 이상 우세한 것이 없어지게 된다.
문치(文治)로 성세를 만들었던 북송은 '약송(弱宋)'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것은 계속하여 소수민족에게 공격을 받고 굴욕적으로 화의를 하며, 천조대국의 위엄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유목문명과 농경문명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부딛치게 된다. 이는 또한 중국역사상 또 한번의 민족대융합을 이끌어 낸다.
다만 동시에 연운십육주는 중원한족왕조에게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그후의 수백년간, 연운지구를 수복하는 것이 모든 중원왕조가 꿈에도 그리던 이상이 된다.
예를 들어, 후주의 시영(柴榮)은 강력한 병사를 이끌고 연운지역을 북벌하여, 비록 오대이래 중원왕조의 대요전투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얼마후 병사하고, 연운십육주수복의 대업은 중도에 요절된다.
오백만민을 주고 거란에서 연운십육주를 구매하려고 계획했으며, 만일 거란이 주지 않으면 이 돈을 북벌경비로 쓰고자 했으나, 송태조 조광윤은 오십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거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다시 그후에 두번이나 거란을 북벌하지만 참패로 끝난다. 송나라가 무력으로 연운지구를 수복하려는 계획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홍무원년에 이르러, 대도를 함락시키고, 비로소 연운십육주가 한족왕조의 수중에 들어온다. 이 4백년간 연운십육주가 남긴 기억은 오래동안 남는 가슴아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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