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청71 곽말약(郭沫若)과 문혁(文革) 글: 조대부화실(趙大夫話室) 57년전의 문혁은 수도 없이 많은 이슈를 남겼다. 그러나 중국과 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다수의 글은 그저 그 일부분만 건드리고 있다. 마치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모두 자신만의 문혁이 있다. 이는 자신과 가정이 문혁때 한 역할 및 경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문혁에 대한 평가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중국정계와 문단에서 유명한 인물이 서로 다른 시기와 공간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양극을 달린다니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어려운 점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 사람은 저명한 무산계급문학가, 시인, 극작가, 고고학자, 사상가, 고문자학자, 역사학자, 서예가, 학자이며 저명한 혁.. 2023. 5. 28. 진혜민(陳惠敏): 모택동 애인의 특이한 인생 글: 장박(張朴) 만일 2020년 4월에 쓴 이 나의 연상과 충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진혜민과 모택동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 완성할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처음 진혜민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1999년이다. 하루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서, 나에게 진혜민을 만나볼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모택동의 애인이다." 친구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너의 누나가 분명 흥미를 느낄 것이다" 이때의 장융(張戎)은 그녀의 또 다른 거작 를 쓰고 있었고, 나는 막 을 읽은 때였다. 이지수는 서문에서 네 글자로 모택동의 사생활을 형용했다: "해인청문(駭人聽聞)"(들으면 깜짝 놀랄 일). 책에서는 심지어 모택동의 여자친구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대체로 그녀들의 이름은 숨겼지만. 설마 진혜민도 그 중의 .. 2023. 5. 20. "문화대혁명" 명칭에 관한 두 개의 중요개념분석 글: 왕영괴(王永魁) "문화대혁명"이라는 명칭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1966년 5월이전에 그것은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고 불렸다. 1966년 5월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 이후, "사회주의문화대혁명"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혼용되었고, 의미는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1966년 8월 중공8기11중전회에서 이 통과된 이후에는 이 운동의 정식명칭이 "무산계급문화대혁명"으로 정리되고,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후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는 명칭은 일부 외국전문을 번역하는 경우에 언급되는 외에 다른 경웅는 기본적으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된다. 1. "사회주의문화대혁명"개념의 탄생과 의미 1963년 12월 12일과 1964년 6월 27일, 모택동은 문화계에 존재하는 문제에 대하여 각각 비시.. 2023. 5. 1. 손유세(孫維世): 주은래(周恩來) 양녀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 글: 왕우군(王友群) 1968년 10월의 어느 날, 당시 중국국무원총리로 있던 주은래는 사무실에서 공안부가 보내온 "손유세사망보고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구금된 범죄인 손유세는 10월 12일 저녁 11시 공안부병원으로 보내어졌고, 지주막하출혈로 진답받았는데, 치료를 하였지만 살려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14일 오후 3시 30분 사망했다. 이에 보고드린다. 왕명소수(王明蘇修, '소수'는 소련수정주의'를 가리킴)특무전안조." 얼마 후 비서가 돌아와 주은래에게 보고한다. 손유세의 시신은 이미 '현행반혁명'으로 화장되었고, 유골조차 남기지 못했다고. 주은래의 양녀 손유세는 중국의 저명한 희극예술가(戱劇藝術家)로 1921년에 태어났다. 부친 손병문(孫炳文)은 주은래의 가까운 친구였는데, 19.. 2023. 4. 18. 강청의 전남편 당납(唐納): 신비한 신분의 수수께끼 (2) 글: 하월명(賀越明) 홍콩 창간에 막후연락 및 총편집을 맡다. 당납의 중공당원신분은 그와 두번이나 동료로 함께 일했던 원로신문인 서주성이 가장 먼저 밝혔다. 처음에는 간접적으로 밝힌다. 그는 1980년대초에 (상해인민출판사1981년판)에 "오소주(吳紹澍)와 "라는 절에서 1947년 5월 가 국민당정부에 의해 폐쇄당한 후, 다음 해에 오소주와 함께 대만으로 간 일을 언급한다. "우연하게도 상해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당원동지가 홍콩에서 비밀리에 상해로 돌아와서 나에게 말했다. 민혁(民革)이 이미 홍콩에 성립되었고, 기관보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임조(李任潮) 선생은 나에게 가서 주재해달라고 했다..." 홍콩에 성립된 민혁의 전칭은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로 주석은 이제심(李濟深)으로 자가 '임조'였다.. 2023. 3. 4. 강청의 전남편 당납(唐納): 신비한 신분의 수수께끼 (1) 글: 하월명(賀越明) 2012년 8월 23일은 당납 선생의 기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꼬박 2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납"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인방"이 타도되면서, 나라를 떠난지 오래되고 이름없이 살아가던 그가 다시 중국인들의 시야에 들어왔고, 보통민중들이 화제로 올리는 인물이 되었다. 일찌기 "사랑때문에 목숨을 버리려 했다" 1970년대말부터 현재까지, 신문잡지에는 당납을 소개하는 글이 적지 않았다. 수가 많아서 일일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총괄해서 말하자면, 이들 글 중에서 이전에 당납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몇몇 언론종사자들의 회고한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 글들은 대부분 포풍착영(捕風捉影)하거나 다른 사람의 글을 베낀 수준이었고, 적지 않은 글들은 .. 2023. 3. 4. 이전 1 2 3 4 ···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