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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강청의 전남편 당납(唐納): 신비한 신분의 수수께끼 (2)

by 중은우시 2023. 3. 4.

글: 하월명(賀越明)

 

홍콩 <문회보> 창간에 막후연락 및 총편집을 맡다.

 

당납의 중공당원신분은 그와 두번이나 동료로 함께 일했던 원로신문인 서주성이 가장 먼저 밝혔다. 처음에는 간접적으로 밝힌다. 그는 1980년대초에 <보해구문(報海舊聞)>(상해인민출판사1981년판)에 "오소주(吳紹澍)와 <정언보(正言報)>"라는 절에서 1947년 5월 <문회보>가 국민당정부에 의해 폐쇄당한 후, 다음 해에 오소주와 함께 대만으로 간 일을 언급한다. "우연하게도 상해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당원동지가 홍콩에서 비밀리에 상해로 돌아와서 나에게 말했다. 민혁(民革)이 이미 홍콩에 성립되었고, 기관보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임조(李任潮) 선생은 나에게 가서 주재해달라고 했다..." 홍콩에 성립된 민혁의 전칭은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로 주석은 이제심(李濟深)으로 자가 '임조'였다. 여기에 언급된 '한 당원동지'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서주성은 몇년후에 <내가 하는 이제심>이라는 글을 쓰면서 해답을 내놓는다: 1947년 5월 상해 <문회보>가 폐간된 후, 다음해 봄, 옛동료 마계량 동지(당납)이 돌연 홍콩에서 상해로 와서 나에게 말했다. '이임조 선생이 홍콩에 이미 국민당혁명위원회를 설립하였으며, 기관보를 준비하고 있다. 이임조는 반드시 당신이 와서 총편집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두 글에서 말하는 것은 같은 사건이다. 비교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앞의 책에서 말한 '한 당원동지'는 바로 당납이라는 것을.

 

서주성의 홍콩<문회보>에 관한 회고글을 보면, 몇 가지 대동소이한 글들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판본이 있다. 당납이 홍콩에서 상해로 온 임무에 관한 것이다. "다음 해 3월(1948년을 말함)은 아무런 할 일이 없이 놀고 있어서, 갑옷에 벌레가 생길 때였다. 돌연 어느날 오후, 불속지객이 찾아왔다. 마계량 동지. 그는 원래 <문회보>의 총편집이다. 신문이 폐쇄된 후, 홍콩으로 갔다. 그런데 어찌 돌연 돌아온단 말인가? 나는 놀란 마음을 한동안 추스리지 못했다. 좌정한 후, 그는 나에게 말했다. 이번에 온 것은 명을 받아 화강(華崗) 동지를 상해에서 산동해방구로 보내기 위해서인데, 오는 길에 한가지 소식을 가져왔다. 그 소식이 바로 전술한 '민혁'이 홍콩에 이미 성립되었으며, 기관보를 준비하고 이고, 이제심은 서주성이 와서 주재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언급된 '화강'은 1924년 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1925년 공산당원이 되었으며, 중공남방국 선전부장, 국공담판때의 중공대표단 고문을 지내고, 1947년 국공평화회담결렬후 중공대표단은 연안으로 철수하고, 1948년 봄에 홍콩으로 가서 병치료를 하면서 주공의 홍콩공위의 통전업무를 도와주었다....당납은 이번에 그를 해방구로 호송하면서 도중에 상해에 들른 것이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일이었다. 이는 그가 이때 비밀리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함녀 전해에 <문회보>가 폐간될 때, 당납, 진우손, 환향등은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에 언제든지 체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숨거나 멀리 타향으로 갔다. 당납은 당시 소주 고향집으로 갔다가, 얼마후에 홍콩으로 간다. 이때는 위험이 상존했는데도 몰래 상해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서주성은 놀란 마음을 한동안 추스리지 못했던 것이다.

 

당납은 상해로 가는 길에 서주성에게 구두로 전달했는데, 그것은 출로를 찾고 있던 <문회보>의 일부 동료들에게 방향을 알려준 것이었다. 그는 홍콩으로 가서 '민혁'과 협력을 협의하려는 서주성에게 장건량(張建良), 하연의 연락방식을 제공한다. 장건량을 통하면 반한년(潘漢年)을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바로 반한년이 막후에서 '민혁'과 '문회보'와의 협력을 주도했던 것이다.

 

당납이 제공한 연락방식에 따라 서주성은 상해를 떠나 홍콩으로 간다. 전후로 장건량, 하연과 반한년을 만나고, 이제심, 채정개(蔡廷锴), 담평산(譚平山)등 민혁의 고위층을 방문한다. 상해 <문회보>를 대표하여 순조롭게 합작건을 논의한다. 최종적으로 당납은 홍콩 <문회보>의 창간에 참여하였을 뿐아니라, 총편집을 맡아, 편집업무를 책임지는 외에 총주필 겸 경리부를 담당하던 서주성과 경제적인 압력과 대외연락을 분담했다. 만일 반한년이 전체 방안의 기획자라면, 당납은 한걸음 한걸음 추진한 집행자이다. 당납이 지금은 이미 환갑을 넘은 홍콩 <문회보>를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2012년 7월, 홍콩의 원로신문인 용약(容若)은 <명보월간>에 글을 써서, 홍콩 <문회보>는 처음부터 공산당이 '지배주주'인 신문이며, 당납은 "이 신문을 만든 막후연락인"이라고 하였다. 앞의 말을 좀더 따져봐야겠지만, 뒤의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반한년과의 관계가 남다르다.

 

서주성은 무당무파의 직업신문인이다. 상해 <문회보>에서 일할 때 동료들 중에서 누가 중공지하당원인지 잘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홍콩 <문회보>에서 일할 시기에 그는 과거에 이름만 들었지 알지 못했던 하연과 반한년을 만나고, 장건량도 알게 된다. 이들 공산당원들과 접촉이 날로 많아지게 되었다. 그는 회고글 <홍콩<문회보>창간초기>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반한년 동지는 항상 <문회보>의 상황에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업무가 아주 바빴고, 항상 민주당파와 민주인사들과도 연락해야 했고, 다른 중요한 업무도 있었다. 그는 자주 나와 만날 수는 없었다. 나는 일이 있으면 장건량동지와 연락하거나 혹은 마계량 동지를 통해서 전달하게 했다." 필자가 1982년 2월 서주성 선생의 지도하에 대학원을 다닐 때, 그가 글로 쓰지 않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중에는 당납이 반한년 계통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반한년, 장건량과 당납은 결의형제이고, 반한년이 큰형, 장건량이 둘째, 당납이 셋째였다는 것이다.

 

당납의 이 두명의 의형은 당시 신통광대하고 명성이 혁혁한 인물들이다. 반한년의 여러 업적은 그의 억울한 사건이 명예회복된 후 이미 많이 알려졌다. 1925년에 중공에 가입한 이 문화인은 중공 '특과'에서 정보와 보위업무를 책임지기 시작하면서, 항전시기와 해방전쟁시기에 오랫동안 적점령구와 국통구에 출몰하면서, 공개적인 통전공작과 비밀리에 정보공작을 뛰어나게 해냈다. 삼교구류의 친구들과 사귀면서 가치가 높은 정보를 수집했다. 은폐전선에서 공적이 탁월한 지도자였다. 

 

장건량이라는 이름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의 본명 "화극지(華克之)"는 전설적이다. 그가 아직 중공당원이 아니던 1935년 11월 손봉명(孫鳳鳴)을 기자의 신분으로 보내어 국민당 4기 6중전회 회의장에 들어가도록 한다. 원래 암살목표는 장개석이었는데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왕정위를 찔러서 상처입히면서 전국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학재금(郝在今)의 <중국비밀전>(작가출판사2005년판)에 따르면, 1937년 5월 4일, 모택동은 연안에서 찾아온 화극지를 만난다. 당시 국공합작으로 항일에 협력하는 것을 논의할 때여서 그를 연안에 남기는 것은 좋은 방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에게 화남으로 가서 중공과 이제심등과의 연락을 책임지는 일을 맡도록 건의한다. 그리하여 그는 화남으로 갔고, 장건량이라는 가명으로 반한년의 아래에서 일했다. 그는 일본인, 장개석, 왕정위세력간을 오가면서 많은 중요정보를 획득했고, 적지 않은 난이도가 높은 사명을 완수했다.

 

상해와 홍콩에서 두 번이나 당납과 함께 근무한 <문회보>의 은퇴편집인 임가요(任嘉堯)는 <당납(唐納): 흉회조국(胸懷祖國), 정계가원(情繫家園)>이라는 글에서 당납은 원목지(袁牧之), 정군리, 조단과 뜻이 맞아 결의형제였다. 그리고 '반한년과도 의결금란(義結金蘭)했다'. 그러나 그의 글에 장건량은 언급되지 않았다. 전술한 반한년, 장건량, 당납의 결의형제라는 주장은 아직은 한 사람만의 주장이다. 더 많은 자료로 확인해야 하지만, 최소한 당납이 반한년, 장건량과 보통관계가 아니라, 동일한 전선의 전우였다는 것은 설명해준다.

 

해방전날 왜 나라를 떠나 멀리 갔는가

홍콩 <문회보>는 1948년 9월 9일에 창간된다. 당납은 12월 돌연 사직한다. 그가 총편집을 맡은지 3달이 되지 않은 때였다. 이때, 인민해방군의 첩보가 계속 전해지고, 신문사의 동료들은 흥분해서 하루빨리 내지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주성은 기이하게 여겨져 물어본다: "지금 전국해방이 시간문제로 되었고, 동료들은 '청춘결반호환향(靑春結伴好還鄕)'할 준비를 하는데, 당신은 왜 돌연 이 나라를 떠날 생각을 하는가?" 그러면서 그를 간절하게 만류했다. 다음날 반한년이 서주성에게 말한다: "마계량은 떠나야 한다. 당신이 굳이 그를 만류할 필요는 없다." 나중에 신문사에서 연회를 베풀어, 당납을 전별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다. <서주성회고록>(삼련서점1998년판)에는 이 일을 적을 때 한 마디 덧붙였다: "수십년후, 나는 마계량의 선견지명에 탄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임가요는 <고구억당납(故舊憶唐納)>에서 이 일을 언급한다. 당남은 마음 속으로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다. "해방전쟁의 승리로, 나의 바램은 실현되었다. 당신들은 모두 돌아갈 수 있지만, 나는 안된다." 그리고 당납은 한 젊은 편집자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나를 버리고 떠난 여자를 위하여 내가 만일 돌아간다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강청과 알고 지냈던 정군리, 왕영(王瑩), 조단, 욱풍(郁風)등이 '문혁'때 모두 비참한 처지에 놓인 것을 생각하면, 당납은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그저 '사후제갈량'식의 가정이다. 1980,90년대의 정치환경하에서 생각해보면, 강청의 화를 피하기 위해 당납이 출국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정상적이고 가장 정확한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고, 자세히 따져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남평'의 첫번째 남자친구인 유계위는 이름을 황경(黃敬)으로 고치고 청도에서 출옥한 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북경으로 간다. '12.9'운동에 참가하며, 여러 해동안 혁명투쟁을 거치고, 해방후에는 전후로 천진시장, 제1기계공업부장, 국가과위 부주임을 지내다가 1958년 2월에 병사한다. 비록 그가 업무과정에서 모택동에게 심한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강청과 무관한 일이다. 그리고, 장민은 나중에 처자식의 곁으로 돌아간다. 해방후에는 중앙전영국 예술위원회 주임, 북경전영학원 원장, 당위서기를 맡고, '문혁'때에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1975년 사망한다.

 

사실상, 당납이 출국한 것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건 완전한 개인행위가 아닐 것이다. 그의 소주중학 동문이며 나중에 경제학자가 되는 오대곤이 쓴 <삼십년대초기의 소주혁명투쟁을 회고한다>는 글에서 학교다닐 때의 당납, 사매등과 함께 길거리에서 항일구국선전을 하던 옛일을 회고한다. 당납에 대하여 그 글에는 이런 각주가 붙어 있다: "소주중학을 떠난 후, 당납은 계속 혁명사업과 문화사업에서 적지 않은 일을 했다. 해방전날, 멀리 해외로 간다. 건국초기, 나는 상해에서 반한년을 만났는데, 반한년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납은 내가 해외로 보낸 것이다. 그는 국민당외교관의 딸을 처로 취했다.' 기실 당납은 아마도 강청이 자신에게 불리한 일을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멀리 떠난 것일 것이다." 이 주석은 한 가지 사실과 한 가지 추측을 말해준다. 사실은: 반한년이 당납을 미국으로 보낸 것은 그가 파견한 것이라는 것이다. 추측은: 당납이 이렇게 떠난 것은 강청이 그를 해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추측에 대하여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지만, 사실이 만일 확실하다면, 당납이 미국으로 간 것은 전략적인 안목을 가진 반한년이 해외정보공작을 위해 네트워크를 깔기 위한 한걸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대곤의 주장은 서주성이 회고한 반한년이 그를 불러 '굳이 만료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과 부합된다. 당납이 미국으로 간 것은 반한년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확실히 영어수준이든, 사회경험이든 아니면 교제능력이건, 당납은 해외에 파견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이미 뉴욕유엔본부에서 일하는 애인 진윤경과 만나야할 이유도 있다. 그리고 진윤경의 부친은 국민당정부의 고위외교관이다. 이런 가정배경 및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인간관계는 해외에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당납 본인에게도 공사를 겸비하며, 두 가지를 다 완벽하게 해내는 방법이다. 반한년이 오대곤에게 말한 그 '그가 국민당외교관의 딸을 처로 삼았다'고 말한 것은 당시 그가 상해시 부시장이라는 지위에 있기 때문에, 내부사정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공개할 수 있는 정치적입장이라고 할 수 있고,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만일 당납이 당시 동료들과 함께 내지로 돌아왔다면, 십중팔구 1955년 반한년사건이 발생했을 때 연루되었을 것이다. 반한년사건에 연루된 사람의 수가 백단위이고, 전국각지에 퍼져 있다. 당납은 반한년과 관계가 밀접했으므로, 분명 장건량(화극지)처럼 체포되어 형을 받았을 것이다. 설사 요행히 명예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24년후인 1979년이었을 것이다. 즉, 당납이 만일 국내에 있었다면 그의 '액운'은 일찌감치 '문혁'보다 10년전이 닥쳤을 것이고, 그때는 아직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하지 못했던 '강청'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해외에 거주한 것이 당납에게는 그래도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4년말, 당납은 홍콩에서 미국으로 간 후, 뉴욕의 중문신문사, 인쇄공장에서 2년이 안되는 기간동안 일하다가 프랑스 파리로 옮겨가 진윤경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아기른다. 그들은 중국식당을 운영하면서, 조용하고 편안한 생활을 지낸다. 1988년 8월 23일, 당납은 간암으로 사망하니, 향년 74세이다.

 

<강청전>이라는 책의 결말부분에 강청과 관련된 몇몇 인사의 최후를 언급했다. 그중 '사인방'이 타도된 후, 당납은 한때 중국대륙으로 돌아와서 다시 상해를 돌아보며 감개무량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그는 몇번 귀국했지만, 행적은 기밀을 유지했고, 공개적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섭검영, 나청장의 심상치않은 접견

 

당납이 처음 귀국한 것은 1978년이다. 하기언은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납이 처음 상해에 도착하고, 바로 하기언부부와 만나 옛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정군리의 부인 황신배(黃晨培)가 데리고 가서 정군리의 묘지에 헌화한다. 그후 북경으로 갔다. 당납은 확실히 조용히 다녔고, 공개적인 장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른 친구나 동료들과는 만나보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던 것같다.

 

그렇다면, 당납이 북경에서 누구를 만났을까? 그리고 무슨 일을 했을까? 외부인이 추측하거나 판단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여러해가 지난 후 마침내 단서가 나타난다. 2008년 12월 18일 <남방주말>의 '개혁팔현(改革八賢)'에 관한 글중에 <섭검영:최후10년>에는 4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중 한장의 사진에 붙어있는 설명은 이러했다: "1978년 12월 섭검영이 북경에서 프랑스화교 당납(좌3)을 접견하다. 우1은 나청장(羅靑長), 좌2는 섭선녕(葉選寧), 좌1은 섭선기(葉選基)이다" 사진에 당납은 가운데 자리에 섰다. 이는 깜짝 놀랄 일이다.

 

현대당대혁명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섭검영 원수는 당시 중공중앙부주석, 중앙군위부주석과 전인대상무위원장으로 덕망이 높고 지위도 높았다. 전쟁연대에 그는 방면군 혹은 전군 참모장을 맡았고, 여러차레 중대한 사변에 관여했으며, 일찌기 중공남방국의 업무도 주재했었다. 그리고 남방지구에서 홍콩,마카오를 포함한 해외의 정보, 통전업무등도 관장했다. 나청장은 중앙조사부 부장으로, 국가정보안전부서의 1인자였다. 섭선녕은 섭검영의 차남으로 나중에 해방군총정연락부장을 지낸다. 섭선기는 섭검영의 조카로 역시 기요업무에 참여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프랑스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화교가 여러 해가 지나서 귀국했는데, 어떻게 섭검영같은 당정군의 주요지도자를 접견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국가정보안전기구의 책임자이고 화교업무를 관장하지 않는 관리가 배석하겠는가. 당납은 1978년말 북경에서 이 정도로 높은 규격의 대우를 받고, 특별한 접견을 한 것은 그가 일찌기 신비한 신분을 지녔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심상치않은 안배를 받은 것은 그에게 있어서 설사 '인조(認祖)'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귀종(歸宗)'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만남에서 섭검영이 무슨 말을 했을지, 당납은 또 어떤 말을 했을지, 당납은 회고록을 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관련내용은 아마도 모 부서의 자료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당납은 일찌기 공산당원이었고, 게다가 특수전전에서 일했던 일원이었다.

 

일생이 다채로왔고 여러 분야에서 족적을 남긴 역사인물에 대하여, 그의 몸을 가리는 신비한 면사를 철저히 걷어낼 수는 없을까? 그건 아마도 비밀자료들이 공개되는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