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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제29

서위(徐渭): 팔고부중(八考不中), 구사불사(九死不死) 글: 호연문사(浩然文史) 명나라때의 대문인(大文人)을 얘기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해진(解縉), 당백호(唐伯虎)를 알고 있고; 능문능무(能文能武)의 인물을 말하면, 왕양명(王陽明)을 얘기한다. 그들의 경력은 모두 전설적이다. 다만 이들보다 더욱 전설적인 인물이 있으니 바로 가정(嘉靖), 융경(隆慶), 만력(萬歷)연간에 활약한 서위(徐渭)이다. 서위는 일생동안 8번 과거에 실패했으며, 그후 호종헌(胡宗憲)이 지휘하는 동남항왜전쟁(東南抗倭戰爭)에 참가한다. 서위의 책략하에 명나라는 대해도(大海盜) 서해(徐海), 왕직(汪直)을 체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종헌의 죽음으로, 서위는 의기소침해져서 9번이나 자살을 시도하지만 죽지 않았다. 결국 빈곤하게 여생을 살아갔으며 죽을 때는 곁에 개 한마리만 그를 지켰다. 서.. 2023. 8. 16.
명나라관리 엄숭(嚴嵩)의 타락사(墮落史) (1) 글: 장금(張嶔) 1. 가정제(嘉靖帝)의 생각 선덕(宣德)연간부터 명나라의 최고권력은 삼각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황권의 아래에 문관집단(文官集團)과 환관집단(宦官集團)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 특히 문관집단은 내각제도가 성숙되면서, 발언권이 점점 강해져서 황권에 대하여도 어느 정도 제약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같은 문관집단에 속하는 언관(言官)세력의 발언권도 크게 높아졌다. 이런 행정전통을 가정제(嘉靖帝) 주후총(朱厚㷓)은 우습게 보았다. 그의 눈에, 무슨 문관이든 환관이든 내각이든 도찰원이든 사례감이든 모조리 황제의 노재(奴才)인 것이다. 착실하게 말만 잘 들으면 되는 것이다. 국가대사는 그저 황제인 그 본인이 혼자서 결단을 내리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들은 열심히 집행만 하면 천하는 태평하게.. 2023. 4. 20.
서계(徐階) vs 엄숭(嚴嵩): 관료투쟁에서 어떻게 승리하는가? 글: 자귤(紫橘) 드라마에서 엄숭(嚴嵩)이 수보(首輔)로 있던 시기는 청류(淸流)가 엄숭(嚴嵩)과 투쟁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청류파(淸流派)는 서계(徐階), 고공(高拱), 장거정(張居正)을 핵심으로 한다. 그중 고공이 가장 과격했으며, 영원히 엄숭일당과 정면으로 부딛쳤다. 그리고 청류파중에서 관직이 가장 높았던 사람은 차보(次輔)인 서계인데, '과격파' 고공과 비교해보면 서계는 항상 엄숭의 주변에 있었다. 서계는 몸은 내각(엄숭의 영역)에 있으면서, 마음은 청류에 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엄숭을 타도하는 것이 성공한 후, 서계가 수보를 맡고나서도 그는 엄숭에 대하여 완전히 청산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여전히 엄숭을 예로 대했다. 이는 서계의 원활한 성격을 보여준다. 그렇.. 2023. 1. 26.
육병(陸炳): 가정제(嘉靖帝)때 가장 큰 권세를 가졌던 숨은 인물 글: 자귤(紫橘) 탄송윈(譚松韵), 런자룬(任嘉倫)이 연출한 의 결말은 그래도 좋은 편이다. 결말은 이러하다: 융경제(隆慶帝)에 이르러 하언(夏言)의 집안을 명예회복시켜준다. 그러나 진실한 역사에서는 하언이 명예회복되었지만, 육병(陸炳)이 연루되었기 때문에, 육병은 죄를 받는다. 역사적으로, 육강(陸絳)은 진짜 육병의 아들이다. 육강의 육씨집안은 가정제때 가장 큰 권세를 가진 가족이었고, 육강의 부친 육병은 가정제를 구해준 적이 있기 때문에, 가정제의 신임을 깊이 받았다. 육병은 금의위(錦衣衛) 지휘사(指揮使)로 15년간 지내면서 뇌물을 무수히 많이 받았다. 특히 그는 엄숭(嚴嵩)과 합작하여 비교적 정직한 수보(首輔, 재상) 하언(夏言)을 제거한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정치국면은 더욱 암담해진다. 1. 육.. 2022. 10. 26.
가정제(嘉靖帝): "제왕술(帝王術)"의 최고고수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정덕15년(1520년) 구월, 남하하여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를 생포한 황제인 명무종(明武宗) 주후조(朱厚照)가 병석에 눕는다. 원인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도중에 혼자서 강위에서 배를 띄우고 물고기를 잡다가 부주의하여 물에 빠졌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북경 자금성 안에서만 살아왔던 황제는 수영을 할 줄도 몰랐고, 물에 빠져서 익사할 뻔한다. 이치대로라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온갖 놀이를 다해 본 황제라면 무수한 일을 겪었을 것이고, 물에 한번 빠졌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이틀 정도 기침이나 하고, 태의가 지어준 약이나 먹으면서 침상에 한 이틀 정도 누워있으면 정상으로 회복될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부대가 경성으로 돌아온 후에도 명무종의 병은 낫지를 않.. 2021. 4. 23.
장거정(張居正): "개혁" 원저: 정념기(程念祺) (2019년 12월) 경제관찰보 발췌요약본 명효종(明孝宗) 통치시기에 대학사 이동양(李東陽)은 상소문에 이렇게 쓴 바 있다: 민간의 상황을 군현이 모르고 있고, 군현의 상황을 조정이 모르고 있고, 조정의 상황을 황제가 모르고 있다. 명나라의 '절대황권'하에서 전체 관료계통에서 정보획득방식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태에서, 여려 제도상의 폐혜를 개혁하려는 것은 여러가지 정보부족으로 인한 곤란을 겪기 마련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황제 본인이 정보에서 차단되어 있어 개혁의 발동자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인종(明仁宗), 명선종(明宣宗)이래 명나라의 '조종법제'가 이미 여러 헛점이 발견되었음에도, 그 적폐가 계속 누적되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다만.. 2020. 8. 21.
<금병매(金甁梅)>와 엄세번(嚴世蕃)의 관계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명나라때의 저명한 소설 는 엄세번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서문경(西門慶)"인데, 그는 바로 엄세번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엄세번의 아명이 "경아(慶兒)"였고, 호는 "동루(東樓)"인데, 의 작자인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은 '동루'를 '서문'으로 바꾸고, '경'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써서, 주인공의 이름으로 썼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엄세번의 황음무도한 생활을 고발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서문경"이라는 이름이 엄세번을 원형으로 하였는지 아닌지는 잠시 미뤄두자. 다만, 엄세번은 성격이 탐욕스럽고 잔혹했으며, 생활이 부패방탕했다는 것은 맞다. 그래서 소설속의 서문경과 어느 정도 닮은 점은 있다. 그리고, 민간전설.. 2020. 7. 16.
가정제(嘉政帝)는 왜 엄숭(嚴嵩)을 중용했을까?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명세종(明世宗) 가정제는 논쟁이 많은 황제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영명하여 명태조 주원장에 비견할 만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혼용무능(昏庸無能)하여 연단(煉丹)에만 빠져있었다고 본다. 다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명세종은 즉위초기의 몇년간 확실히 잘 통치했었다는 것을 설사 후기에는 일년내내 수도에 빠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정을 완전히 내팽개쳐둔 것은 아니었다. 명세종은 지극히 총명하고 자신감이 넘치던 황제이다. 그리고 약간은 과대망상이 있었다. 자신과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것은 엄숭과 같은 관료사회의 노련한 인물들만이라고 여긴다. 결국 명세종은 무능한 혼군이 아니었다. 엄숭(嚴嵩)을 살펴보자. 엄숭은 명나라때 강서(江西) 분의(分宜) 사람이다. 자는 유중(惟中).. 2020. 6. 30.
베이징의 노자호(老字號) 육필거(六必居)의 현액(懸額)은 엄숭(嚴嵩)이 썼을까? 글: 용가독사(勇哥讀史) TV드라마 을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명나라때, 북경의 노자호 점포인 '육심거(六心居)'가 있었다. 이곳은 조(趙)씨성의 형제 6명이 창업한 것으로, "육인동심(六人同心)"이라는 뜻이다. 대신 엄숭(嚴嵩)은 육심거의 장채(醬菜)를 아주 좋아해서, 계절마다 새로운 장채가 나오면, 엄숭은 가정제(嘉靖帝)에게 한 단지씩 보내곤 했다. 가정제는 육심거의 장채를 맛본 후 아주 만족하여, 육심거의 '심(心)자에 획을 하나 추가했다. 그렇게 하여, "육필거(六必居)"가 되었다. 그리고 엄숭이 직접 현액을 써서 점포의 이름으로 삼았다. 엄숭이 육필거의 점포현액을 써주었다는 주장은 민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육필거박물관의 공식입장은 엄숭이 육필거의 점포 편액을 써준 것은 맞지만, 가정제가 육필.. 2020. 6. 11.
명나라는 정말 "시망어가정(始亡於嘉靖)"일까? 글: 기점역사(起點歷史) 가정(嘉靖, 1522-1566)은 명나라의 열한번째 황제인 명세종(明世宗) 주후총(朱厚㷓)의 연호이다. 명나라때 가정이라는 이 연호는 모두 45년간 사용되었다. 명나라에서 두번째로 길게 사용된 연호에 해당한다(가장 길게 사용된 연호는 명신종 만력제의 만력으로 모두 4.. 2019.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