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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거정)

장거정(張居正): "개혁"

by 중은우시 2020. 8. 21.

원저: 정념기(程念祺) <명제국쇠망사(明帝國衰亡史)>(2019년 12월)

경제관찰보 발췌요약본

 

명효종(明孝宗) 통치시기에 대학사 이동양(李東陽)은 상소문에 이렇게 쓴 바 있다: 민간의 상황을 군현이 모르고 있고, 군현의 상황을 조정이 모르고 있고, 조정의 상황을 황제가 모르고 있다. 명나라의 '절대황권'하에서 전체 관료계통에서 정보획득방식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태에서, 여려 제도상의 폐혜를 개혁하려는 것은 여러가지 정보부족으로 인한 곤란을 겪기 마련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황제 본인이 정보에서 차단되어 있어 개혁의 발동자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인종(明仁宗), 명선종(明宣宗)이래 명나라의 '조종법제'가 이미 여러 헛점이 발견되었음에도, 그 적폐가 계속 누적되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다만, 명왕조 만력쵝 우연한 요소가 모여서 마침내 장거정의 개혁이 일어난다.

 

황제는 정보가 차단되어 있던 것이 개혁의 발동자가 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즉 환관의 전권(專權)이다. 다만, 명무종(明武宗)은 사망할 때, 이 문제에 전기가 나타난다. 명무종은 아주 황당한 황제였다. 그러나 죽을 때는 아주 정신이 맑았다. 그는 사례감의 환관을 시켜 태후에게 말을 전하게 한다. 국가의 일은 아주 중요하다. 내각대학사와 공동으로 상의해야 한다. 과거의 일은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 환관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확실히 명무종은 명나라의 환관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관노로서 황제의 종용이 없었다면 이들은 기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내각대학사는 비록 가신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황제게 전체 관료집단을 장악하는 중개인이다. 그 구성원은 모두 관료집단출신이다.

 

명무종이 사망하고, 후사가 없었다. 새황제를 누구로 세울 것인지를 논의해야만 했다. 궁내의 환관들은 이미 군룡무수(群龍無首) 상태였다. 명무종의 시신이 아직 식기도 전에, 태감 장영(張永), 곡대용(谷大用)은 내각으로 가서 대학사 양정화(楊廷和)를 만나 새 황제를 누구로 옹립할지를 논의한다. 이 내각수보(內閣首輔)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바로 말한다. 황위의 계승자는 명나라의 조훈의 규정에 따르면, 마땅히 명무종의 종제(從弟) 주후총(朱厚熜)이 되어야 한다. 더 이상 상의할 것도 없다. 이 주후총이 바로 나중이 명세종(明世宗)이다.

 

황위가 잠깐 비어 있을 때, 내각은 돌연 심상치않은 작용을 하게 된다. 먼저, 양정화의 주후총을 황제로 옹립하자는 건의는 즉시 태후의 지지를 받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명무종이 사망하고, 주후총이 봉지(封地)를 떠나 북경으로 와서 등극할 때까지 중간에 37일간 황위가 비어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바로 이 37일동안 수보 양정화는 파천황식으로 조정을 휘어잡는다. 주후총이 입경한 후, 양정화는 그를 위해 등극조서를 초안한다. 명무종때의 폐정은 모두 폐지된다. 그때 문서장(文書房)의 환관이 양정화를 찾아와서, 조서의 몇 곳은 내용이 부적절하니 삭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그러자 양정화는 바로 화를 벌컥 낸다: "과거에 어떤 일이 너희들 마음에 들었느냐? 너희는 걸핏하면 황제가 어떻고 저떻고 했는데, 지금 다시 조서를 삭제해서 고치자니. 설마 그것도 새 황제의 뜻이란 말인가? 그럼 우리가 조회에 나가서 신황제 등극을 경하할 때 직접 물어서, 도대체 누가 조서를 삭제하고 고치려 했는지 확실히 알아보는게 좋겠는가?" 이번에도 다시 양정화가 승리를 거둔다.

 

양정화는 황위가 잠시 비어있던 틈을 이용하여, 가볍게 환관세력을 억눌렀다. 그리고 명세종이 재위한 45년간 시종 환관세력은 억눌러진다. 이렇게 하여 자연스럽게 내각의 권력이 갈수록 중요해진다. 내각수보 대학사의 권력은 특히 중요하게 된다. 차보(次輔)와 나머지 보신(輔臣)도 모두 수보의 명을 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명세종 통치시기에 각신들은 수보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각양각색의 이유를 내걸며 내각내에서 격렬하게 투쟁을 벌였다.

 

명세종 본인은 비록 등극초기에 정무에 관심을 가졌으나, 그의 흥취는 금방 자신의 친생부모를 받드는 것으로 넘어간다. 친생부모도 황제, 황후의 명호를 얻고, 전황제, 황후와 같은 대우를 받게 하도록 하기 위해, 명세종은 모든 정력과 신경을 쏟는다. 그외에 명세종은 방술(方術)을 좋아했고, 토목공사를 벌였다. 확실히 명세종은 개혁을 일으킬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명세종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주재기(朱載坖)가 등극한다. 그가 바로 명목종(明穆宗)이다. 그는 정무에 게으르고, 돈을 마구잡이로 쓰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재위기간은 겨우 6년이었다. 황위를 다시 계승한 것은 그의 9살된 아들 주익균(朱翊均鈞)이다. 명사에서는 그를 명신종(明神宗)이라 부른다. 명목종이 죽기전에 수보는 고공(高拱)이었다. 그러나, 명목종이 죽자, 사례감장인태감 풍보(馮保)의 도움으로 고공의 수보 지위는 금방 장거정이 차지하게 된다.

 

풍보는 고공에게 원한이 깊었다. 명세종때, 중요한 환관직위는 일반적으로 내각수보가 추천했다. 명목종때, 환관의 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었는데, 이 오래된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고공이 수보로 있을 때, 전후로 진홍(陳洪), 맹충(孟沖)을 추천하여 사례감장인태감을 맡게 했다. 당시 병필태감(秉筆太監)이던 풍보는 계속하여 밀려났다. 풍보는 이로 인하여 불만이 컸고, 장거정과 결탁한다. 명목종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장거정은 밀서를 써서 내각의 한 하급관리를 통해 풍보에게 전한다. 고공은 그 사실을 알고 직접 쫓아갔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고, 그 하급관리가 내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눈 멀거니 뜨고 보고 있어야 했다. 고공은 대노한다. 장거정에게 도대체 무슨 짓이길래 밀서를 환관에게 전하느냐고 추궁한다. 장거정은 난감한 얼굴로 그저 헛웃음만을 웃을 뿐이었다. 그날 명목종이 붕어하고, 유조는 풍보를 맹충을 대신하여 사례감장인태감으로 삼는다.

 

장거정은 권력욕이 매우 강한 인물이다. 그리고 총명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큰 일을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풍보와 결탁하여 음모로 수보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수보로서 그는 큰 일을 해내고자 한다. 이미 쇠퇴하는 명왕조를 중흥시키는 것이다.그때 명신종은 아직 어린아이였고, 쉽게 조종당했다. 그와 풍보는 특수한 관계였고, 그가 하고 싶어하는 일은 모두 '성지'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특수한 배경하에, 수보 장거정은 마침내 개혁이 발동자가 된다.

 

장거정의 개혁은 주로 아래의 몇 가지 방면이다.

 

첫째, 정돈이치(整頓吏治). 명나라때 관료사회의 모습은 장거정을 크게 실망시켰다. 그가 보기에 그때 관료사회는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명성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아래와 위가 서로 호감을 사려 하며, 자신과 뜻이 다르면 공격하고, 책임을 지지 않고 떠넘기며, 백성을 돌보지 않았고, 뇌물이 성행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관료사회의 법이 있어도 따르지 않고, 명령을 내려도 집행되지 않는 고질이었다. 그는 당시 관료사회의 상하급관계를 이렇게 형용했다. 시어머니가 하루종일 잔소리를 하지만, 며느리는 들은 척 만 척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는 관리들에게 "고성법(考成法)"을 시행한다. 소위 '고성'은 관리의 실적에 대항 실질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원래 법을 만들기는 쉬우나, 집행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장거정은 '법은 반드시 이행되고" "말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요구했다. 그가 제정한 관리의 우열을 평가하는 기준은 바로 지방을 다스리면서 백성을 괴롭히지 않고, 백성들이 편하다고 느끼면 우등이다; 일을 하면서 엣날에 하던대로만 하고, 그저 문서로 말만 하는 것은 비록 좋은 명성이 있더라도 하등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런 평가기준이 차례로 적용되게 하였고, 절대로 거짓으로 평가할 수 없게 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수시평가제도를 취한다. 즉 조정의 각 아문 사이에 공문서가 오고가는 것은 일상사무를 제외하고 반드시 자료를 남겨야 했다. 문제를 처리하고나면, 반드시 말소절차를 취해야 했다. 지연시키거나 속이는 경우에는 상급에 고발하게 했다. 고성법이 실행되면서, 중점은 업무효율을 올리는 것이었다. 고성법을 실행한 후, 관리들은 감히 문서로만대충 대응할 수 없게 된다. 조정의 정령은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집행된다. 다만 당시 관료사회의 다른 문제는 장거정이 그다지 큰 힘을 들여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둘째, 정돈군비(整頓軍備). 처음에 내각에 들어갔을 때, 장거정은 명나라의 북부변방을 특히 중시했다. 그가 수보에 오르자, 군비를 새로 정비하기 위해, 그는 더욱 전력을 다하여 계진총병(薊鎭總兵) 척계광(戚繼光)을 지원해서, 척계광이 계진의 군사를 완전히 장악하고, 독특하게 훈련시킨 전투부대를 양성하게 한다. 그는 계주관할구역내의 다른 고위장수들을 다른 지방으로 보낸다. 나중에 척계광을 괴롭히는 문관은 계진에서 다른 곳으로 보냈다. 장거정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척계광이 다시 명나라의 군대를 부흥시키는 좋은 방법을 찾아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계진에 재정지원을 많이 해주고, 척계광이 충분한 마필, 화기와 전차를 갖추도록 해주었다. 새로운 전투부대를 양성하고,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다. 그러나, 척계광이 계진에서 한 모든 것은 당시에 그저 몽골 안다부(俺達部)의 침입을 막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안다부는 명목종때 이미 명왕조와 우호관계를 맺는다. 다만 요동에는 몽골의 소왕자(小王子) 부락이 자주 명나라의 변경을 침입했다. 장거정은 이성량(李成梁)을 기용하여 요동을 지키게 한다. 이성량도 싸움을 잘 하는 자군이었고, 연이어 소왕자의 기병부대를 격패시킨다. 장거정이 척계광과 이성량을 지원함으로써 명나라의 북방변경은 안정되었다.

 

셋째, 정돈학교(整頓學校). 인재를 배양하기 위하여, 장거정은 명나라의 학교를 개혁한다. 그의 방식은 부, 주, 현학의 생원들에게 엄격한 평가제도를 도입하다. 학업이 엉망이거나, 인재로 크지 못할 자들은 모조리 내보냈다. 동생(童生)으로 생원시험을 치는 경우에는 반드시 3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엄격한 인원제한을 두었다. 큰 부는 20명을 넘을 수 없었고, 큰 주, 현은 15명을 넘을 수 없었다. 학교를 인재배양의 장소로 보았기 때문에, 장거정은 이부에서 시험을 주관하는 제학관을 고르는데 신중하게 하도록 했다. 품행이 불량하거나, 학문이 모자란 제학관은 모조리 파직시킨다. 마찬가지로 그는 나태하고 학문이 부족하여 스승이 되기 부족한 유학교관도 학교에서 정리했다.

 

넷째, 정돈재정(整頓財政). 가정제, 융경제 이래이 심각한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장거정은 명나라의 재정에 대규모의 정돈을 진행한다. 목표는 부역을 공평하게 하고, 세제를 간소화하는 것이다. 먼저, 장거정은 전국의 토지점유상황을 조사한다. 사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번에 3년을 기한으로 한 토지조사에서 모두 7억1천3백만무의 토지점유상황을 확인한다.  이렇게 많은 토지를 조사했기 때문에, 장거정은 전국 범위내에서, '일조편법'을 시행할 수 있었다. 원래 법정의 부세와 요역 그리고 각양각색의 잡세잡역을 모조리 하나로 모았다. 합쳐서 은량으로 계산했다. 그 후에 토지에 부과한다. 다만 구체적인 집행과정에서 적지 않은 지방에서는 여전히 일조편법을 사람을 기준으로 징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