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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육병(陸炳): 가정제(嘉靖帝)때 가장 큰 권세를 가졌던 숨은 인물

by 중은우시 2022. 10. 26.

글: 자귤(紫橘)

 

탄송윈(譚松韵), 런자룬(任嘉倫)이 연출한 <금의지하(錦衣之下)>의 결말은 그래도 좋은 편이다. 결말은 이러하다: 융경제(隆慶帝)에 이르러 하언(夏言)의 집안을 명예회복시켜준다. 그러나 진실한 역사에서는 하언이 명예회복되었지만, 육병(陸炳)이 연루되었기 때문에, 육병은 죄를 받는다. 역사적으로, 육강(陸絳)은 진짜 육병의 아들이다. 육강의 육씨집안은 가정제때 가장 큰 권세를 가진 가족이었고, 육강의 부친 육병은 가정제를 구해준 적이 있기 때문에, 가정제의 신임을 깊이 받았다. 육병은 금의위(錦衣衛) 지휘사(指揮使)로 15년간 지내면서 뇌물을 무수히 많이 받았다. 특히 그는 엄숭(嚴嵩)과 합작하여 비교적 정직한 수보(首輔, 재상) 하언(夏言)을 제거한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정치국면은 더욱 암담해진다.

 

1. 육병의 초년시절

 

육병은 1510년 호북(湖北)에서 태어났다. 육병의 조부인 육지(陸墀)는 성화제(成化帝)때 금의위가 된다. 1494년 금의위의 육지는 흥왕(興王) 주우원(朱祐杬)을 따라 호북으로 간다. 육지는 이로 인하여 금의위 총기(總旗)를 세습하게 되고, 이때부터 육씨집안과 명세종(明世宗) 일맥과의 은원이 시작된다. 1521년, 명무종(明武宗)이 사망하고 자식이 없었다. 호북의 주우원의 아들 주후총(朱厚熜)이 황제의 자리를 승계하게 된다. 육씨집안은 주후총을 따라 북경으로 간다. 육씨집안은 황제를 따른 공이 있으므로, 금의위 천호(千戶)를 세습하게 된다. 비록 육씨집안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1532년에 육병은 무과 과거에 참가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방식으로 군대에 들어가고, 계주(薊州)로 파견되어 찬화(贊畵, 참모)가 된다. 

 

1534년, 몽골이 계주진의 냉구(冷口)를 침입한다. 육병의 지휘로 명군은 몽골의 침입을 격퇴한다. 육병은 직접 몽골기병 1명을 죽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위소(衛所)의 부천호(副千戶)로 승진한다. 1536년, 육병은 조정으로 돌아오고, 금의위의 관직을 계승한다. 얼마 후, 가정제는 육병을 금의위 지휘첨사(指揮僉事, 금의위의 3인자)로 임명하여, 황제의 신변을 호위하게 한다. 

 

2. 육씨집안의 굴기

 

육씨집안의 전환점은 1539년의 가정제 남순이다. 이해 2월 16일, 가정제는 호북의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육병은 가정제를 호송한다. 28일, 가정제 일행이 하남 위휘(衛輝)에 도착해서 머문다. 밤에 위휘행궁(行宮)에 돌연 큰 불이 난다. 마침 날씨가 전조하여 불길은 바람을 타고 가정제의 궁전을 둘러쌌다. 가정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길 속에 갇혀 있었다. 이런 위기일발의 순간에, 육병은 불길을 무릎쓰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 가정제를 등에 엎고 불길을 빠져나와 가정제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다. 이 화재는 여러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위휘의 지방관리들은 모조리 관직이 박탈된다. 그리고 육씨집안은 가정제의 심복으로 떠오른다. 가정제는 육병을 "충신"이라고 칭하면서 이때부터 "권임독융(眷任獨隆), 사지백작(賜之伯爵), 탁이심려(托以心膂)"(그를 후하게 돌보아주고, 백작의 작위를 내리며, 그에게 의지했다). 금방 육병은 금의위 지휘동지(指揮同知)로 발탁되어 실질적으로 금의위를 장악한다.

 

1542년, 다시 궁녀들이 가정제의 목을 졸라 죽이려 한 "임인궁변"이 발생한다. 궁변때, 육병은 마침 순라중이었는데, 마침 황상을 보호하라는 성지를 받고, 즉시 황제의 침궁으로 쳐들어가, 황제를 죽이려던 궁녀들을 붙잡는다. 가정제는 깨어난 후, 육병이 가장 먼저 뛰어들어와 구해준 것을 알고 아주 기뻐했다. 1545년, 금의위지휘사(指揮使) 진인(陳寅)이 은퇴하자, 육병은 금의위를 완전히 장악하며 이후 15년간 금의위를 관장하면서, 가정제때 가장 권세있는 인물중 하나가 된다.

 

3. 육병의 재정(財政)

 

정통제(正統帝)이후, 금의위의 관직은 대부분 명예직으로 단지 봉급만 받아갔다. 가정제가 등극한 초기, 금의위에 소기(小旗) 이상의 관리는 250명에 불과했다. 가정말기에 이르러, 금의위의 관리는 1,700명으로 폭증한다. 이는 많은 정도로 육병이 금의위의 권세를 강화하기 위하여 편제를 늘인 덕분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육병이 금의위를 장악한 초기에 금의위의 실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특별히 1만명을 교위(校尉)로 모집했다. 이들은 북경의 길거리와 시장에 잠복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그후 육병은 북경의 돈있는 집안에서 7천명을 모집하고, 이들을 "제기(緹騎, 제는 붉은비단이라는 뜻임)"라 불렀다. 이들은 하남, 산동, 산서, 섬서의 4개성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했다.

 

육병이 이렇게 많은 특무를 모집하여 활용한 것은 당연히 "일심위공(一心爲公)"은 아니었다. 더 큰 이유는 사리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육병은 명문거족이 아니다. 그렇지만 육씨집안의 재산은 육병의 대에 이르러 엄청나게 불어난다. 육병은 바로 이들 특무를 통하여 민간의 동태를 장악하고, 누구든지 불손한 언동을 하면 즉시 체포하고 돈을 받아냈다. 아무도 정부를 비방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 만들어 내서, 사람들로부터 돈을 갈취하기도 했다. 가정제때만 육씨집안이 끌어모은 재산은 수백만에 이른다. 금은보화가 만에 이르렀고, 저택은 북경지방에서 가장 호화로웠다. 휴가를 보내는 별장만 십여개에 이르렀다. 모두 화려하기 그지없는 호화저택이었고, 곳곳마다 첩들을 두었다. 육씨집안은 또한 남경, 북경, 양주, 호북승천, 남창등 번화한 대도시에 전장과 점포를 경영하고, 고리대업을 하여 부가적국(富可敵國)의 수준에 이른다.

 

4. 육병의 권세

 

1557년 8월, 육병은 태보(太保)에 봉해지고, 나중에 소부(少傅)에 추가로 봉해진다. 특무의 우두머리가 공고(公孤, 삼공삼고를 가리킴 태사,태부,태보를 삼공이라 하고, 소사, 소부, 소보를 삼고라 함)의 칭호를 받은 것은 드물다. 하물며 육병은 명나라때 유일하게 공과 고의 칭호를 겸한 인물이다. 그래서 <만력야획편>에서는 "공과 고를 겸하면서 제기를 지휘한 것은 고금에 없었다"고 하였다.

 

육병의 금의위는 본직이 백관을 감찰하는 것이다. 그 자신의 관직도 아주 높은데다가 가정제의 심복이었으니, 육병의 언행은 가정제때의 정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장 저명한 것은 하언의 죽음이다. 하언은 1545년의 수보였다. 능력도 뛰어나고, 사람됨도 청렴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이 지나치게 셌다. 특히 그는 엄숭이 "천자의 총애를 믿고 설치는 것을 눈꼴시려워하며, 엄숭을 무시했다." 그리하여 엄숭은 하언을 아주 미워하게 된다. 육병은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온갖 불법행위를 저지르다보니 1547년 하언의 제자들이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육병은 그 일을 알고서 효웅의 본색을 드러낸다. 등에 가시를 지고 직접 하언의 저택으로 찾아가서 눈물로 자신을 용서해줄 것을 간청한다. 하언은 이에 마음이 약해져서 그러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육병은 하언을 더욱 미워하게 된다 "뼛속까지 하언을 미워했다."

 

1548년에 이르러, 하언은 하투(河套)를 수복할 것을 건의하다가 가정제에게 쫓겨난다. 엄숭, 육병은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합작하여 하언이 변방장수와 결탁했다고 무고한다. 가정제는 철저히 조사하도록 명을 내리고, 금의위가 공작을 시작한다. 항몽명장 정선(曾銑)을 먼저 잡아들여, 육병이 직접 심문하여 하언이 연루되어 있다는 진술을 받아낸다. 결국 하언, 증선은 모두 참수된다. 하언과 증선의 죽음은 명나라조정을 더욱 암담하게 만든다. 증선은 항몽명장으로 섬서를 지킬 때 여러번 엄답칸을 물리친 바 있다. 그리하여 엄답칸은 감히 남하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증선이 죽자, 이는 엄답칸에게 골치거리를 제거해준 셈이 된다. 결국 엄숭이 재상으로 있을 때, 엄답칸이 북경을 포위하는 "경술지변"이 발생하게 된다. 남방의 왜구도 갈수록 창궐하여 명나라의 국력은 나날이 쇠퇴하게 된다.

 

미국인 Luther Carrington Goodrich(중국명 傅路特)이 쓴 <명대명인록>에서 육병을 이렇게 평가했다: "무한한 정보활동권한을 가지고 행동이 비밀스러운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육병은 여러 사람의 집안을 망하게 만들고, 혹형을 가했으며, 비명에 죽게 만들었다." 

 

결론

 

육병은 가정제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의지하여 금의위를 권한을 최대한 키운다. 그리하여 금의위의 지위는 가정제때 동창(東廠)을 추월해버린다. 육병의 일생에서 최대의 오점은 하언을 무고한 것이다. 엄숭이 득세할 때, 그는 엄숭과 협력한다. 그는 딸을 엄숭의 손자 엄소정(嚴紹庭)에게 시집보낸다. 금의위가 같은 편이 되자 엄숭은 더욱 기고만장한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육병은 명사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했고, 일부 청류(淸流)를 보호한다. 그래서 융경제때 이부상서인 장한(張翰)은 이런 말을 남긴다: "그로 인하여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아주 많다. 선비들을 구해준 공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육병의 사인(死因)도 수수께끼이다. 육병은 1560년에 죽는데, <만력야획편>에는 육병의 사인에 대하여 두 가지를 적어놓았다. 하나는 술에 취해 죽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육병이 엄숭의 비밀을 장악하여, 엄숭이 그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융경제에 이르러, 조정은 육씨집안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1570년, 육씨집안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육병의 아들이자 금의위지휘첨사인 육강은 하옥되어 처벌받고, 서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