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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나라관리 엄숭(嚴嵩)의 타락사(墮落史) (1)

by 중은우시 2023. 4. 20.

글: 장금(張嶔)

 

1. 가정제(嘉靖帝)의 생각

 

선덕(宣德)연간부터 명나라의 최고권력은 삼각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황권의 아래에 문관집단(文官集團)과 환관집단(宦官集團)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 특히 문관집단은 내각제도가 성숙되면서, 발언권이 점점 강해져서 황권에 대하여도 어느 정도 제약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같은 문관집단에 속하는 언관(言官)세력의 발언권도 크게 높아졌다.

 

이런 행정전통을 가정제(嘉靖帝) 주후총(朱厚㷓)은 우습게 보았다. 그의 눈에, 무슨 문관이든 환관이든 내각이든 도찰원이든 사례감이든 모조리 황제의 노재(奴才)인 것이다. 착실하게 말만 잘 들으면 되는 것이다. 국가대사는 그저 황제인 그 본인이 혼자서 결단을 내리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들은 열심히 집행만 하면 천하는 태평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주후총은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먼저 환관집단을 억누른다. 사례감의 실권을 약화시켜서 완전히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각지방에 파견된 태감들을 불러들이고 자리를 없앤다. 내각에는 밀봉전주권(密封專奏權)이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권력이 커진 것같았지만, 몇 대의 내각 각신들은 모두 그의 손아귀에 완전히 장악되었다. 언관집단은 가장 참혹했다. 누구든지 상소를 올려 그의 화를 돋구기만 하면 죽을 지경으로 얻어맞거나, 황량한 변방으로 쫓겨가야 했다. 가정연간에 상소를 올렸다가 처벌받은 언관들만 전후로 수십명에 이른다. 그리하여 언관집단들도 집단적으로 벙어리상태가 되어버린다. 

 

특히 심한 것은 주후총의 정치적 수완이다. 신하들을 부리는 것을 마치 귀뚜라미를 데리고 노는 것처럼 했다. 대신들이 서로를 공격하게 하고, 그 후에 필요에 따라 어느 한쪽의 손을 잡아준다. 정치투쟁은 계속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자신은 황위에 편안히 앉아서 구경하면서, 권력게임을 즐겼다.

 

이렇게 통치하면서 치국의 성과도 나타났다: 주후총이 집권한 전반기는 명나라가 극히 번성한 기간이었다. 국가재정도 안정되고, 쌓아둔 물자도 풍족했다. 매년 백은 500여만냥이 남았고, 양초는 10년을 충분히 쓸 정도로 비축되어 있었다. 민간경제도 활발하여, 동남지방의 상품경제는 크게 발달한다. 그리고 가정4년(1525년)부터 명나라의 선과사(宣課司)는 정식으로 세금을 백은(白銀)으로 거둔다. 이 조치의 결과로 백은은 정식으로 법정화폐가 되었고, 이는 경제적인 의미가 아주 컸다.

 

그리고 이 시기에 가장 풍성한 것은 문화적인 성취였다. <삼국연의와 <수호전>이라는 두 명저가 간행출판되었고, <서유기>와 <금병매>오 이 시기에 세상에 나온다. 양명심학(陽明心學)이 널리 전파되고, 유파가 많이 나타난다. 그외에 희곡, 회화 그리고 과학방면에서도 거장들이 나타난다. 이개선(李開先), 이시진(李時珍), 서문장(徐文長)등 일련의 빛나는 이름들이 이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의 태평성대를 증명한다.

 

이상의 성취를 종합하면, 심기가 깊었던 주후총이 그의 원숙한 정치적 수완으로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강하며, 문화는 번영한 대명제국을 만든 것이다. 제왕의 업적으로는 상당히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후총의 집권후반기부터 이렇게 한때 번성했던 대명제국은 돌연 급변과 동탕에 빠진다. 국가는 계속하여 쇠락하게 된다: 북방의 타타르(韃靼)가 돌연 침입하고, 동남의 왜구(倭寇)도 갈수록 창궐한다. 거기에 재정은 거의 붕괴되고, 지방에서 백성들의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나, 내우외환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다. 주후총이 사망할 때인 가정45년(1566년)에 이르러, 거의 엉망진창인 지경이 되어 있었다. 같은 해 직신(直臣) 해서(海瑞)가 올린 <치안소(治安疏)>에 따르면, 백성들은 일찌감치 집집마다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고, 가정제 주후총에 대하여 일찌감치 불만을 품게 되었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총명하게 머리를 굴려온 주후총이 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게 되었을까? 후세인들은 경험과 교훈을 종합하여 이렇게 공인된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일평생 총명했던 주후총이 굳이 한 간신배에게 눈이 멀어서, 그가 이십년간 권력을 휘두르도록 방임했고, 그 결과 좋았던 강산이 엉망진창으로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오늘날에는 악명이 자자한 간신(奸臣) 엄숭(嚴嵩)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무거운 정치적 책임을 엄숭이 부담하는 것이 맞을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 그의 인생부터 얘기해보기로 하자.

 

2. 간신도 원래는 정파(正派)였다.

 

악명을 떨친 간신이 되기 전의 초기에 엄숭은 역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재능이 뛰어난 준걸이면서, 강정불아(剛正不阿)하는 양신(良臣)으로.

 

엄숭은 강서(江西) 분의(分宜) 사람이다. 그는 선비집안 출신으로, 인물도 청수하고 준수하였으며, 행동거지도 명사의 풍모가 있었다. 25살이 되던 해 즉 홍치18년(1505년), 이갑제이명(二甲第二名)으로 진사가 된다. 즉 전국에서 5위를 한 것이다(一甲 1,2,3등을 장원, 방안, 탐화라고 부르고, 그후 2갑제1명, 2갑제2명의 순서이다). 순조롭게 서길사(庶吉士)로 뽑히고, 그후 한림학사(翰林學士)의 관직을 수여받는다. 엄숭을 합격시켜준 스승(과거의 주시험관과 합격자간은 스승-제자관계가 된다)은 나중에 정덕(正德)연간에 권력이 조야를 뒤흔든 명신(名臣) 양정화(楊廷和)이다. 그러니 앞길이 보장된 터였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다. 엄숭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의 시작은 멋졌으나, 타격은 청천벽력같았다. 정덕4년(1509년), 엄숭의 모친이 사망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엄숭의 반응은 아주 단순했다, 대성통곡을 한 것이다. 너무 슬퍼해서 큰 병을 얻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는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사직. 전도유망한 그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이런 지극한 효성에 대한 이야기는 금방 날개돛친듯이 퍼져나갔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모두 그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엄숭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가지고 있던 약간의 재산으로 고향에 집을 짓는다. 그리고 이름을 "검산당(鈐山堂)"이라고 짓는다. 그리고 처자식과 거기에서 생활한다. 하루종일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세속의 일체의 다툼과는 벽을 쌓은 청빈한 생활을 보낸다. 그렇게 8년을 지낸다. 옛날의 동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이 자는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엄숭은 스스로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 조정은 간신이 득세하고 있고, 나는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그들과 같은 편이 될 수는 없다."

 

엄숭을 높이 평가해왔던 양정화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정덕11년(1517년), 그 자신도 상중임에도 직접 엄숭에게 편지를 쓴다. 모친이 사망한 후 한때 관료의 길에 흥미를 잃었던 엄숭의 마음이 다시 한번 활기를 되찾는다. 결국 그는 스승이 권하는대로 다시 관직으로 돌아온다.

 

엄숭은 다시 예전의 일자리인 한림원으로 돌아간다. 직무도 바뀌지 않았다. 직급도 여전히 칠품(七品) 편수(編修)였다. 그러나 대우는 예전과 전혀 달랐다. 그는 연이여 여러 건의 아주 중요한 업무들을 맡는다: 내서당(內書堂)에서 환관들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동고관(同考官, 시험관)이 되어 회시(會試)를 주재하는 것등. 다음해에 양정화가 수보(首輔, 수석재상)로 돌아온 후, 엄숭을 더욱 중시한다. 정덕13년(1519년) 칠월, 그에게 중대한 임무가 하나 부여된다: 부사(副使)로서 광서(廣西) 계림(桂林)의 정강왕부(靖江王府)로 가서 작위를 승계하는 공무를 처리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좋은 업무를 맡았다가 엄숭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 엄숭이 강서를 지날 때, 마침 유명한 영왕반란(寧王叛亂)이 일어나, 현지는 온통 전쟁터로 바뀐다. 놀란 엄숭은 두 말 하지 않고 바로 도망친다. 북경으로 돌아와서 보고한 것도 아니고, 그냥 고향집으로 가서 숨어버린 것이다. 2년후에 명무종(明武宗)이 병사하고, 새로운 황제 가정제 주후총이 즉위한 후에 비로소 용기를 내서 북경으로 가 업무보고를 한다.

 

이상은 42살이전까지의 엄숭의 개략적인 이력이다. 전체적으로 봐서, 업무도 착실하게 하고, 학문도 뛰어나고, 품행도 방정한 좋은 관료였다. 후세의 여러 사학자들도 여기까지 살펴보고는 탄식을 금치 못한다; 어찌하여 이렇게 좋았던 사람이 나중에 그런 모습으로 변해버렸단 말인가?

 

그러나, 바로 이 이력중에도 엄숭의 범상치않은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정치적 후각이 예민하다는 것이다. 특히 은거한 8년동안 그는 가만히 놀고만 있지 않았다. 자주 조정의 중신들과 서신왕래를 했고, 조정의 변화를 확연히 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야심을 가지면 절대로 지중물(池中物)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이처럼 빛나는 행적 중에도 엄숭 성격의 문제점도 드러난다: 빠르게 도망친다. 간신이 권력을 쥐자 숨어버리고, 강서반란이 일어나자 도망쳐버린다. 그가 나중에 가장 욕을 먹는 부분도 바로 이 점이다.

 

3. 아부실력이 뛰어났다.

 

가정제 주후총이 등극한 후, 북경으로 돌아온 엄숭은 처지가 한때 아주 참담했다. 남경 한림원 시독(侍讀)을 맡는다. 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쫓겨났으니, 앞으로 승진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화가 복이 될 때도 있다. 엄숭이 남경 한림원으로 들어가자마자 명나라조정에서는 한바탕 대지진이 일어난다: "대예의지쟁(大禮議之爭)." 엄숭의 은사인 양정화도 결국 패배하여 관직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히려 남경한림원에 박혀 있는 엄숭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서, 무사히 태풍을 피해갈 수 있었다. 새로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된 계악(桂萼)은 엄숭과는 같은 고향사람으로 가까운 친구엿다. 가정4년(1525년), 계악의 도움으로, 4년간 한직에 머물러 있던 엄숭은 다시 요직으로 돌아오게 된다: 경성(京城) 국자감(國子監) 제주(祭酒).

 

가정초기 국자감제주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국자감의 일상적인 교육업무를 수행하는 외에 '경연일강(經筵日講)'에 참가해야 했다. 뜻이 원대한 문신에게 있어서 경연일강에 참가하는 것은 행운이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이렇게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엄숭은 잘 잡았다. 그의 학문은 뛰어났고, 말재주도 아주 좋았다. 매번 강관을 맡을 때마다 멋지게 소화했다. 구토연화(口吐蓮花)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주후총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후 엄숭의 관직은 직속상승한다. 몇년에 한번씩 승진한다. 먼저 예부시랑(禮部侍郞), 다시 남경으로 가서 예부상서(禮部尙書), 다시 5년후 경성으로 와서 예부상서, 10년동안 그는 조정의 예부업무를 장악한 정2품대신이 되어, 권력이 상당하게 된다.

 

이렇게 총애를 받게 된 것은 업무에 적극적이고, 일상행동을 잘 했던 것을 제외하고, 또 한가지 재주가 점점 수면위로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부.

 

주후총은 명나라 역대황제들 중에서, 모시기 극히 힘든 인물이었다. 성격이 강퍅자용(剛愎自用)하여 주변의 관리들에 대하여 아주 엄하게 살펴보았다. 대신으로서 권력중심에 접근하면 할수록, 생존환경은 더욱 험악해지는 것이다.

 

다만 엄숭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금방 물만난 고기처럼 잘나간다. 비교적 유명한 사례로는 가정7년(1528년) 그가 예부시랑으로 부임한 후에 벌인 한 가지 일이다: 당시 엄숭이 부사(副使)가 되어 주후총의 고향인 안륙(安陸)으로 가서 제사등 업무를 처리하는데, 돌아온 후에 엄숭은 2가지 상소문을 준비한다: 하나는 묘필생화(妙筆生花)하도록 가고 오는 도중에 보았던 각종 '상서(祥瑞)'를 묘사하여 주후총을 즐겁게 해주었다. 이어서 내놓은 또 하나에는 사실대로 하남지역의 재난상황을 적어서 세금을 감면해줄 것을 요청한다. 주후총은 기분이 좋았을 때이므로 그 자리에서 붓을 들어 써준다: 허가한다.

 

아부를 하면서도 해야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유사한 일이 이때의 엄숭에게는 여러번 있었다. 그래서 비록 아부를 하기는 했지만, 그의 명성은 여전히 좋았다.

 

그러나 여러 명나라때 사람들이 남긴 글을 보면, 엄숭의 변질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같다: 그는 계속하여 승진하는 관직과 더불어, 그의 생활수준도 직선으로 상승했다. 집안에서 날이갈수록 사치스러워졌다. 그리고 사치수준이 그의 봉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수준이었다. <세묘식여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일찌기 국자감제주를 맡았을 때, 엄숭은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중에 예부의 요직을 맡고나서는 규모가 갈수록 커졌다. 번왕에게 작위를 세습하도록 할 때면 모두 그에게 돈을 보내야 했다. 나중에는 번왕에게 내리는 상사에서도 그는 일부를 떼어서 자신의 몫으로 챙겼다. 경제문제가 갈수록 엄중해졌다.

 

진정 엄숭의 명성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은 가정17년(1538년) 구월의 사건이다: 주후총은 자신의 부친에게 묘호(廟號)를 추존하고자 한다. 그리고 신주(神主)를 태묘(太廟)에 넣어 모시고자 한다. 이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이 극력 반대한다. 예부상서인 엄숭으로서도 조심스럽게 하지 않은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주후총은 진노한다. 즉시 엄숭을 직접 거명하면서 질책한다. 그러자 엄숭은 겁이 덜컥 났고, 그 자리에서 태도를 180도 바꾸어 주후총을 전력으로 지지하기 시작한다. 이어서 엄숭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마침내 주후총은 뜻을 이룰 수 있었고, 부친에게 존호를 올리고, 순조롭게 태묘에 넣을 수 있었다. 18년간에 걸친 '대예의지쟁'은 이렇게 끝이 난다. 확실하게 말해서, 엄숭이 마침표를 찍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끝내자, 엄숭의 관직은 다시 올라간다. 태자태보(太子太保)에 봉해져서 종1품대신이 된다. 그리고 당시 주후총이 자주 불러서 직접 대면하는 대신중 한명이 되어 이미 심복근신이 되었던 것이다.

 

4. 고오(孤傲)한 수보 하언(夏言)

 

이 때의 엄숭은 이미 정치적 야망이 갈수록 커졌다. 그의 다음 목표는 권력중추인 내각에 들어가 만인지상의 내각중신이 되는 것이 된다.

 

내각은 대명왕조의 핵심권력중추였다. 가정연간는 그러나 화약통과 같아서, 불만 붙이면 큰 일이 터지곤 했으며, 매일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각은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그 안에서 버티기는 더욱 힘들었다.

 

주후총이 등극한 후, 내각의 요원들은 거의 매일 싸웠고, 멈추는 때가 없었다. 처음에 수보를 맡은 사람은 호인인 비굉(費宏)이었다. 나중에 그의 뒤를 이어 수보가 된 사람은 이시(李時)였다. 이들 두 호인은 기본적으로 실권이 없었다. 실권이 있는 몇 사람은 서로 싸웠다. 처음에는 장총(張璁)이 양일청(楊一淸)을 쫓아냈고, 그후 몇년의 악투를 거쳐 장총도 쫓겨난다. 내각의 실권자는 하언으로 바뀐다.

 

가정연간 초기에, 하언은 유명한 인물이었다. 업무처리에 있어서나 정치투쟁에 있어서나 모두 정력이 왕성했다.

 

실제업무능력은 더더욱 뛰어났다. 초기에 그의 최대의 업적은 바로 황장폐정(皇莊弊政)을 정리한 것이다. 쓸모없는 인원을 줄이고, 귀족들이 빼앗아간 토지를 대량 찾아냈는데, 일처리가 극히 깔끔했다.

 

특히 엄숭과 달랐던 점이라면, 하언은 경제문제가 아주 깨끗했고, 일처리에 있어서 철면무사(鐵面無私)했다. 가난하기 그지없었고, 동료들에게도 모두 미움을 샀다.

 

이처럼 일을 잘하면서 청백한 대신이니 주후총도 더 없이 신용했다. 그리고 엄숭이 승진하는데 있어서 하언이 잘나간 것도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언과 같은 고향사람이다. 오랫동안 관계가 아주 좋았다. 옛날 엄숭이 남경 예부상서에서 경성으로 올라왔을 때, 바로 하언이 천거해준 것이었다. 나중에 하언이 내각에 들어가고, 다시 엄숭을 자신이 맡았던 예부상서 자리에 추천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엄숭은 하언의 바로 뒤를 따라서 그의 덕으로 승진을 거듭했다고.

 

관계가 친밀한지 오래되다보니, 하언은 엄숭을 외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특히 유명한 사건은 엄숭이 한번은 주연을 베풀었는데, 하언에게 참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하필 하언이 그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엄숭은 어쩔 수 없이 직접 모시러 갔는데, 하언은 그를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체면이 상할대로 상한 엄숭은 집으로 돌아와서 손님들 앞에서 놀라운 행동을 보인다: 하언을 위하여 준비해둔 좌석을 향해 공손하게 절을 하는 것이다. 마치 신하가 주군에게 절을 하듯이. 비슷하게 냉대를 당한 경우가 여러 해동안 적지 않았다.

 

내각을 장악한 후, 하언의 개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가정17년(1538년)이후, 하언은 내각수보가 되면서 허리가 더욱 꼿꼿해진다. 관료로서 사람으로서 그는 더욱 전횡(專橫)하게 된다. 3년동안 여러번 주후총의 진노를 하고, 2번이나 파면된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매번 파면된 후, 하언이 집에서 얼마 지내지 않아 바로 원직에 복귀했다. 원인을 따져보자면, 그의 업무능력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었고, 업무외에 또 하나가 있는데 주후총의 최대종교신앙이 도교인데, 하언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언은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도교의 제사때 쓰는 전용의 "청사(靑詞)"를 아주 잘 썼다. 그런 문체로 글을 쓰는 것은 학문이 뛰어나야 했다. 문장이 공정하고 문자는 화려해야 하는데, 통상적으로 팔고문, 변려체문장에 익숙한 조정신하들로서는 대다수가 그런 글을 쓸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하언은 그런 글을 쓸 줄 알았을 뿐아니라, 아주 잘 썼다. 매번 주후총이 도교행사를 할 때마다 하언이 써준 청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화는 나더라도 어떤 때는 참아야 했다.

 

바로 이런 원인으로 하언은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나 없이는 황제도 잘 지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언의 이런 판단은 계속 하언에게 억눌려온 엄숭에게는 승리의 서광을 보게 해주었다.

 

오랫동안 하언이 보아온 엄숭은 그저 자신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가노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도 엄숭의 눈에서 지위가 점점 바뀌고 있었다는 것을: 더 이상 관료사회의 뒤를 받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앞으로 나가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라는 것을. 내각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하언부터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엄숭의 신분과 지위로는 지위도 높고 권력도 큰 하언과 싸우기에는 난이도가 컸다. 다만 하나의 간단하고 거친 방식으로 그는 가정21년(1542) 오월, 신기하게도 하언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날 처음에는 아무런 특별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주후총은 단독으로 엄숭을 접견하며, 조정문제를 협의한다. 업무보고를 마친 후, 엄숭은 기회를 노려 돌연 급습한다. 그는 그 자리에 '풀썩' 엎드리면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언을 고발한다. 처음에 주후총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그저 연극을 보는 기분으로 차가운 눈으로 엄숭의 연기를 구경했다. 그러나 엄숭의 한 마디를 듣자 그때까지 관중이었던 주후총이 즉시 안색이 변하며 엄숭의 말에 빠져든다.

 

"하언은 지금까지 황상을 무시해 왔습니다. 황상이 직접 하사한 물건도 그는 가볍게 버려버렸으니, 실로 그 죄가 극악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의 연유는 이러했다. 주후총은 도교를 좋아하여, 특별히 오정침향목(五頂沉香木)으로 황관(黃冠)을 제작하여 가장 가까운 몇몇 대신들에게 하사했다. 그중에는 하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은총일 뿐아니라, 조정에 나올 때 반드시 쓰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언은 그렇게 하면 체면이 상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쓰지 않았을 뿐아니라, 주후총에게도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당시 주후총은 체면이 상했다고 생각하여 화를 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언에게 일은 시켜야겠기 때문에 그냥 참고 지나갔었다.

 

이번에 엄숭이 그 옛날 일을 꺼내자 다시 가슴 속에서 화가 치솟았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비교해보기 시작한다: 눈앞의 이 엄숭도 업무능력이 뛰어날 뿐아니라, 말도 잘듣는다. 그런 점에서 하언보다 훨씬 낫다. 내각이 설마 너 하언이 없으면 안돌아간단 말이냐. 즉시 꺼져라!

 

이렇게 하여 여러 해동안 은인자중한 후에 엄숭은 교묘하게 주후총의 마음을 파고 들어, 시기를 잘 택해서 암창(暗槍)을 찔러 일거에 하언은 무너뜨리게 된다: 주후총은 조서를 내려, 하언의 오대죄상을 열거하면서 하언을 파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다. 63세의 엄숭은 관직이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에 오르면서 정식으로 내각의 일원이 된다. 비록 경력으로 따지자면, 엄숭은 내각 내에서 말단이었다. 그러나 몇몇 내각대신중에서 오직 그만이 전주권(專奏權)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대권을 그 혼자서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엄숭은 마침내 문관으로서 권력의 최고봉에 오른 것이다. 당연히 아직 전성기는 아니다. 비록 하언이 떠나기는 했지만 권력중심에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언제든지 권토중래할 수 있었다.

 

5. 부인지인(婦人之仁)으로 큰 실수를 저지르다.

 

내각에 들어간 엄숭은 업무에도 적극적이었다. 업무는 아침에 지시를 받으면 저녁에 보고했다. 특히 매일 새벽 일찍 주후총이 거처하는 서원(西苑)으로 가서 지시를 기다렸는데, 태도가 아주 근면했다.

 

그러나 실제업무효과는 하언과 비교하자면 전혀 다른 수준이었다: 행정수준이 한단계 차이가 날 뿐아니라, 최대의 문제는 부패가 만연한다는 것이었다.

 

엄숭의 부패변질은 하루이틀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나중에 명나라의 몇몇 문인들이 쓴 바에 의하면, 국자감제주로 있을 때부터 검은 돈을 자주 받았다. 하언을 내각에서 밀어내자마자 어떤 어사가 그의 부정부패를 고발하여 그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주후총이 그의 편을 들어주며, 직접 "충근민달(忠勤敏達)"이라는 네 글자를 그에서 써서 보낸다. 주후총이 이렇게 엄숭을 좋아했던 것은 첫째, 여러 해동안 엄숭은 그의 앞에서 성격이 온순하고 모든 일에서 자신의 말을 잘 들었다. 집안에서 기르는 고양이보다도 말을 잘 들었다. 둘째는 하언이 떠난 후, 청사를 누군가 써야 하는데, 엄숭은 문장수준이 하언보다는 떨어졌지만, 그래도 태도가 훨씬좋았고, 글을 쓰는 열정도 뛰어났다. 그래서 특별히 의지하게 된다.

 

황제가 신뢰하자 엄숭은 더더욱 겁날 것이 없었다. 내각내에서도 대권을 독단하고, 심지어 노련하고 인심좋은 적란(翟鑾)까지도 그가 쫓아내버린다. 가정23년(1544), 아들 엄세번(嚴世藩)이 상보사(尙寶司) 소경(少卿)이 된다. 상보사는 황제의 옥새, 인장을 관리하는 관직인데, 부자가 손을 잡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이때 엄숭에게 가장 큰 기회는 바로 주후총이 초기의 근면하게 일하는 것을 버리고, 가정21년(1542)부터 기본적으로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루종일 구중궁궐안에서 수도와 연단에 몰두했다. 그러다보니 국가대사는 거의 내각구성원들이 단독으로 보고하고, 결재를 기다렸다.

 

황제가 손을 놓자, 엄숭은 더욱 마음껏 이익을 챙겼다. 엄숭부자는 고양이보다도 탐욕스러웠다. 뇌물을 챙길 뿐아니라, 지방관리들과도 결탁하여, 국가의 염세, 농업세까지도 중간에서 떼어먹었다. 경제문제가 갈수록 엄중해진다.

 

엄숭의 이러한 짓거리로 인하여, 가정초기 강력한 단속으로 한때 깨끗했던 명나라의 관료사회가 다시 신속히 부패하기 시작했다. 관료사회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본받아, 뇌물을 챙기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리고 이 몇년간 국정운영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북발의 타타르가 침략해오는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군사비용지출이 급증했다. 그외에 주후총은 도교에 빠져서 매일 돈을 써댔으니, 재정문제는 날로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정초기에 모아두었던 돈과 양식은 기본적으로 다 써버렸다. 매년의 재정수입은 지출을 감당하지 못했고, 날이갈수록 그 현상은 심해져 갔다.

 

주후총은 비록 일년내내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조정국면의 변화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갈수록 일잘하던 하언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가정24년(1545) 십이월, 3년간 놀고 있던 하언이 다시 기용되어 내각수보로 돌아온다.

 

그러자 엄숭은 비참해졌다. 3년여동안 잘 지냈는데, 잠시 부주의한 틈을 타서 옛 적수가 돌아온 것이다. 비록 자신도 소사(少師)의 직을 추가로 받았지만 대권은 완전히 손에서 떠나게 되었고, 이제는 오히려 하언의 조치를 기다려야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내각수보로 돌아온 하언은 비록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지만, 업무를 넘겨받은 후에는 화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요 몇년간 조정이 어찌 이 지경으로 되었단 말인가.

 

하언은 업무를 실질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이번에 부임하고나서 즉시 정리정돈을 시작한다. 중앙관료에 대한 평가를 통해 불합격한 자들은 면직시킨다. 그렇게 정리정돈하고나니 많은 관리들이 관직을 잃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엄숭과 가까운 자들이었다.

 

이렇게 격렬한 폭풍이 불어왔지만, 엄숭은 침묵을 유지한다. 아무런 방법이 없어서 침묵한 것이다. 하언이 돌아온 후, 전주표의(專奏票擬)의 권한은 하언이 꽉 틀어쥐고 있었다. 자신은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고, 완전히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그러나, 엄숭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은 하언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황제가 자신의 업무성취에 불만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다시 예전처럼 열심히 일했다. 비록 조정에서 밀려나 있었지만, 청사는 열심히 써서 주후총의 도교활동은 도와준다.그리고 적극적으로 주후총 주변의 환관들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자신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므로 비록 하언이 맹렬하게 조치를 취하고, 엄숭은 권한이 없었지만, 그래도 관직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각은 이런 국면이 형성된다: 하언이 큰 칼을 휘두르며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때, 엄숭은 황제를 세심하게 모셨다. 그들간의 업무배분이 명확했고, 관계도 괜찮았다.

 

그러나 이런 조화를 엄숭은 견딜 수 없었다. 지난 번처럼 그는 그저 현실을 꾹 참으면서, 상대방이 잘못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하언이 잘못을 범하기도 전에, 엄숭 자신이 먼저 큰 잘못을 범하게 되었고, 그것이 발각된다. 

 

투지가 왕성한 하언은 갈수록 힘을 냈다.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관료사회를 바로잡는 일이다. 일을 크게 벌여서, 중앙을 정리정돈한 후에, 지방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세수부문을. 하나한 장부를 대조하면서 여러 부패분자를 처벌했고, 많은 공금을 회수했다. 그리고 배후를 따라올라가다보니 엄숭에까지 이른다. 엄숭의 아들 엄세번은 상보사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뇌물을 받았고, 부패문제가 심각했다. 관련된 자료를 하언이 모두 가지고 있었다. 곧 처벌이 내려질 터였다.

 

이 일은 심각했다. 비록 이전에도 엄숭이 부정부패했고, 주후총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과 비교한다면 그것 어린아이 장난이다. 그리고 국사가 어려우니 부정부패의 전형부터 붙잡아야 했다. 하언이 고집한다면 엄숭부자는 처벌을 받는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엄숭은 자신의 특기를 발휘한다: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다. 아들을 끌고 후다닥 하언의 집으로 달려간다. 먼저 돈으로 하언 집안의 하인들을 매수한 후, 하언의 침실로 들어간다. 하언이 마침 오수를 즐기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아들의 손을 잡고 꿇어앉아 대성통곡을 한다. 아마도 하언은 그들의 울음에 마음이 약해진 것인지, 아니면 예전이 그가 자신을 고양이처럼 모시던 것이 생각나서인지, 어쨌든 옛날의 정을 생각하여 이 일에 대하여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기로하고, 엄숭을 한번 봐준다.

 

그러나 하언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고양이처럼 온순해 보이는 엄숭이 기실은 호랑이였다는 것을. 기회만 잡으면 바로 자신을 물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수보로 되돌아온 후 하언은 자신의 뜻을 펼친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롭게 했다. 그러나 관료사회의 적폐는 하루이틀에 쌓인 것이 아니다보니 그가 범위를 넓히면 넓힐수록 적이 더 많아지게 된다. 그외에 하언의 일처리방식이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오만하고 독단적이었다. 무서울게 없다는 식이었다. 부정부패를 정리정돈하는데 전혀 봐주지 않을 뿐아니라, 주후총으이 근신들 앞에서도 폼을 잡았다. 엄숭은 죽어라 주후총의 환관들에게 잘보이려고 애쓰는데, 하언은 오히려 주후총의 환관들에게 밉보인 것이다. 매번 환관들이 와서 일할 때면 그들을 마치 가노를 대하듯이 했다. 가정제때 환관은 비록 권력이 없었지만, 그래도 좋지 않은 말을 할 기회는 많이 있었다. 하언에게 여러번 무시를 당하다보니, 기회를 잡아 주후총의 앞에서 그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오래 되다보니 주후총도 자연히 엄숭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변화를 엄숭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교묘하게 부추겼다. 하언이 스스로 문제를 노출시키면 목숨을 걸고 엎드려 고해서 이 적수를 철저히 분쇄하겠다고 기회만 기다렸다.

 

그러나 이렇게 날로 다가오는 위기를 득의양양한 하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반대로 그는 경천동지의 대업을 완성시킬 준비를 했다: 하투(河套)를 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