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연문사(浩然文史)
명나라때의 대문인(大文人)을 얘기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해진(解縉), 당백호(唐伯虎)를 알고 있고; 능문능무(能文能武)의 인물을 말하면, 왕양명(王陽明)을 얘기한다. 그들의 경력은 모두 전설적이다. 다만 이들보다 더욱 전설적인 인물이 있으니 바로 가정(嘉靖), 융경(隆慶), 만력(萬歷)연간에 활약한 서위(徐渭)이다. 서위는 일생동안 8번 과거에 실패했으며, 그후 호종헌(胡宗憲)이 지휘하는 동남항왜전쟁(東南抗倭戰爭)에 참가한다. 서위의 책략하에 명나라는 대해도(大海盜) 서해(徐海), 왕직(汪直)을 체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종헌의 죽음으로, 서위는 의기소침해져서 9번이나 자살을 시도하지만 죽지 않았다. 결국 빈곤하게 여생을 살아갔으며 죽을 때는 곁에 개 한마리만 그를 지켰다. 서위의 일생은 성공한 것일까, 실패한 것일까?
1. 조년비고(早年悲苦), 팔차부중(八次不中)
서위는 자가 문장(文長)이다. 1521년 절강(浙江) 소흥(紹興)의 한 관료집안에서 태어난다. 서위는 첩의 소생이고, 어려서 부친을 잃었다. 생모는 적모(嫡母)에 의해 집에서 쫓겨난다. 서위는 어려서부터 적모의 슬하에서 자란다. 14살때, 적모가 사망하고, 적모소생의 형인 서회(徐淮)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위는 어려서부터 인생의 쓴맛을 보면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위는 운좋게도 총명한 머리를 가졌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한번 본 것은 잊지 않았고, 6살때 <대학(大學)>을 읽었다. "책을 한번에 수백자씩 읽고는 다시 보지 않고, 일어서서 선생에게 암송해 들려주었다." 9살때는 글을 쓸 줄 알았고, 16살때는 한나라때 양웅(揚雄)의 사회를 비판하는 대작 <해조(解嘲)>를 본떠서 <석훼(釋毁)>를 짓는다. 그래서 현지 사람들은 모두 서위를 신동이라고 불렀다.
비록 신동이지만, 관리가 되려면 과거를 통과해야 한다. 1540년, 20살의 서위는 가볍게 수재(秀才)가 된다. 다음 해, 생계를 위하여, 그는 부잣집인 판(潘)씨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마침 장인 반씨가 광동(廣東) 양강현(陽江縣)의 주부(主簿)로 가게 되었다. 주부는 현에서 서열3위의 관직이다. 반씨가 부임한 후, 현의 업무를 모조리 서위에게 처리하도록 위임했고, 서위는 이를 통해 업무처리능력을 키운다. 얼마 후 서위는 절강으로 돌아간다. 1545년, 서위의 처가 병사한다. 2살짜리 아들만 남겨두고서. 처가 죽었기 때문에 서위와 반씨집안은 더 이상 관계가 없게 된다. 1546년, 서위의 형인 서회가 단약을 먹고 죽는다. 지주인 모씨(毛氏)는 그것을 기화로 서씨집안의 재산을 모조리 차지한다. 그렇게 되자 서위는 생계를 철저히 잃게 된다. 1547년, 서위는 "일지당(一枝堂)"이라는 사숙(私塾, 서당)을 열어 생계를 꾸린다.
생활이 힘들어지자 과거시험을 치는 것도 쉽지 않아진다. 비록 서위는 재능이 뛰어나서, "월중십자(越中十子)"로 칭해지며 그중 가장 재능있는 문인으로 일컬어졌지만. 그리고 1540년부터 1561년까지 서위는 8번 향시(鄕試)에 참가하는데 모두 낙방한다. 서위의 과거로의 길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2. 입주막부(入主幕府), 동남항왜(東南抗倭)
서위는 과거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데 당연히 관료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위는 재능과 학문을 썩히고 있었다. 마침 가정 중기 남왜북로(南倭北虜)의 침입이 심해진다. 1550년에는 몽골 엄답칸(俺答汗)이 북경을 포위하는 "경술지변(庚戌之變)"이 일어난다. 1553년에는 동남에서 왜구가 연해를 대규모로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1554년, 가정제는 호종헌을 절강순무(浙江巡撫)로 임명하여 왜구를 토벌하도록 한다. 1556년에는 호종헌이 절직총독(浙直總督)으로 승진하여, 남직예(南直隸, 남경), 절강의 군무(軍務)를 책임지고, 동남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업무를 총괄한다.
호종헌이 절강으로 온 후, 막부를 개설한다. 그리고 동남의 선비들을 널리 불러모아 지낭단(智囊團)을 꾸린다. 1558년, 호종헌은 삼고초려를 통해 동남제일재자(東南第一才子) 서위를 초빙하여 수원(隨員, 비서와 유사함)으로 삼는다. 두 사람은 지기(知己)가 된다. 호종헌은 동남에서 오래 있었지만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해, 조정에서 탄핵을 당했다. 관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마침 이때 호종헌은 두 마리의 백록(白鹿)을 잡는다. 백록은 도가에서 영물로 여기는 동물이고, 특히 온몸이 새하얀 사슴은 더욱 보기 드물다. 이는 얻기 힘든 상서(祥瑞)이다. 그래서 호종헌은 서위를 시켜 황제에게 올리는 하표(賀表)를 쓰게 한다. 서위가 쓴 <진백록표(進白鹿表)>를 가정제에 올린다. 가정제는 원래 도교를 숭상했는데, 백록과 뛰어는 표문을 보자 아주 기뻐한다. "황상은 문자를 신경써서 보면서 아름다운 문구에는 어필로 점을 찍고, 따로 신하를 시켜 책으로 묶게 한다" 백록과 하표를 통해, 호종헌은 총애를 잃을 위기를 벗어나고, 계속하여 총독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서위는 전략적인 안목이 있었다. "서위는 병법을 알았고, 기이한 계책을 좋아했다. 호종헌이 서해를 체포하고, 왕직을 유인한 것은 모두 그의 계책이었다." 서해는 동남해적집단중 왕직에 바로 다음가는 세력이었다. 1556년 3월, 서해는 진짜왜구, 가짜왜구 합계 5만명을 모아 절강을 공격한다. 4월, 숭덕(崇德) 삼리교(三里橋)에서 서해는 호종헌이 지휘하는 명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동향현성(桐鄕縣城)을 포위하여, 동남일대를 진동시킨다. 삼리교전투는 호종헌의 간담을 일시 서늘하게 만들고, 더 이상 강경하게 해적을 소탕하지 못하게 만든다. 바로 이때, 서위는 호종헌에게 '초항해도책(招降海盜策)"을 올린다. 서위는 태학생이며 서해와 같은 고향사람인 나용문(羅龍文)을 이용하여 서해와 연락한다. 호종헌은 많은 재물과 작위를 주겠다고 유인한다. 7월 서해는 투항한다. 서해의 투항으로 동향의 포위는 풀렸을 뿐아니라, 명군은 전투를 승리로 전환시킬 수 있게 된다. 그후 명군은 서해의 도움을 받아 가흥 사포(乍浦), 주산군도(舟山群島)에서 왜구의 소굴을 연이어 소탕한다. 다만 같은 해 연말, 엄숭(嚴嵩)의 의자(義子) 조문화(趙文華)의 압력으로 호종헌은 서해를 참살하게 된다.
왕직은 가정 왜환에서 가장 유명한 해적이다. 호종헌, 서위는 서해를 초무(招撫)하는 동시에, 왕직에 대한 초무작업도 진행한다. 1557년, 호종헌은 장주(蔣洲)를 보내 왕직 및 일본 큐슈(九州)의 다이묘(大名)와 합의를 달성한다. 왕직의 인신안전을 보장한다는 전제하에서, 왕직은 절강으로 되돌아오고, 일본인은 왜구를 금절하며, 왜구가 금년에 약탈한 사람과 재산을 돌려준다는 것이다. 대명은 호시를 열고, 일본과의 조공무역을 허용한다. 일시에, 동남연해는 평화가 도래했다. 그후 왕직은 약속대로 절강으로 돌아왔다. 다만 1558년 왕직은 항주에서 절강순무 왕본고(王本固)에게 체포되고, 다음해 왕본고에 의해 항주의 번화한 시장거리에서 참살당한다.
서해, 왕직이 전후로 투항한 후 피살되면서 동남왜구들은 대노한다. 이때부터 동남왜구는 더 이상 명나라의 초안(招安)을 믿지 않았다. 동남왜구는 더욱 심각해진다. 초무에 관해서 보자면, 서위가 호종헌에게 제의한 것은 정확했다. 동남왜구가 심각했던 원인중 하나는 바로 이귀자(二鬼子, 가짜 왜구, 즉 한인)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짜왜구는 열에 일곱, 여덟이고 진짜왜구는 열에 한, 둘이다" 다만 이들은 모두 매국노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해금으로 인하여 무역을 하지 못해 살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직은 죽기 전까지도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해금을 풀고 통상을 하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조문화, 왕본고등으로 인하여 동남의 국면은 더욱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3. 구차자살(九次自殺)
호종헌에게는 개인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는 엄숭의 당에 빌붙었고, 동남항왜때, 실패한 책임을 부하에게 떠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호종헌은 대국관이 있었고, 왜구를 평정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1562년, 엄숭이 타도되면서 엄숭일당의 관료들도 숙청당한다. 호종헌도 삭탈관직당한다. 그러나 문책을 받지는 않고, 바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호종헌의 막부도 이렇게 하여 해산된다. 서위도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565년 호종헌은 다시 탄핵을 당해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옥중에서 자살한다. 호종헌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어릴 때부터 남의 밑에서 자라면서 갖은 고초를 겪고 여러 해동안 과거에 실패한 아픔이 되살아나 서위는 돌연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이때부터 그의 정신은 정상이 아니게 된다. 서위는 아마도 정신병을 알았던 것같다. 어떤 때는 말짱하다가 어떤 때는 극단적이 되었다.
그후 서위는 모두 9번 자살시도를 한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한번은 서위가 쇠침을 귀에서 대뇌로 찌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적시에 발견되어 몇달동안 치료한 후 회복된다. 그리고 서위는 철추로 회음부를 내려쳤으나 역시 죽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남자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머리로 땅을 들이받거나, 머리로 벽을 들이받거나, 도끼로 머리를 내려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모두 9번 자살시도를 한다. 1566년, 서위는 정신병이 발작하여, 처를 내려쳐죽인다. 그리하여 체포된다. 그후 감옥에서 7년간 지낸다. 그동안 그는 글을 열싴히 읽는다.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는 한나라때의 서적인데, 초기도교서적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내용은 극도로 현학적이어서 일반문인은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서위는 책을 완전히 이해하고 주석을 썼다. 1573년, 서위는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이때 그는 혈혈단신이었다.
1577년, 서위는 북상하여 항왜때 알고 지내던 척계광(戚繼光)의 추천으로, 요동(遼東) 이성량(李成梁)의 막부에 들어가 이여송(李如松)에게 병법을 가르친다. 1년후 요동은 너무 추워서 서위는 다시 절강으로 돌아간다. 재산도 없고, 생계수단도 없던 그는 그저 그림을 그려 팔면서 지낸다. 서위는 스스로 이렇게 자조한다: "기간동도서왜옥(幾間東倒西歪屋), 일개남강북조인(一個南腔北調人)"(몇 칸의 이쪽은 무너지고 저쪽은 기운 집에서 사는 남쪽 사투리로 북쪽말을 하는 사람). 1593년, 서위는 사망한다. 그의 곁에는 오직 개 한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서위의 일생은 실패였을까? 서위의 경력을 살펴보면, 서위는 문무에 모두 능통하다. 그의 <묵포도도(墨葡萄圖)>는 현재 북경고궁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동남항왜에 참가하고, 이여송에게 병법을 가르켰다. 그는 동시대의 문인들과는 달랐다. 서위와 해진, 양신(楊愼)은 명나라때의 삼대재자(三大才子)로 일컬어진다. 이렇게 뛰어난 재자가 처참하게 죽어갔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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