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효파(吳曉波)
상업역사상 첫번째 중외대전(中外大戰)이 1884년에 발생한다. 중국측 주인공은 당시 최고부자인 호설암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파산이었다.
호설암은 생전에 이미 전설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좌종당(左宗棠)의 군수물자운송으로 돈을 모았다. 20년이라는 짧은 기간내에 일약 전국최고부자가 된다. 그리고 청나라 근 300년동안 유일하게 황마괘(黃馬褂)를 입은 상인이었다. 1882년, 호설암의 수중에는 1000만냥이상의 현금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양무(洋務)를 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생사(生絲)거래를 할 것인가를 놓고 잠시 망설이게 된다.
호설암은 양무가 낯설지는 않았다. 1868년 좌종당이 복건선정국(福建船政局)을 만들 때, 외국상인으로부터 기기, 군수물자를 구입하는 업무를 모두 그 혼자서 처리했었다 1882년 1월, 그는 은공인 좌종당에게 서신을 보내어, 자신이 돈을 내어 장강연안의 전보를 건설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당시 양무를 주관하던 사람은 이홍장(李鴻章)이었고, 그는 좌종당의 정치적 맞수였다. 이 점을 호설암은 걱정하였다.
두번째 방법은 생사거래였다. 명나라말기이래로, 강소절강일대는 전국방직업의 중심지였다. 1860년이후, 영국, 미국의 각국은 상해에 기계제사공장을 설립한다. 중국의 전통적인 수공제사는 생산효율과 품질에 있어서 기계제사와 경쟁할 수가 없었다. 서양상인은 중국의 염가노동력과 원료를 착취하기 위하여, 잠사수출시장을 독점하였고, 생사가격을 최대한 낮추도록 압박했다. 그리고 공장에서 생산된 원사가격은 최대한 올려서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흥성했던 강남의 방직업은 신속하게 몰락해갔다.
이 광경을 목도하고, 호설암은 상업기회가 왔다고 느꼈다. 제사산업은 날이 갈수록 흥성했다. 그리고 원료인 생사의 가격은 날이 갈수록 폭락했다. 이는 아주 비정상적인 현상이었다. 그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주요한 원인은 중국상인은 각자 싸우느라고, 서양상인들에게 가격결정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이외에 또 다른 자료를 보면, 지난 2년동안, 유럽의 농업이 가뭄의 영향을 받아, 생사의 생산량이 감소했다. 이를 바탕으로 판단하여 청나라 최고부자 호설암은 전투를 시작한다. 백년기업역사상 제1차 중외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1882년 5월, 그는 생사 8000포(包)를 대량으로 사들인다. 10월이 되어서는 1.4만포에 이른다. 청나라말기의 학자인 구양욱(歐陽昱)이 쓴 <<견문쇄록(見聞瑣錄)>>에는 이 상업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적고 있다: 그해에 새로운 생사가 나오자 마자, 호설암은 사람을 보내어 대량으로 구매했고,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 외국상인은 1근 1냥도 사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호설암에게 1천만냥의 이익을 덧붙여서 매입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호설암은 1천2백만냥이 아니면 안된다고 고집한다. 외국상인은 생사원료가 호설암 한 사람의 손에서 조종되면 나중에 거래를 함에 있어서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이익을 얻을 방법이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호설암으로부터 생사를 매입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다음 해에 생사가 새로 나올 때를 기다리려고 한다. 호설암은 생사업계의 상인들을 모아서, 공동으로 의논하여, 함께 생사를 모조리 매입하고, 외국상인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외국상인들이 고가로 매입해갈 수밖에 없도록 하기로 한다. 그 와중에 중국상인들이 이득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처음에 호설암의 전략은 효과가 있었다. 서방학자인 스탠리는 <<만청재정>>이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882년 9월, 상해의 1급생사가격은 이미 17실링 4펜스까지 올랐다. 런던거래소의 가격은 겨우 16실링3펜스였다. 국내가격이 국제가격을 추월해버린 것이다. 1883년 8월, 거대한 상업전투는 결전의 시기가 도래했다. 호설암은 여기에 모두 1500만냥을 투입했고, 계속하여 신규로 나오는 생사를 매점매석했다. 대부분의 상해 생사상인은 영업을 중단하고, 추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중국-서양의 쌍방은 이미 인내심이 극한에 도달했다. 곧 승부가 날 순간이었는데, 갑자기 큰 변란이 일어난다.
변수의 하나는 이탈리아에서 생사가 풍년을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유럽선물시장의 공급물량부족은 단숨에 해소되었고, 그 소식은 중국에까지 전해진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더욱 큰 변수는 중국과 프랑스가 베트남문제로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1883년 10월, 프랑스의 군함이 상해의 오송구로 들어와서 강남제조국을 공격하겠다고 말한다. 시장은 급변하고, 금융위기가 발발하며, 무역은 전면적으로 중단된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호설암으로서는 이를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11월, 강소절강의 생사상인의 가격동맹이 와해된다. 생사는 쉽게 썩는 것이므로 오래 보관할 수가 없었다. 호설암은 할 수 없이 처분하기 시작한다. 손실만 천만냥이 넘었다. 생사대결에서 실패한 것은 금방 '반석처럼 단단하던' 전장(錢莊) 사업에도 영향을 주었다. 겁나는 예금인출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먼저 항주의 본점이 문을 닫고, 이어서 북경, 복주, 진강 및 호북, 호남등지의 20여개 점포에까지 영향이 미친다. 12월 5일, 부강전장은 파산을 선언한다. 다음 해 9월, 좌종당이 복주에서 병사한다; 11월, 조정은 호설암을 삭탈관직하고 가산을 몰수한다; 그는 첩과 하인들을 내보내고, 성지가 내려오기 전에 아주 '적시'에 우울히 생을 마감한다.
"홍정상인(紅頂商人)"은 거칠고 장열한 방식으로 영국미국의 방직회사에 도전장을 내밀었었다. 이것은 전통상업역량이 기술과 산업모델의 모든 측면에서 열세에 처해지자 구석으로 몰려서 마지막으로 반격을 시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파산은 전통상인계층의 집단적인 몰락을 의미했다. "삼대상방(三大商幇)"중 두 갈래인 휘상(徽商)과 강절상인(江浙商人)은 이번 전투에서 손실이 참혹했고, 이후에 더 이상 힘을 회복하지 못한다. 명나라 말기에 싹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방직업은 철저히 붕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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