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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호설암)

호설암(胡雪巖): 그저 황음한 졸부였다

by 중은우시 2010. 12. 24.

 : 왕위(王偉)

 

 

 

호설암(1823-1885)의 이름은 광용(光鏞)이고 자가 설암이다. 안휘 적계(績溪)사람이며 호경여당(胡慶餘堂)의 창시자이다. 그는 빈한한 출신으로 장사에 재능이 있었고, 처세술에 능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일대의 거상으로 불리웠다. 서태후는 그에게 황마괘(黃馬)를 내리고 포정사함(布政司銜)”의 종2품 관직을 내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홍정상인(紅頂商人)’이라고 불리웠다 청나라 2백년의 역사를 다 훑어보아도, 장삿꾼으로서 관직에 오르고, 홍정자(紅頂子)를 달고 황마괘를 입은 사람은 호설암 한 사람뿐이다. 그는 청나라말기에 전설적인 인물이다.

 

호설암이 보유한 자산은 3000만백은에 이르렀고, 전답이 만무(1무는 200)에 이르렀다. 사업에 성공한 호설암은 졸부의 천박하고 황음한 근성을 드러낸다. 그는 생활에서 아주 사치했고, 곳곳에서 그의 뻐기는 행동을 드러냈다. <<청대칠백명인전.호광용전>>의 기록에 따르면, “호설암이 저택을 짓는데, 소나무 돌, , 나무를 온갖 진기한 것으로 다 모았다. 처첩이 많아서, 13동의 건물을 지어서 살게 했다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원림을 크게 지어서 여색을 탐했고, 생활이 호사스러워 왕후장상이상이었다.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음탕하였다.” 그가 지은 저택은 당시 강남제일호화저택으로 불리웠다.

 

호설암은 여색을 아주 밝혔다. 그는 자주 길거리에서 예쁜 여자를 찾았다. 자색이 뛰어난 여자를 만나면, 사람을 보내어 얘기해서, 몸값을 아무리 비싸게 요구해도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주 여자측의 집안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자리를 구해주었다. 그는 재산과 세력을 자랑했고, 그를 불쾌하게 했던 여자는 취한 후에 고의로 모욕을 주고서는 다시 버려서, 양갓집 규수들을 모욕했다. 그는 민간여자를 강제로 사기도 했는데, 3,5일 혹은 1,2달정도 같이 생활한 후에 신선감이 떨어지면 은 수백냥을 주고서, 다른 사람에게 재가하도록 했다. <<견문쇄록>>에 따르면, 그의 여자가 되었다가 버림받은 수만 수백명에 이른다고 했다.

 

<<남정필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하루는 호설암이 소박하게 옷을 입고 기녀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 기녀는 호설암이 궁상맞게 생긴 것을 보고는 별볼일 없다고 생각해서, 그를 접대해주지 않았다. 그저 나이가 든 노부인이 그를 잘 접대해주었다. 다음 날, 호설암은 사람을 시켜 노부인에게 금잎을 두 주머니 보낸다. 기녀는 그제서야 후회했다. 물주를 노부인에게 줘버렸던 것이다. 호설암은 다시 한번 그 곳을 방문한다.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엷게 미소를 띄우기만 한다. 이런 식으로 그 기녀가 눈이 있으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조롱한 것이다.

 

<<장해선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호설암이 한 재봉점을 지나가고 있는데, 문앞에 날씬한 여자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눈으로 그 여자를 계속 쫓았다. 그 여자는 그가 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호설암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어 7천원을 그 부친에게 주고는 그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싶다고 한다 여자의 부친은 돈에 욕심이 나서 승락하고 만다. 호설암은 길일을 택하여 여자를 첩으로 들인다. 신방에서 호설암은 술을 마시고, 신부는 나체로 침상에 누워있도록 했다. 그리고 종을 시켜서 촛불을 높이 들고 있도록 했다. 그는 그 신부 앞으로 걸어가서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며칠전에는 네가 나를 쳐다보지 못하게 했는데, 나는 그래도 보려고 했다. 이제는 제가 무슨 방법으로 나를 막겠느냐?” 말을 마치고는 문을 밀고 나가버렸다. 다른 첩의 방에서 밤을 새운다. 다음날 사람을 보내어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방안에 있는 물건은 마음대로 가져가도 좋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도 좋다. 그러나, 여기에는 네가 있을 곳이 없다

 

오옥요의 <<이십년목도지괴현상>>에는 호설암의 독특한 장사방법이 적혀 있다. 63회에 이런 내용이 쓰여 있다: “그의 경영수단을 실로 대단하다. 그래서 매년 발전하고 있다. 각 부두에는 모두 그의 상점이 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잘 휘어잡았다. 그가 부두 한 곳에 점포를 열면, 거기서 첩을 하나 들였다. 그리고 점포에서 일하는 지배인을 집으로 부르고 첩과도 서로 만나게 해주었다. 몇 달을 머무르다가 그는 그곳을 떠난다. 그후에 첩과 지배인이 서로 어울리도록 해주다. 그러면 그 지배인이 일을 하면서 열심히 하고, 가는 곳마다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다.”

 

<<호설암외전>>에는 그의 항주호화저택에 대하여 얘기한다. 돌도 담장을 쌓고, 구리를 넣어서 벽돌을 만들었다. 어떤 벽에는 도자기를 부수거나 도자기를 가루로 만들어서 천년이 지나도 멀쩡하도록 하였다. 원림도 기기묘묘하게 만들고, 누각은 영롱하며 나무와 꽃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엄청난 돈을 들였으며 호사스럽기 짝이 없었다. 당시의 <<신보>>에 따르면, 외국관리들이 항주로 가면 정부에서 정해준 호텔에 묵기보다 호설암저택에 거처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호설암의 처첩이 아주 많아서, “십이금채(十二金釵)”라고 불렀다. 저택안의 각 건물에 한 명씩 들어갔다. 저녁이 되면, 시녀는 각 처첩의 이름을 적은 상아패를 담은 은반을 가져온다. 호살암이 아무거나 뒤집으면, 거기에 이름이 적힌 처첩이 그날 저녁 그를 모시는 것이다. 마치 황상이 후궁을 고르는 것과 비슷했다. 호설암은 매일 아침 일찍 침대에서 일어나면, 종이 비취쟁반에 청황적백의 각각의 색깔의 보석을 약간씩 담아서 그에게 보여준다. 매일 집안의 사람들은 순서대로 그의 방으로 가서 문안인사를 한다. 창극을 하거나 도교행사를 하거나, 연회를 베풀거나 모두 호화스럽기 그지없었다. 호설암은 여러 처첩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는 첩들에게 ’ ‘’ ‘라고 적힌 붉은 색과 파란 색의 갑옷을 입게 하고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붉은 색과 파란 색을 대치시키고, 호설암과 부인이 죽간으로 지휘하여 살아있는 장기를 두었다. 호설암과 그의 처첩들은 주지육림에서 호화롭게 생활했고, 극도의 향락을 즐겼으며, 돈을 물쓰듯 썼다. 그의 사치생활은 황제보다 전혀 못하지 않았다.

 

호설암은 총명하고, 사업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잘 해나갔지만, 정치에서는 저능아였다. 정치적인 미성숙으로 인하여 관료사회의 숨은규칙을 파악하지 못하여, 결국은 이홍장이 좌종당을 배제하려면 먼저 호설암을 배제하여야 하고, 좌종당음 무너뜨리려면 먼저 호설암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전략의 제물이 된다. 결국 그는 좌종당과 이홍장의 정치투쟁에서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광서10(1884), 호설암은 상계와 강호를 종횡무진 활약했고, 관직도 얻어 정부에도 드나들었으며, 한때 권력을 움켜쥐고 나라에 비견할 부를 쌓았었지만, 그는 패가망신하고 만다. 모든 재산을 잃고 혈혈단신이 된다. 3000만냥은자에 이르던 가산은 모조리 사라졌다. ‘금방 건물이 세워지더니, 금방 건물이 무너진다는 말처럼 단기간내에 사업이 흥성하다가 훼멸하고 만다. 인간천당과 지옥을 꿈처럼 한번 오가고, 우울하고 처연하게 일생을 마친다. 향년 6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