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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호설암)

호설암(胡雪巖) : 항주사람인가? 휘주사람인가?

by 중은우시 2006. 11. 28.

작자: 왕진충(王振忠)

 

호설암의 관적(貫籍)에 대하여 학계내외의 논쟁은 아주 치열하다. 최근 이년동안 이 논쟁은 다시 일고 있다.

 

본인은 새로 발견한 청나라때 휘주문서 원고본 <<남선일기(南旋日記)>>를 근거로 <<문회보(文匯報)>>에 글을 발표하였었다. 호설암의 관적이 휘주(徽州) 적계(績溪)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원래 1차사료를 새로 발견하였으므로, 이 논쟁은 종식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어떤 사람은 <<남선일기>>의 진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일기의 작자는 아마도 청나라때 사람이 아니라 고건축에 대하여 완전히 알지 못하는 현대인일 것이라고. 설며 역사문헌을 누가 위조했단 말인가?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다. 학술문제라는 것은 아무지 작아보여도 태도는 반드시 진지해야 한다.

 

호설암이 도대체 "항주인(杭州人)"인가 아니면 "휘주인(徽州人)"인가의 싸움은 현적(現籍)과 조적(祖籍)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에서 기원한다.

 

홍정상인(紅頂商人) 호광용(胡光墉) 자(字) 설암(雪巖)은 청나라 동치, 광서시대의 사람이다. 호설암은 어른이 되어서 항주에서 활약했다. 그의 출생지가 어디인지에 대하여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그의 원적이 휘주 적계 호리(胡里, 지금의 湖里村)인데, 나중에 항주로 이사왔다는 것이다. 역사학자인 진욱록(陳旭麓), 방시명(方詩銘), 위건유(魏建猶) 선생등이 주편한 <<중국근대사사전>>에서는 "호광용(1823-1885년). 안휘 적계인"이라고 쓰고 있다. 이와 동시에 다른 하나의 견해는 호설암은 항주인이라는 것이다. 사실 논쟁에서 하나 얽혀 있는 것은 현적과 조적의 관계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일부 지방지, 문집과 주절(奏折)의 기재에 의하면 건륭시대의 대염상(大鹽商) 강춘(江春)에 대하여 양주 의정(儀征) 사람이라고 하므로 양주염상이다. 그러나, 강춘은 유명한 휘상(徽商)이라는 점은 학술계의 공인된 상식이다. 이것은 모두 휘주인들의 현적과 조적의 문제이다.

 

명청이래로, 휘주는 이민을 내보내는 사람이 많았던 지역이다. 휘상의 흥성과 휘주문화의 번성은 많은 휘주이민으로 하여금 고향에 대하여 비상한 자부심과 강열한 동질감을 느끼게 하였따. 이런 배경하에서 조적과 현적은 마찬가지로 휘주사람들에게 중시되었다. 민국시대의 사람인 허승요가 <<흡사한담>>에서 북경 흡현회관에 있는 글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어떤 진사의 현적이 어디인지를 명시한 것이 있다. 그런데, 이런 진사들도 조적은 하나도 예외없이 모두 휘주이다. 이 점에 관하여, 미국적 중국계학자인 하병예 교수는 그의 명저 <<명청사회사론>>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휘주부, 현방지의 편찬자는 대량의 일을 해서 관방에서 적을 휘주로 하여 공명을 얻는 자와 적을 다른 지방으로 하여 진사에 합격한 자를 구분하고 있다. 이것은 휘주가 이민이 매우 많았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방지는 이런 중유한 전문적인 구분을 해주지 않고 있다" 이로써 볼 때, 조적과 현적에 대한 관심은 명청 휘주의 1부6현에서 아주 현저한 특색이다. 일반적인 휘주사람으로 말하자면 조적과 현적은 모두 동등한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0여년전, 500자에 미치지 못하는 짧은 글 <<호설암 및 "관적">>을 썼다. 그중 명청 휘상의 조적과 현적의 문제를 언급했는데, 먼저 호설암의 관적논쟁을 언급했었다. 당시에 필자는 중국인의 '관적'을 언급하면서, 먼저 도대체 조적인지 아니면 현적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필자의 견해로는, 호설암이 항주 사람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휘주 사람이라고 하든지 둘 다 맞다. 관건은 말하는 사람이 어떤 각도에서 이해하느냐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조적과 현적의 구분이 있다면, 몇년이상(혹은 몇대이상)후까지 조적(祖籍)으로 보는 것이냐는 것이다. 몇년(몇대)후에는 조적이 아니게 되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중국사람의 조적은 모두 중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화하의 선조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겠느냐고.

 

이 문제는 정말 잘 지적했다. 사실, 조적이라는 것은 순수하게 몇년 또는 몇대로 계산할 것인지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관건은 당사자나 그 후예의 조적에 대한 인식과 고향의식이다. 소위 조적에 대한 인식은 그들이 스스로 그 지방에서 왔다고 강렬하게 느끼느냐의 점이다. 향토의식은 그들이 이사온 곳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사간 곳에서 동향 사람들끼리 밀접하게 내왕하는지, 그들이 일생상활에서 이사온 곳의 풍속습관을 유지하는지, 그리고, 사는 지역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들을 어떻게 보는지 등등이 관계된다.

 

안휘적계의 호씨(胡氏)는 서로 다른 네 갈래의 집안이 있다. 즉, 용천호씨(龍川胡氏), 금자호씨(金紫胡氏), 명경호씨(明經胡氏, 李氏에서 호씨로 고친 경우), 준의호씨(遵義胡氏)가 그들이다. 호설암의 집안은 적계 호리의 명경호씨에 속한다. 호리의 이 조적지에 관하여, 항주로 이사간 호설암은 명확하고 강렬한 동질감과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에 발생한 한 소송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호리의 인근 마을에는 주(周), 왕(王)의 두 성이 살고 있고, 이름이 중왕촌(中王村)이다. 마을가운데 묘가 있는데 중왕묘(中王廟)라고 불렀다. 묘 앞에는 호씨성의 조상묘가 있었고, 묘문에서 20여장 떨어져 있었다. 이로 인하여, 주, 왕 두 성씨와 호씨는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광서8년(1882년) 황씨성은 묘내에 아홉 상공등의 상을 다시 만들었다. 그런데, 호씨들은 "중왕"은 회씨성의 조상이 송나라때 받은 봉호(封號)라고 주장했고, 보통의 지명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이를 가지고 호씨의 재산권을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왕씨들은 "묘는 촌의 이름을 딴 것이고, 촌은 왕씨성이 있어서 딴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중왕촌이고, 중왕묘이다"라고 주장했다. 쌍방은 이 다툼을 계속했고, 이 소송은 근 10년을 끌었다. 호리의 사람들은 호설암의 위세를 이용하고, 상장호씨(上莊胡氏, 호적 선생의 숙부 호정조, 사숙 호개여 등의 사람들)과 연합하여, 왕씨들과 길고 긴 소송을 계속했다. 이 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호설암이 적계 호리와 강렬한 조적에 대한 동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왜 적계 중왕묘의 소송에서 앞장서서 소송을 제기했겠는가.

 

호설암 본인 외에, 그의 후예들도 강렬한 조적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2004년, 호설암의 증손인 호문영(胡文瑩)이 <<호설암의 관적에 관한 한가지 설명>>에 의하면, "나는 호문영이라고한다. 호설암의 적증손이다. 부친은 호위경이라고 하고, 모친은 장지선이라고 한다. 모두 안휘 적계인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호설암의 조적을 휘주 적계로 보는 방증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찌기 호설암의 사업이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호설암의 지원(芝園)을 찾은 휘주 사람들이 이미 그의 조적이 휘주 적계라는 것을 확인했다.

 

작년에 나는 안휘남부지방에서 휘주문서고본 <<남선일기>>를 구했다. 그안에는 호설임이 항주에서 집을 지었을 때의 일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것은 호설암의 조적이 휘주 적계라는 가장 강력한 1차사료이다. 이에 의거하여, 본인은 <<문회보>>에서 "호설암의 관적분쟁은 종식되어야 한다"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먼저 <<남선일기>>의 기재를 인용했다.

 

"(을해 10월) 초육일...장군은 호씨화원에 대하여 얘기했다. 식사를 마치고, 소오형은 나와 우옹, 거형, 기형을 데리고 시내로 들어가서 놀았다. 화원의 이름은 지원이었다. 주인의 이름은 광용이고 자는 설암이다. 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돌판이 넓고 깨끗한 것을 보았다. 우리 고향에서 보는 것이었다. 문에 이르자, 소오는 문을 두드려 하인을 불렀다. 호성 어르신이 안에 계신가. 하인은 집에 계신하고 하였다. 그리고 거주하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대청을 돌아들어가니, 호군이 나타났다. 적계인이다. 설암의 조카였다. 사람이 아주 소박하고 성실했다. 앉아서 잠시 얘기를나눈 다음에 지원을 구경하였다."

 

위의 기재에 의하면, 화원을 관리하는 호씨 성의 사람은 호설암의 조카이고, 적계사람이다. 이 점만으로도 호설암의 내력을알 수 있다. 작자가 지원으로 들어갔을 때 모양도 고향의 모양과 같다고 적었다. 여기서 말한 고향의 모습이라는 것은 명청이래 휘주성곽향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대석판 노면이다. 이런 특색은 지금도 휘주의 거리에 재현되어 있다. 원내의 건축은 조각이 많고 마치 서양사람의 것같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로써 백만냥을 들인 지원은 휘주품격과 서양식 요소를 섞은 강남원림건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을 발표한 후에, <<문회보>>는 항주역사박물관의 고념화 연구원의 글을 받는다. 그 글에서는 <<남선일기>>의 진실성, 밍 지원이 휘주식 건축이라는데 의문을 제기했다. 그래서 본인은 여기에 간략하게 보충 설명하기로 한다.

 

본인의 고증에서 <<남선일기>>가 언급하는 호씨성 어르신이 "적계인"이라는 것이 주장의 중점이다. 건축은 중점이 아니다. 호설암의 지원에 대하여 말하자면, 나는 한번도 휘주파의 건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호설암의 관적분쟁은 종식되어야 한다>>는 글에서 남선일기에서 청나라 사람의 기술에 따르면 호설암의 지원은 휘주식과 서양식이 결합된 강남원림건축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필자는 주로 역사지리와 명청이래 사회문화사를 연구해왔다. 1990년대이래로 혼자의 힘으로 휘주남부에서 수천책의 휘주문서초본, 고본을 수집했고, 그중에선 진귀한 역사문헌도 있었다. 휘주역사문헌에 대하여 본인의 집적된 지식으로 개략 최소한의 판단능력은 있다고 본다. 안휘남부에서 한장짜리 계약서는 위조품이 나온다.  그러나, 명청시대의 십수만자나 되는 문언역사문헌을 만들어 위조하였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다. 이것은 상식이다.

 

사실, 조적이 휘주이고, 현적이 항주라는 이런 학술결롱은 적계와 항주라는 역사가 유구한 도시의 명예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명청이래로 사람들의 이동이 잦고 문화가 서로 융합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명청사회문화사연구방면에서는 상식적인 일이다. 우리가 편협한 지방이익을 생각하는 마음을 버리는 흉금을 가진다면, 우리는 호설암의 관적분쟁을 해결함에 있어서 갖추어야 할 이성적인 태도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