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258 군공파(軍功派)가 황위후계자를 결정한다... 글: 자옥(子玉)황위계승다툼은 황자들간의 경쟁일 뿐아니라, 더더욱 그 배후세력간의 힘겨루기이다. 어떤 정도에서 말하자면, 군공파가 왕오아 황태자선정의 주요역량이 된다.기원전202년, 한(漢)나라를 건립한 후 유방은 안과 밖에서 새로운 전쟁을 벌인다: 대외적으로는 한신, 영포, 팽월등 이성제후왕(異姓諸侯王)을 제거하고, 대내적으로는 태자 유영(劉盈)을 폐위시킬 준비를 했다.이성제후왕은 황제가 권력을 집중하는데 중요한 방해자였으니, 반드시 없애야 했다. 황태자의 배후는 강대한 여씨외척(呂氏外戚)과 공신파(功臣派)가 있어서, 황권을 제약하고 있었다. 유방도 황태자를 폐립시킴으로써 여씨외척과 공신파의 권력을 희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목적은 모두 황권을 되찾는 것이다.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 2024. 11. 22. 승상(丞相)과 재상(宰相): 어떻게 다른가? 글: 두두역사미(兜兜歷史迷)고대에 명칭이 아주 비슷한 관직이 있다. 하나는 승상(丞相)이고 다른 하나는 재상(宰相)이다.사람들의 느낌으로 말하자면 이 두 개의 관직은 아주 유사하다. 이름이 비슷한 것뿐 아니라, 지위도 유사하고, 심지어 하는 일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승상과 재상은 하나의 직위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명칭인 것일까?기실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재상과 승상은 한 사람이 가질 수도 있다.중국의 상기(象棋, 우리나라의 장기)에 있는 말중에 "상(相)"이 있다. 여기의 "상(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승상과 재상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그들중 누가 권력이 더 큰가?오래전에 승상이라는 관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관직이 아.. 2024. 11. 21. 역사연구와 정치선전: 항전사기록의 병폐 (3) 글: 강극실(姜克實) 6. 사상(死傷), 섬멸(殲滅), 소멸(消滅)의 의미 군사사(軍事史) 연구에서 "사상(死傷)"은 전과를 형량하는 기준이다. 그러나, 사망, 부상을 섞어서 얘기하면, 쉽게 허위전공을 이용하는 정치적 용어가 된다. 특히 양국이 대립하는 전쟁이 진항하는 과정에서 서로간에 국민을 고무시키거나 기만하는 선전전이 벌어진다. 이런 문필의 싸움과정에서 숫자를 과장하는 동시에 "사상" "폐상(斃傷)", "섬멸" "소멸"도 자주 보이는 용어이다. 예를 들어, 공산당의 공식 항일전쟁전과선전을 보면, 일본군을 전사시킨 명확한 숫자가 나오지 않는다. 사용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사상" "폐상" "섬멸" "소멸" 혹은 "적인" "일위군"등 정의가 모호한 용어들이다. 목적은 아주 명확하다. 선전을 위해 전과를.. 2024. 10. 25. 역사연구와 정치선전: 항전사기록의 병폐 (2) 글: 강극실(姜克實)군신 기쿠치 고헤이(木口小平)동상(하마다시 호국신사). 1918년 심상소학교 1학년 수신교과서. 3. "군신(軍神)"과 "영웅(英雄)"정치선전이 전사기록(戰史記錄)면에서 나타나는 특징중 하나는 극단적인 영웅이미지를 창조하고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목적은 민족정신, 애국주의, 영웅사적교육을 통하여, 특정조직에 대한 충성, 헌신정신을 선전하고, 이를 통해 정권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쟁전의 일본은 국민으로 하여금 천황제국가의 침략전쟁에 헌신하도록 내몰기 위하여, 선전수법으로 대량의 군신(영웅)을 창조했다. 예를 들어, 청일전쟁때의 나팔수 기쿠지 고헤이(木口小平), 러일전쟁때 여순항구봉쇄전투의 히로세 다케오(廣瀨武夫) 중좌, 태평양전쟁때 진주민기습한 구군신(九.. 2024. 10. 25. 역사연구와 정치선전: 항전사기록의 병폐 (1) 글: 강극실(姜克實)중일전쟁후, 지금까지 이미 79년이 흘렀다. 오늘날의 소위 고령자층은 절대다수가 전쟁을 체험하지 않았다. 전쟁이라는 단어는 21세기의 현대인에게 있어서 이미 요원한 과거가 되어 버렸다. 만일 자연스럽게 놔두면, 동아시아각국의 민중들 사이에서 대립과 반목이 발생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간의 대립, 국민간의 반목은 전후 80년이 가까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왜 역사의 원한, 대립은 해소되지 않는 것일까?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역사인식의 대립에 관하여 필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역사교육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기록의 문제이다. 양자간에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즉 국가간의 정치적입장, 이해관.. 2024. 10. 25. "촉(蜀)": 중국역사상 사천(四川)이외의 지방에도 있었다. 글: 제사(諸史)현대한어에서 "촉(蜀)"은 일반적으로 주(周)나라때의 파촉국(巴蜀國), 유비의 촉한(蜀漢)정권, 사천(四川)의 별칭으로 쓰인다. 이 셋은 모두 현재의 사천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사료에 분명히 기록된 것을 보면, 사천이외에도 대량의 "촉지(蜀地)"가 있었가. 그리고 상(商)나라때도 촉국(蜀國)이 있었다.예를 들어, 에는 "신황벌촉(新荒伐蜀)"이 기록되어 있다: 목야(牧野)전투이후, 주무왕은 수하에게 명령하여 여전히 저항하고 있는 상왕조의 촉국을 공격하도록 한다. 거기에는 "경자벌촉(庚子伐蜀), 을사자촉지(乙巳自蜀地)"라고 쓰여 있다. '경자일'에서 '을사일'까지는 겨우 6일이다. 주무왕의 군대가 하북북부에서 사천까지 6일만에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무왕이 공격한 '촉국'은 분명.. 2024. 10. 2. 이전 1 2 3 4 ··· 4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