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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이론

역사연구와 정치선전: 항전사기록의 병폐 (2)

by 중은우시 2024. 10. 25.

글: 강극실(姜克實)

군신 기쿠치 고헤이(木口小平)동상(하마다시 호국신사). 1918년 심상소학교 1학년 수신교과서.

3. "군신(軍神)"과 "영웅(英雄)"

정치선전이 전사기록(戰史記錄)면에서 나타나는 특징중 하나는 극단적인 영웅이미지를 창조하고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목적은 민족정신, 애국주의, 영웅사적교육을 통하여, 특정조직에 대한 충성, 헌신정신을 선전하고, 이를 통해 정권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쟁전의 일본은 국민으로 하여금 천황제국가의 침략전쟁에 헌신하도록 내몰기 위하여, 선전수법으로 대량의 군신(영웅)을 창조했다. 예를 들어, 청일전쟁때의 나팔수 기쿠지 고헤이(木口小平), 러일전쟁때 여순항구봉쇄전투의 히로세 다케오(廣瀨武夫) 중좌, 태평양전쟁때 진주민기습한 구군신(九軍神), 카미카제(神風)특공작전의 시키시마(敷島)대장 세키 유키오(關行男)등이 있다. 대대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서 미화를 거친 이미지이고,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패전후, 일본인은 전쟁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면서, 평화주의를 받아들였다. 모든 '전신'은 교과서와 공공장소에서 사라진다. 지금은 이미 군신사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와 반대로, 전승국은 전쟁의 신화가 보존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역사기록과 교과서에 나타난다. 필자는 중국의 군인과 백성들이 영웅스럽게 투쟁한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문제로 보는 것은 영웅을 창조할 때의 선전수법(신격화)의 존재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으로 역사를 대체하고 사실을 대체하여 학교교육에서 정치화현상을 운용하는 것이다. 과학적인 역사연구에 있어서 이건 아주 위험한 일이고, 크게 우려해야할 문제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전사기록, 학교사상교육에서 공산당, 팔로군의 "평형관대첩(平型關大捷)"(1937년 9월 25일, 산서성), 그리고 국민당 제5전구의 "태아장대전(台兒莊大戰)(1938년 4월, 산동성)의 과도한 선전이 있다. 이 두 전투는 전사의 각도로 보면 특수하거나 전과가 특별히 뛰어난 전투가 아니었다. 군사적, 전략적인 의미도 검토를 해보아야할 내용이다. 그러나,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대일전투에서 '첫승리'라는 정치적 의미로 인하여, 이 둘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양당에서 선전하고 국민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항일역량을 단결시키고, 공산당, 국민당의 항전지도위신을 제고시키는 정치수단으로 쓰였다. 오랜 시간, 여러 방면의 선전과 교육의 보급을 통하여, 그리고 선전내용의 역사화, 교육화로 이미지는 갈수록 사실과 동떨어지게 된다.

한편으로 부정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정치선전은 전쟁연대에 확실히 예상한대로 정치적 효과를 거두었다. 국민의 항전열정을 고무시켰고, 일본제국주의에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혔다. 당시의 정치목적인 일본군국주의의 침략을 분쇄하고 항전의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 선전전략은 성공적이었고, 효과적이었다. 설사 사실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정치적인 면에서는 필요했다. 여것은 일종의 정치적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4. 선전효과의 "제2차이용"

문제는 전쟁전의 "선전수단"에 있지 않고, 전후의 "역사화"과정에 있다. 항일전쟁이 승리로 끝나면서, 정치목적(항전승리)은 달성했다. 그리하여 이를 선전하는 것은 더 이상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 이러한 때 원래 선전의 대상은 정치조정에서 해방된다. 역사연구를 통하여 본래면모를 환원시켜야 한다(예를 들어, 미군의 유황도에서의 성조기보도). 그러나, 실제로, 현실적인 의의를 잃은 선전이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정치적 필요를 위해 다시 이용되고, 계승된다. 그리고 같은 수법으로, 원래의 기초 위에서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고 창조하여 이미지를 더욱 신성화시켜 완전무결한 모습으로 바꾼다.

이런 새로운 정치적 필요는 바로 "애국주의교육"이다. 중국국내의 거의 모든 전쟁기념관에는, 모두 같은 금색글씨로 "청소년애국주의교육기지"라는 간판을 달아놓았다. 이는 기념관의 주요목적은 역사주제를 이용하여 정치교육을 진행하는 것이다. 국가, 민족과 정당의 위대, 광영, 정확을 선전함으로써 정권을 공고히 하려는 통치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목적으로, 전시한 내용은 대부분 선전의 과장이 들어 있다. 학문과 역사사실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것들이다.

전후평화시대의 교육보급과 매체발달로, 선전에는 새로운 부작용이 나타난다. 즉 정치선전내용의 보편화, 역사화현상이다. 교육에 개입할 뿐아니라, 어용의 연구기관, 학자의 손을 통하여 정통화하여, 역사서에 사실로 기록하게 된다.

정치선전내용의 대중화, 역사화과정에서, 객관적인 환경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다. 즉 민족주의색체가 극히 강렬한 서민기호가 존재한다. 당연히 그것과 정치선전, 사상교육은 상호보완작용을 한다. 여러 해동안 대규모의 역사교육, 애국주의선전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중의 입맛에 맞고, 영웅의 사적, 이야기의 내용에 대한 엽기심리는 더더욱 상업적인 대중작가의 창작의욕을 자극한다. 소설가, 극본가, 각종매체는 벌떼처럼 달려들어, 대량의 저속한 항전주제의 문학, 영화드라마작품을 만들어 낸다. 선전조작을 통하여, 교육관리에 대중화현사이 나타나고, 다시 역사신화보급을 촉진하는 사회적 토양이 생긴다. 그 악영향의 한 가지 사례는 이러하다. 2016년 6월 27일 '낭아산오장사(狼牙山五壯士)'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판결사건(북경시중급인민법원)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선전으로 만들어진 허위의 소위 "민족의 공동기억, 민족정신 및 사회주의핵심가치관"이 법리(法理)를 대체하고, 학문연구를 봉쇄하는 황당한 정치판결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는 권력의 무지와 법률, 학문, 언론자유에 대한 도전의 승리를 상징할 뿐이다. 슬픈 일은 대중여론이 그런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진정한 학문연구를 곳곳에서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히 학문의 연구성과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육받아 심어진 이미지를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노신의 글에 나오는 아Q처럼, 학문의 자유를 이미 박탈당한 줄도 모르고, 법의 존엄이 짓밟혀진 것도 모르고, 자신이 한걸음 한걸음 독재정치의 형장으로 나가는 것이다.

5. "영웅"창조의 방법

약사의 영웅신화는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필자는 아무 것도 없는데서 만들어내지는 않았다고 본다. 분명히 부분적 사실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낭아산전투에서 희생되고 절벽에서 뛰어내린 5명의 전사, 유로장(劉老莊)전투에서 순국한 82용사, 평형관에서 적을 섬멸한 승리는 분명히 허구가 아니다. 다만 표창, 선전, 즉 정치화과정에서 임의로 선택하고, 미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규모승리'가 '대첩'이 되고(평형관대첩, 태아장대첩), '순국'행위가 적을 섬멸시킨 이미지로 끌어올려진다(낭아산오장사, 유로장연대의 선전). 원시의 사실진상에 가공과정을 거쳐 크게 사실에서 벗어나버린다. 영웅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정치선전이 통상적인 취하는 수법은 다음과 같다:

  1. 첨지가엽(添枝加葉). 가지를 붙이고 잎을 더한다. 예를 들어, 평형관대첩에서 적의 후방물자수송부대를 습격한 기본사실이 여러해동안의 선전에서 계속 확대되어, 적의 정예주력부대를 점령했다는 내용, 임표가 3차례에 걸쳐 교구(喬溝)로 정찰을 다녀왔다는 내용, 교구에서 습격한 것은 임표의 독창이라는 설, 적군의 비행기, 탱크가 출동했다는 설, 팔로군과 일본군이 대규모 육박전을 벌였다는 설, 국민당군이 협조하지 않았거나 혹은 고의로 빈틈을 남겨 적이 도망칠 수 있게 했다는 설등. 이는 모두 이후의 선전과 이야기과정에서 첨지가엽된 것이다. 당연히 역사적 근거는 전혀 없다.

2. 반츤법(反儭法). 적의 사망자수를 허위로 조작하여 영웅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낭아산, 유로장연대의 선전에서, 원래는 그저 죽기를 각오하고 장렬하게 순국한 행위인데, 그 이미지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항전의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하여, 없던 일을 만들어내어 적섬멸숫자까지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낭아산오전사는 "적90명을 죽였다"(실제 고증결과 일본군의 부상은 단 1명이었다)는 내용이 만들어 지고, 유로장영웅연대는 "적 170-300명을 섬멸했다"(현실은 사망2명, 부상은 미상)는 내용이 만들어진다. 양성무(楊成武)독립단의 요참(腰站)저격에서 "적 300-400명을 섬멸했다"(실제로는 2명사망 7명부상)는 내용, 양명보(陽明堡)야간기습에서 적비행기 24대를 파괴시켰다. "적백명을 섬멸했다는 등(실제로는 적의 비행기 1대를 크게 파괴하고, 인원3명사망, 4명부상을 입혔다). 그 선전내용과 사실숫자간에는 큰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3. "위군(僞軍)"법. 이것도 반츤법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일본군은 엄격한 사망통계숫자가 있기 때문에, 일본군의 서멸한 숫자를 크게 과장하기는 어렵다. 선전기관이 만들어낸 새로운 방법은 용어를 애매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과를 설명하면서 "사망" "부상"을 구별하여 계산하지 않고, "사상(死傷)"으로 통칭하거나, 아예 "섬멸, 소멸"등 의미가 불명확한 용어를 사용한다. 선전숫자에서 헛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주 "위군"(친일정부군) "이귀자(二鬼子)"(조선인에 대한 멸칭)의 인원수를 증가시켜 전과를 선전하는 방법을 쓴다. 혹은 통칭하여 "일위군(日僞軍)"이라고 적어서 적군사상숫자의 차이가 나오는 점에 대하여 보완한다.

실제로 소위 "위군"의 다수는 백구(白區)에서 일본군의 선무공작후에 성립된 조직의지방자위무장이다. 일반적으로 제1선에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다. 평형관, 태아장같이 정규군이 작전하는 경우에는 위군이 출현할 수 없다. 점령지구의 지방소탕에서 설사 위군(일반작으로 일본군자료중에서 화평군, 보안대, 황협군등)이 전투에 참가하더라도, 일본군의 작전당안에는 조직과 인원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일반적으로 사망기록은 없다). 팔로군의 낭아산전투, 진장(陳莊)대첩기록을 보면, 선전자는 강제로 근거지의 물자(淸鄕物資)를 운송하던 비무장 민공대를 '위군'이라고 하면서, 적으로 살상한 것으로 기록했다. 팔로군이 진장에서 전투할 때, 광양기습전에서 죽은 민간인숫자는 필자의 고증에 따르면 일본군사망자수에 접근하거나 초과한다. 아무런 무장도 갖추지 않은 민공들이 죽은 후에 숫자는 과장된다. 그리고 팔로군이 '일위군'을 섬멸한 대첩의 전과로 기록된다. 이러한 민족의 고육계, 희생은 누구의 존엄을 위한 것인가. 누구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