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두두역사미(兜兜歷史迷)
고대에 명칭이 아주 비슷한 관직이 있다. 하나는 승상(丞相)이고 다른 하나는 재상(宰相)이다.
사람들의 느낌으로 말하자면 이 두 개의 관직은 아주 유사하다. 이름이 비슷한 것뿐 아니라, 지위도 유사하고, 심지어 하는 일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승상과 재상은 하나의 직위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명칭인 것일까?
기실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재상과 승상은 한 사람이 가질 수도 있다.
중국의 상기(象棋, 우리나라의 장기)에 있는 말중에 "상(相)"이 있다. 여기의 "상(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승상과 재상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그들중 누가 권력이 더 큰가?
오래전에 승상이라는 관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관직이 아니었다. 처음에 승상은 그저 '상국(相國)'의 부수(副手)였다.
그렇다면, '상국'은 또 무슨 직위인가? 상국이라는 직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승상과 비슷한 직위이다.
춘추시대 제(齊)나라에 아주 공헌이 큰 관중(管仲)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화하제일상(華夏第一相)"으로 칭해지는데, 여기의 "상(相)"이 바로 '상국(相國)'이다. 상국이라는 직위는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나라때까지 계속 존재했었다.
관중이 맡았던 상국은 이미 제나라의 최고관직이다. 그의 위에는 제환공(齊桓公)뿐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기실 '상국'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상방(相邦)'이라고 불렸다. 나중에 한나라이후, 유방(劉邦)의 이름을 피휘하여 '상방'을 '상국'으로 개칭하게 된 것이다.
'승상(丞相)'중의 '승(丞)'은 원래 보조(輔助), 보좌(輔座)의 뜻을 가진다. 왜냐하면 승상의 원래 의미는 상국을 보좌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상국이라는 지위는 '진(晋)'나라에서 시작했고, 나중에 각국이 모두 이 직위가 아주 합리적이라 보고 속속 따라하게 된다.
진(秦)나라에 이르러, 진무왕(秦武王)은 진나라의 강역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여 상국의 업무가 너무 많을까 우려하여, 상국에게 좌우 두 명의 승상(丞相)을 붙여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승상'이라는 관직명칭의 유래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승상은 어떻게 상국에서 독립하여 스스로 지위를 격상시키게 되었을까? 이건 진시황의 '중보(仲父)' 여불위(呂不韋)를 얘기해야 한다.
여불위는 진나라의 장양왕(莊襄王)의 아들 자추(子楚)를 진나라로 데려온 후에 승상에 임명된다. 그리고 여러가지 상을 하사받는다. 이때의 여불위는 비록 승상이지만, 그는 자초와의 관계로 인하여 승상지위를 끌어올리게 된다.
이때의 상국이 누구였든지간에, 그는 감히 여승상(呂丞相)을 자신의 부하로 부릴 수는 없었다. 그는 감히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비록 이때의 여불위는 명목상 상국의 아랫사람이지만, 이때 그의 지위는 이미 상국보다 높아져 있었다.
진시황이 등극한 후, 여불위를 더욱 존경하여 즉위하자마자 그를 '상방'에 임명한다. 즉, '상국'이다.
다만, 진시황이 장성한 후, 여불위가 한 나쁜 짓들이 발각되면서, 그는 상국에서 쫓겨나고 결국은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게 된다.
여불위가 죽은 후, 그의 직위를 이어받은 사람은 이사(李斯)이다. 이때의 이사는 바로 승상인데, 그의 지위는 여불위때와는 차이가 컸다.
여불위의 일로 인하여, 진시황은 '상국'이라는 직위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는 더 이상 상국을 두지 않는다. 그러니, 이사로서는 승상의 직위에 오르더라도 아주 좋은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여불위이후, 이사부터 시작하여, 승상의 지위는 이미 이전의 상국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권력이 조야를 뒤흔드는 직위가 된다. 나중에 지록위마(指鹿爲馬)했던 조고(趙高)의 직위도 승상이다.
한나라에 이르러, 서한시기에 승상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상국의 지위가 다시 전성기를 맞이한다. 예를 들어, 소하 소상국, 조참 조상국....이때는 아직 상국의 지위가 아주 높았다.
광무제가 동한을 건립한 후, 상국의 직위를 두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승상의 직위도 없게 된다. 이때 조정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인물은 삼공(三公)의 으뜸인 대사도(大司徒)였다.
진(晋)나라에서 처음 승상을 둔 때로부터 서한의 마지막 황제 한애제(漢哀帝)에 이르기까지 수백년동안은 승상이라는 직위가 전승되었다.
비록 승상의 지위가 어떤 때는 높고 어떤 때는 낮았지만, 이 관직은 확실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히게 된다. 후세의 왕조에서, 승상이라는 관직은 이미 독립해서 상국을 두지 않더라고, 승상은 둘 수 있게 된다.
동한초기에는 확실히 상국을 두지 않았다. 승상도 없었다. 다만 동한말기에 이르러, 조정은 경성으로 들어온 동탁(董卓)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하여, 동탁에게 상국(相國)이라는 직위를 내린다. 그리하여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기 전에 '동상국'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다만, 동탁의 이 상국이라는 직위는 그저 명목뿐이었다. 그는 정무를 처리할 줄 몰랐고, 그리하여 그를 보좌하는 승상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조조가 "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侯)"할 때, 상국을 설치하지 않지만, 여전히 승상이 된다. 한헌제가 직접 동한의 최고관직을 대사도에서 승상으로 바꾸고 조조를 승상에 앉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조는 사람들이 자주 '조승상'으로 불린다.
나중에 조조는 자신의 위(魏)나라를 세우는데, 위나라에는 상국을 둔다. 즉 위상국인데, 종요(鍾繇)가 이 직위를 맡는다.
한헌제가 명을 내려 사도를 승상으로 고친 후, 촉한도 그에 따라 개혁을 진행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잘 아는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촉한은 국가사정이 특수하여, 제갈량이라는 촉한의 승상은 하는 일이 특히 많았다. 어떤 때는 승상이 맡지 않을 일까지도 그가 맡아서 처리했다. 유선도 그에게 일을 넘겼다. 그리하여 승상의 권력이 아주 커진다.
다만, 승상이라는 직위는 기실 그렇게 큰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조조가 승상으로 있을 때, 동탁의 상국 지위와 마찬가지로 그저 명목이었다. 하물며 이때의 동한조정은 이미 사실상 망하여 명목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승상이 해야할 일이 그다지 많지도 않았다.
조비가 즉위한 후, 동한조정을 철저히 폐지하고, 자신이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위상국을 대사도로 개칭한다.
그리하여 동한에서 승상이라는 관직이 존재했던 시기는 아주 짧다. 겨우 몇십년이다. 사마씨가 조위의 기업을 찬탈한 후, 서진을 건립하고 통일을 이룬다.
다만 서진시기에 조정은 승상을 두지 않는다. 동진초기에 이르러 비로소 아주 짧은 기간동안 설치하였으나 금방 폐지해버린다.
남북조시기에 들어서면서 북위에만 3명의 승상을 둔다. 나머지 시기에는 승상의 직위를 두지 않는다. 수문제, 수양제시기에는 삼성육부제를 실시하면서 역시 승상의 직위를 두지 않는다.
그리하여, 승상이라는 관직은 기실 존재한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다.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다. 다만 삼국시대의 승상이 비교적 특이한 경우였을 뿐이다.
당나라가 건립된 후, 기본적으로 승상을 두지 않는다. 다만 당나라의 재상은 아주 대단했다. 그건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당나라의 승상은 오직 당현종(唐玄宗)이 즉위한 개원(開元)연간에 나타난다. 당시 그의 형인 이성기(李成器)는 전임황제의 적장자이고, 원래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야할 황위를 동생 당현종에게 양보했다.
당현종은 감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자신의 형을 최고관직에 앉힌다.
당나라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관직은 상서성의 최고장관이다. 일반적인 경우에 상서성에는 좌우 두 명의 복야(僕射)를 두어 공동으로 상서성을 관장하게 한다.
당현종은 자신의 형에 대한 신임을 보여주기 위해 직접 형을 승상에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상서성을 관장하게 한다. 이때의 승상은 이성기와 개인적으로 엮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성기가 죽은 후, 승상이라는 관직은 사라지게 된다.
송나라의 승상지위는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다만 나중의 승상직위는 일반적으로 다른 지위에서 바뀐 것이다. 일찌감치 예전에 상국을 보좌하던 부직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중의 승상은 설치하면 두명이었다. 좌승상과 우승상. 목적은 상호 견제함으로써 승상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황권을 강화시키기 위함이다.
원나라가 건립된 후, 쿠빌라이는 한족문화를 좋아했고, 조정내의 관직도 남송을 본받는다. 그리하여 삼성육부제를 실시하고, 중서성에 중서령(中書令)을 두고, 중서령의 아래에 좌우승상을 두었다.
명나라때 주원장도 그 방식을 따른다. 다만 주원장의 좌승상 호유용이 반란을 일으킨 후에 화가난 주원장은 이후 영원히 승상직위를 설치하지 말라고 명을 내리게 된다.
위에서는 승상에 대하여만 잔뜩 얘기했는데, 왜 재상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을까? 일반적인 경우에 재상(宰相)은 하나의 관직이 아니다. 그저 존칭이거나 통칭이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황제의 아래 최고의 행정장관을 말한다.
처음부터 얘기하자면 제나라의 관중은 상국인데, 제환공의 아래에서 최고위직이다. 이때의 관중을 우리는 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초나라의 최고행정장관은 영윤(令尹)인데, 영윤을 맡은 사람도 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나중에 진나라의 여불위, 이사 같은 사람도 우리는 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동한시기에는 사도가 가장 높은 관직인데, 그렇기 때문에 사도인 왕윤도 우리는 재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나중에 조조는 승상에 임명되는데 이때는 그가 동한조정의 최고위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재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때의 조조는 승상도 맡았는데, 이때는 승상이 지위가 가장 높은 관리로 단지 한헌제만이 그의 위에 있었다. 그래서 조조도 재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명나라때는 승상의 직위를 없애고, 주원장이 내각제도를 설치한다. 이때의 내각수보대신(內閣首輔大臣)은 당시 지위가 가장 높은 괸리였다. 그러므로 내각수보대신이 명나라의 재상이다.
청나라의 재상도 마찬가지이다. 대학사급의 관리를 재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신(和珅), 그리고 TV드라마에 나오는 유용(劉墉)같은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에 재상은 최고행정장관직위를 맡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 직위는 어떤 때는 승상이고 어떤 때는 사도이고, 어떤 때는 복야이다.
다만 당나라때, 재상은 달느 시기의 재상과 조금 달랐다. 당나라때는 "군상졔(群相制)"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재상은 당나라의 정식관직이었다. 관리는 실질적인 재상이 될 수 있었다.
당나라의 재상은 등급이 나뉘어졌다. 1급에서 3급까지의 삼등재상이 있다. 삼성내부관리는 모두 재상이 될 수 있다. 1급재상의 관직은 비교적 높다. 그아래 관리는 그저 2급 혹은 3급 재상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상 유명한 위징, 적인걸, 곽자의, 이광필등이 모두 1급재상이다. 다만 실질재상이라는 이 제도는 안사의 난 이후에 명존실망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아, 승상은 관직이다. 시대가 다르면 관직의 권한이 크기도 하고 적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주원장에 의해 폐지당한다.
재상은 기실 그저 하나의 칭호이고, 모든 왕조에 황제의 아래에 있는 신하들중 최고위직의 관직을 가리킨다. 이 직위를 가지면 재상이다. 당나라만 예외이다. 당나라에는 재상이 아주 많았다. 고위관료가 되면 재상에 봉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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