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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일부 역사학자들은 왜 이렇게 추악한가?

by 중은우시 2025. 2. 27.

글: 정사통찰(正史洞察)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웃음거리가 많은 집단이다. 오늘 우리가 얘기할 것은 그들이 어떤 사람이냐는 것이다.

역사학자의 웃음거리 하나: 이중기준

중국역사학자들의 최대의 웃음거리중 하나는 문제를 볼 때 이중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청제국의 철기(鐵騎)에 의한 가정도성(嘉定屠城)은 죄악이라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대청제국의 철기가 준가르칸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도살한 것에 대하여는 "준가르평정"이라고 부른다.

같은 대도살인데, 죽이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면 죄악이 되고, 죽이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면 공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흉노는 우리의 영토로 침입해 들어와서는 안되지만, 우리는 대막으로 진격하여 흉노를 추격하여 죽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쳐들어오는 것은 침략이고, 우리가 쳐들어가는 것은 자위(自衛)이다. 한무제가 남정북전하면서 대량의 영토를 차지했는데, 이 일에 대하여 나는 그 어느 역사학자도 들고 일어나 비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왜 그런가? 엉덩이가 머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이 감히 직면하지 못하는 것은 만일 침략이 없었더라면 광동(廣東)은 그저 시골사람들의 천하일 것이다. 한족의 강역은 어디에서 왔는가. 침략해서 얻은 것이다.

일본인이 대만, 조선을 점령하여 일본제국이 된 것은 침략이고, 진시황이 육국을 병합한 것은 중화를 통일한 것이고, 역사의 공적이 된다.

네가 자리한 입장이 네가 보는 세계를 결정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몽골을 분열시킨 것은 죄악이지만, 조선을 분열시킨 것은 공적이다.

그리고, 미국해군이 민국에서 무력을 시위한 것은 국가의 치욕이지만, 대청의 북양수군이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무력시위를 한 것은 국가의 경사이다.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원주민의 수중에서 보도(대만)을 빼앗은 것은 침략이지만, 정성공이 네덜란드인의 수중에서 보도를 빼앗은 것은 수복이다. 원주민은 보조의 주인이지만, 역사에서 그 지위를 상실해 버렸다.

그리고, 영국이 상해에 조계를 설치한 것은 침략이지만, 대청제국이 조선에 조계를 설치한 것은 친선이다.

각종 이중기준, 각종 깡패이론은 탄식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스스로 거울을 비춰보라.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역사학자의 웃음거리 둘: 논리혼란

중국의 역사학자는 동시에 체면을 중시하는 집단이다. 그러므로 망국같은 일도 그들은 아름다운 역사로 쓴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몽골제국이 남송을 점령한 일일 것이다.

분명히 한족제국이 몽골에 멸망했는데, 중국의 역사학자는 그것은 중국의 하나의 왕조이고, '원조(元朝)'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실상, 근본적으로 '원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원(元)'이라는 것은 그저 유리사이대륙을 가로질러 존재하던 대몽골제국(The Mongol Empire)의 일부분이었다. 당시 몽골통치자의 눈에, 한족은 천민이고, 피정복자이며, 원조는 전혀 중국이 아니었다.

당연히 쿠빌라이가 병력을 파견하여 일본을 친 것에 대하여 일본역사상 뭐라고 부르고 있는가? "몽골내습"이라고 부른다. 왜 일본인은 원조가 일본을 침략한 전쟁을 '중국침일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왜냐하면 원나라는 근본적으로 중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원조는 그저 한인의 전후 97년의 망국사이다. 그 뿐이다. 근본적으로 '원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징기스칸도 중화의 민족영웅이 아니고, 원조도 중국인의 국가가 아닌 것이다.

만일 한 무리의 침략자들이 우리 국가를 멸망시키고, 그들 자신의 국가를 건립했는데, 그후에 그들의 국가가 역사에서 우리의 나라로 바뀌어버린다면, 소위 침략에 저항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청제국도 마찬가지이다. 역사 한인망국의 역사이다. 전후 268년간, 대청제국이 중국인가?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 정여창, 등세창은 잘 몰랐다. 그러나 손중산은 분명하게 알았다. 그래서 청일전쟁이 발발하는 그 해에 손중산은 급히 일본 주홍콩영사관으로 찾아갔다. 무엇을 했는가? 돈을 달라고 했고, 총을 달라고 했다. 손중산은 일본에게 돈을 내서 자신을 도와주고, 자신이 무장세력을 만들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남중국에서 일본과 남북협공의 국면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공동으로 대청제국을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손중산은 왜 일본과 손을 잡고 대청제국을 공격하려 했을까? 왜냐하면 대청제국은 중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은 1644년에 이미 망했다. 이 점을 손중산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동맹회의 상하는 기본적으로 모두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손중산이 일본에게 대청을 무너뜨리게 도와달라고 한 것이고, 한인의 국가를 회복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다시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백성들은 누굴 도와야 했을까? 답은 마땅히 영국인을 도와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주오랑캐를 몰아냈어야 한다. 그후에 영국인의 도움 하에 한인의 국가를 회복시켜야 한다. 그후에 보답으로 영국에 중국의 시장을 전면개방하였어야 했다. 이것이 정확한 길이었다.

주의: 사료는 영국이 영토야심이 없다고 되어 있고, 영국과 합작하더라도 망국의 위험은 없다. 그리고 시장개방은 쌍방에 모두 유리하다. 이것은 경제상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누가 얻어맞았는가? "우리"가 얻어맞았는가? 아니다. 만청침략자들이 얻어맞은 것이다. 자유무역을 기치로 내건 영국은 선진문명을 대표했고, 우리가 만일 안목이 있었더라면, 마땅히 영국편에 섰어야 한다. 함께 대청을 무너뜨렸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시장경제의 한인국가를 건설했어야 한다.

역사학자의 웃음거리 셋: 자기기인(自欺欺人)

중국역사학자들은 아주 교활한 집단이다. 그들은 역사사건의 전인후과를 삭제함으로써 독자의 기호에 영합한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바로 1886년 대청제국의 북양수군이 일본 나가사키에서 무력과시를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오늘날 역사자료를 보면 의문의 여지없이 대청의 수군이 먼저 공격했다. 그러나 중국역사학자의 글, 역사도서, 영화드라마작품등에서 일본경찰이 먼저 공격했다고 하고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까? 오래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들고 일어나 사실을 이야기 한다. 예를 들어 나같은 사람.

대국의 수군이 자신의 포함이 강대하다는 것을 믿고 다른 나라의 국토에 들어가 사람을 때렸고, 그 후에도 반성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당하게 역사서에서 거짓말을 써놓았다. 상대방이 먼저 공격했다고. 이게 무슨 행동인가.

일본귀자를 욕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그럼 자신은 또 뭐가 되는가. 오십보백보이다. 그뿐인 것이다.

그리고 화소원명원(火燒圓明園). 협상사절단의 사람을 죽여버렸다. 두 나라가 싸우더라도 사신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그건 누가 가르쳐 준 것인가. 상대방의 사절단을 죽여버리다니. 그래놓고 상대방이 원명원을 불질렀다고 욕하는가. 1979년 사절단을 하노이로 보냈는데, 그들이 사절단을 죽였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도 있다. 역사학자들은 단지 신축조약만 얘기한다. 그러나 산서순무 육현이 태원에서 선교사를 남녀노소 불문하고 도살한 것에 대하여 나는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단 한 글자라도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앞의 원인은 싹뚝 잘라버리고, 그저 뒤의 결과만 얘기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역사학자들이 기세도명(欺世盜名)하는 관용수법이다.

그러나, '자기기인'은 잠깐 동안 기분좋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게 되면, 결국 모든 진상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중기준, 논리혼란, 자기기인(自欺欺人). 그들 세대는 이미 도리가 없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똑똑한 사람들이니 더 이상 이런 사기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