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자주한관정책하의 대외교류
"자주한관"정책은 국가주권을 보호하고, 서방식민세력의 침략을 방비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 형성이든 발전이든 모두 역사적인 합리성이 있다. 최신 연구를 보면, '자주한관'은 명청시기 중외경제무역왕래와 문화교류를 막지는 않았다. 명나리때 중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체였다. 명나라조정의 대외무역관리제도의 계속된 조정으로, 조공무역은 대체로 4가지 유형으로 발전한다.
첫째, 조공급사무역(朝貢給賜貿易). '정공(正貢)'과 '상사(賞賜)'는 실제로 중국과 외국간의 선물교환에 상당한다. 명태조는 조칙(詔勅)에서 여러번 말한다: "박래이정후즉가(薄來而情厚則可), 약기후래이정박(若其厚來而情薄), 시위불가(是爲不可)"(물건은 적지만 정이 두터우면 된다. 만일 물건이 두텁지만 정이 박하면 그건 안된다). 이런 교환의 정치외교적인 의미는 경제무역이익보다 훨씬 크다. 무역액은 전체 무역체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적은 일부이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이것은 진정한 무역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명회전>에는 25개국이 조공한 시간과 공품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도 그외에 수문달나(須文達那), 불름(拂菻), 람방(覽邦)등 38개국은 구체적인 공품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합계 63개국이다. 각국의 공품은 본국의 토산품, 진기한 물건을 위주로 하고, 명나라의 급사는 비단, 화폐가 대종이다.
둘째, 조공무역중 부대물품교역. 공사품교환을 제외하고, 각국사신단 구성원(따라온 상인들 포함)의 부대물품교력을 명나라조정은 "부지번화(附至番貨)" 혹은 "부탑화물(附搭貨物)"이라고 불렀다. 이런 '정공' 이외의 상품교역은 조공무역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명나라조정은 이런 유형의 무역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관급초정(關給鈔錠), 수기가치(酬其價値)"의 방법을 취했다. 각각 경사회동관(會同館), 시박사(市舶司) 소재지 및 연로에서 진행하는 무역이 있으며 구체적인 무역장소는 나라마다 달랐다.
셋째, 견사출양직접무역(遣使出洋直接貿易). 이런 류의 무역은 정화하서양(鄭和下西洋)이 전형이다. 실제로 관방국제무역체제를 가장 잘 체현한 유형이다. 정화하서양은 객관적으로 국가권력이 지역협력에 개입한 합작이고, 정화하서양은 새상육상 비단길을 관통한다. 남해 내지 인도양의 무역을 역사적인 최고봉으로 끌어올린다.
넷째, 민간호시교역(民間互市交易). 이는 이전에 왕왕 주목하지 않았던 관방관리하의 민간대외무역이다. 조공무역 자체는 일정한 민간개인의 대외무역을 포함한다. 명나라때 사람 왕기(王圻)는 이런 말을 한다: "무릇 외국 오랑캐로 조공을 오는 자는 우리 왕조에서 모두 시박사를 설치하여 받았다.....방물을 가져오는 것을 허락했고, 관방에서 아행(牙行)을 설치하여 민간과 무역했고, 이를 호시(互市)라 부른다. 공박(貢舶)이 있으면 호시도 있다. 조공을 하지 않으면 호시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 의미는 조공무역 자체에 호시무역이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이다.
명말 고우태(高宇泰)의 <경지록.공시고>는 영락제의 <근현지>의 외국물품리스트를 인용하는 것을 중심으로 송원명시기에 영파(寧波)에서의 무역물품, 창고규모와 시박사 및 그 행인설치방면을 비교분석했다. 이를 통해 명나라초기 대외무역이 송,원보다 훨씬 흥성했음을 알 수 있다. 명나라의 대외무역의 특징은 조공이 있으면 호시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국의 '정공' 물품은 겨우 20가지인데, 부대무역의 물품은 248종에 이르렀다. 이런 거대한 차이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조공무역에서 선물교환물품은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고, 절대다수는 상품으로 거래한다. 나아가서 당시의 국제무역은 구역각국의 중요자원을 교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무역을 전개하는 각국 통치자들 자체가 바로 본국자원의 최대지배자였다). 당시 영파 시박사는 100명의 행인(行人, 즉 牙人)이 있었다. 이를 보면, 국제합작매커니즘하의 국제무역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알 수 있다.
중서무역왕래가 빈번함은 무역규모, 수출상품과 백은 및 기타 해외상품의 유입방면에서 충분히 체현된다. 데이타로 보면, 명청 중국해상무역규모는 전체적으로 지속적 성장을 한다. 1685년-1757년까지, 서방에서 중국으로 온 상선은 312척이고, 건륭제가 '일구통상'을 실행한 이후인 1758년-1838년사이에 광주로 와서 무역한 상선은 5,107척이다. 이전보다 16배나 많았다. 이를 보면 강희제때부터 건륭제때까지의 100여년간, 해외무역량은 큰 폭으로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구통상'은 서방상선이 중국에 진입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일부 사람이 가진 중국인이 해외무역에 대한 태도가 소극적이고 보수적이라는 견해는 성립되지 않는다. 1760년대 광주무역의 데이타를 예로 들면, 중국범선운수화물량은 광주무역총수의 25%이다. 운송량이 가장 많았을 때는 영국동인도회사보다 겨우 2%가 적었다. 이는 중국범선이 운송하는 화물이 광주무역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관세가 증가한 것도 무역량이 증가한 것을 보여주는 주요지표이다: 월해관의 통계에 따르면, 18세기 30년대부터 18세기말까지 평균 매년 세은(稅銀)은 5만냥가량이었다. 그런데 19세기초에는 매년 100여만냥에 이른다. 도광8년(1828년)부터 17년까지 관세수입은 더욱 많아서 1,500여만냥에 이른다. 확실히, 자주한관 기간동안, 대외무역은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추세를 나타냈다.
상품수출상황을 보면, 명청시기 중국사직품, 도자기, 차등이 대량으로 해외판매된다. 17세기하반기, 사직품(생사, 비단등 포함)와 자기는 여전히 구미각국에서 인기있는 중국상품이었다. 이 두 가지 물품은 원래 단지 상류사회에서만 사용되는 사치품이었는데, 점점 일반백성들에게까지 보급된다. 예를 들어, 중앙아메리카의 열대지구의 주민들이 이미 비단제품을 입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네덜란드상선은 17세기에 1,500만건의 중국도자기를 수출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귀족계층은 여전히 중국에서 온 아름다운 도자기를 자랑으로 여겼다. 그들은 왕왕 거실에 '중국각(中國角)'을 두고, 자신의 소장품을 전시했다. 18세기 20년대, 차가 사직품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그후 오랜 기간동안 가장 많은 수출상품을 이루게 된다.
그외에, 명청시기 백은(白銀)과 다른 해외상품이 밀려들어온 것도 해외무역의 번성을 반영한다. 명나라 중엽이후, 일본과 미주의 백은이 대량으로 중국에 유입된다; 청나라전기, 백은유입추세는 여전히 계속된다. 통계에 따르면, 1700년-1830년 사이에, 중국이 수입한 백은가치는 9,000만-1억파운드이다. 거액의 백은이 유입된 이유중 하나는 서방국가 자체가 중국소비자들이 소비할 상품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상품들은 예를 들어, 영국의 옥감같은 경우도 중국에서는 대량으로 소비되지 않았다. 당시 중국인들은 양복을 입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옷감은 가격이 비쌌다. 차라리 베를 쓰는 것이 실용적이었다. 중국인들이 구매할만한 상품이 없었고, '신세계'인 아메리카에서 백은이 풍부하게 생산되므로 그들은 대량의 백은을 싣고 중국으로 와서 무역한다. 강희제때 중국으로 온 영국선박의 은과 화물의 교환비율은 통상 2:1이었다. 옹정연간에는 더욱 높아져서 9:1이 된다. 백은외에, 서방상선이 가져온 것은 후추, 단향, 모피등의 상품이었다. 그중 대부분은 동남아산이다. 청나라 상류사회에, 시계, 화총등 서방제품이 환영을 받았다. 주목할 점은 명나라후기에 도입한 고구마, 옥수수, 담배등 아메리카의 농작물은 청나라전기에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중국인의 일상생활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 서양선박은 비록 직접 이들 상품을 판매하지 않았지만, 이들 아메리카의 작물이 중국에서 보급된 것은 해외무역이 촉진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서문화교류도 명청시기에 지속적으로 발전한다. 중학이 서방에 전해지고, 서학이 동점한다. 한편으로, 명말에서 청나라중전기까지, 중국문화가 서방사절, 상인, 선교사들의 붓으로 전해져 일부 유럽엘리트들의 눈에 문명지혜와 도덕질서의 모범으로 인식되어 숭상된다. 18세기 유럽에는 한때 '중국붐(Chinoserie)'이 일어난다. 다른 한편으로, 서학동점의 진전이 시작되고 지속적으로 추진된다. '지동설' '태양중심설', 서양회화등 지식이 전해지면서, 자명종, 화기등의 제조기술도 들어온다. 이는 중국지식인들의 시야를 넓혀주었을 뿐아니라, 국가통치와 사회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명말 서양선교사들이 가져온 '천학(天學)' 지식체계는 사대부집단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순치제때부터 건륭제때까지 약 150년간, 청나라궁정에는 서방기술전문가가 있었고, 이들 선교사들은 청나라를 위하여 역법을 제정하고, 지도를 그리고, 화포를 만들고, 원림건축, 회화, 어전의사등 여러 기술서비스를 제공했다. 건륭제때 편찬된 <사고전서>에는 56종의 서학저작이 수록되어 있다. 천주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중국사회신앙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천주교의 중국화는 새로운 시대의 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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