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명청시대 중앙정부의 대외정책
서방식민세력이 점점 압박해 들어오자, 명청 두 왕조의 통치자는 군사, 경제, 문화등 서로 다른 층면에서 일련의 정책을 취한다.
먼저, 군사적으로 서방국가에 대한 방비를 강화한다. "입중외지대방(立中外之大防)". 명나라 정덕연간, 포르투갈사신단이 베이징에서 쫓겨난 후, 중국과 포르투갈의 관계가 악화된다. 가정원년(1522년), 포르투갈선단이 중국연해로 들어갔다가 중국관병에 제지당한다. 이렇게 하여 중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서초만지역(西草灣之役)"이 발발한다. 이 사건은 명나라통치자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외이(外夷)'에 대한 불신감을 증가시켰다. 그후 명나라는 연해지구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다.
"혁도선(革渡船), 엄보갑(嚴保甲), 수포간민(搜捕奸民)" 해방의 관병을 정돈하고, 밤낮으로 훈련한다. 청왕조에 이르러, 강희제는 한편으로 서양과학기술을 배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식민침략에 경계심을 유지하며, 해방을 강화하고, 연해지구에 포대를 설치하여 방어를 강화한다. 건륭제는 영국특사 매카트니가 중국으로 온 후, 명을 내려 각 성은 해방을 강화하는 것을 중요임무로 삼도록 하고, 순찰이 느슨한 곳이나 군기가 느슨해진 곳은 정돈한다. 이를 통해 변방의 안전을 확보하고, 청나라조정은 서방에서 중국으로 오는 상선에 대한 제한적조치를 취한다. 서방상선은 황포항(黃埔港)에 들어오면 반드시 대포와 무기는 내려놓아야 하고, 광주로 와서 무역하는 산선이 가진 화물보호병력은 항구로 함부로 진입할 수 ㅇ벗도록 하고, 서방의 상선이 정박하는 곳은 광동지방관리가 병력을 보내어 순찰하고 조사했다.
특별히 지적할 점은 명청 두 왕조가 실행한 해금정책(海禁政策)은 '폐관쇄국'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명나라초기, 왜구침입, 해외로 망명한 적대세력이 많았고, 해방건설이 아직 완비되지 않았던 원인으로, 확실히 오랜 기간동안 해금정책을 실시한 바 있다. 다만, 해금과 외국인과의 교류금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홍무25년(1392년) 칠월, "양절운사(兩浙運使)가 아뢰기를, '상인이 온주의 각 소금을 가지러 가려면 반드시 바다를 지나야 한다. 그런데 군민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없다고 하여 관청에서는 일률적으로 금지하여, 상인들이 소금을 운반하는데 불편하다. 황상이 말하기를, 바닷가의 사람들이 섬의 오랑캐와 결탁하여 해적이 되는 일이 잦아서 해금을 한 것이다. 만일 상인들이 소금을 운반하는 것이라면 왜 금지하겠는가. 병부에 보내어 알려라." 이를 보면, 명나라가 비록 해금을 했지만, 정상적인 해상생산활동을 금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명나라때의 해금정책은 본국인민을 겨냥한 것이고, 목적은 적대세력이 대륙에서 물자보급과 정보를 취득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지, 해외각국을 겨냥한 걳은 아니었다. 더더구나 의식적으로 폐관쇄국한 것은 아니었다. 동시에, 해금정책실시기간, 명나라조정은 '수집'의 방식으로, 대량의 적대세력이 남긴 항해인원을 군대에 편입시켜, 단기간내에 강대한 해군을 훈련시켜내어, 계속하여 근해를 순항한다. 이를 통해 해상의 경제무역활동의 정상적인 전개를 보장했다. 그외에 명나라는 해금의 강도를 강화하였는데, 목적은 연해질서와 사회안녕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왜구를 평정한 후, 즉시 조정하여, 중국상민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허용했고, 다시 마카오에 항구를 열어 외국상인들이 중국으로 와서 해상무역을 하도록 허용했다.
청나라초기 "금해(禁海)" "천해(遷海)" 정책을 실시하는데, 이는 정성공 항청세력에 대한 임시조치였고, 대내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강희22년, 청나라가 대만을 통일한 후 즉시 '전계(展界)'를 결정하고, 연해주민들이 다시 옛땅으로 돌아가게 한다. 강희23년 십월, 청나라조정은 정식으로 개해(開海)한다. 민중들이 해상무역에 종사할 수 있도록 윤허한다. 강희56년, 비록 해방의 필요로 청나라정부가 '남양금해령'을 내렸지만, 동양과 서양의 무역은 제한하지 않았었다.
다음으로, 경제적으로 대외무역구역을 제한하여 효과적으로 관할할 수있게 했다. 명나라초기이래, 중앙정부는 효과적으로 조공사무를 관리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항구를 획정하고, 명나라로 들어와 조공하는 외국인원들에게 각자 정해진 항구로 상륙하게 한다. 만력초기, 광동지방관리는 변통방법을 취하여, 조공하지 않는 나라의 상인들도 매년 여름과 겨울 두 계절에 정기적으로 광주로 와서 무역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명나라정부는 마카오의 수출입무역에 법규를 제정한다: 마카오에 정박하고 거주하는 외국상선은 등기를 해야 하고, '부표(部票)'를 발급한다; 광주로 와서 무역하는 외국상인에 대하여 상륙하여 거주할 수 없도록 한다. 이들 조치는 주로 외국상선과 상인의 불법행위를 막기 위함이었다.
청나라 건륭22년(1757년) 민해관(閩海關), 절해관(浙海關), 강해관(江海關)의 서양무역을 폐쇄한다. 오직 월해관(粤海關)에서의 통상만 허용한다. "사구통상(四口通商)'이 광주 '일구통상(一口通商)'으로 바뀐 것이다. 적지 않은 연구자들은 이것을 "폐관정책"의 중요내용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광주 한곳만 개방하여 통상하도록 제한했지만 서방각국상인들이 나머지 세 항구로 가서 통상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 또한 중국인들이 바다로 나가 무역하는 것도 금지하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육로무역도 대외교류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중러육로무역을 예로 들면, 옹정6년(1728년), <카흐타조약>의 규정에 따라, 카흐타, 네르친스크를 쌍방무역지점으로 삼는다; 건륭제 중엽, 중러무역은 카흐타 한 곳으로 집중시킨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위의 조치를 보면, 완전히 자급자족의 소농경제라는 보수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사실상, 전통적인 자연경제는 마찬가지로 완전히 시장거래를 떠날 수가 없었다). 주로 국가안전에 대한 고려때문이었다. 건륭제는 이에 대하여 명확히 설명한다. "나와 같은 족속이 아니면 마음이 반드시 다르다(非我族類, 其心必異), 이익이 있으면 사단이 쉽게 발생한다." 청나라통치자가 보기에, 대량으로 밀려오는 서방인들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관리통제를 강화하고 집중관리하는 것이 만의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사태를 막고 피하여, 정부통치와 사회안정에 위기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한관(限關)"과 동시에, 명나라중후기, 청나라중전기에는 정부가 해상육상변경(대외)무역수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정책을 시행한다. 명나라 중후기, 동남연해, 북부장성에서 요동일대에는 경제가 번영하고, 중국인과 외국인이 혼거하는 변경사회가 형성된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 명나라정부는 1558년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에 이르는 해상항로를 금지한다. 1567년에는 해금을 완화하여, 장주부(漳州府) 월항(月港)의 민간해외무역을 허용한다. 1570년이후, 북부와 동북지구의 대동, 장가구, 개원, 무순등지에 연이어 '호시(互市)'가 개방된다. 최종적으로 내지 - 변경 - 조선 - 일본 - 동남아의 방대한 무역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대만을 수복한 후, 청나라는 1684년 개해(開海)하여, 적극적으로 해외무역정책을 실시한다. 1717년 준가르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다시 남양에 대한 해금을 실시한다; 1727년 다시 남양을 연다, 그후 동양과 남양의 무역은 청말까지 지속된다. 18세기의 광주는 글로벌해상무역항로에서 중요한 환적항이 된다. 광주에서 출발하여 말라카해협, 손다해협을 지나 인도양의 각지로 가고 다시 희망봉을 거쳐 유럽까지 간다. 멕시코의 아카풀코에서 필리핀의 마닐라로 가고, 다시 하문과 광주로 간다.
그외에, 명청통치자는 서양과기와 문화에 대하여 '그 기능은 선별하여 취하되, 그 학술은 전하는 것을 금한다'는 태도를 취한다. 명청교체기에 중국과 서방과학문화의 교류는 주로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다. 마케오리치부터 예수회가 중국선교의 두 가지 기본전략이 확립된다: 하나는 유학을 학습함으로써 중국풍속을 존중하고, 중국인의 문화적 저항과 배척심리를 감소시킨다; 다른 하나는 서방과학문화를 소개함으로써 중국조정과 사대부의 지지를 받아낸다. 이런 전략은 천주교전파와 중서과학기술문화교류를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명말과 청초에 아주 분명한 효과를 낸다. 강희연간에 중국으로 온 선교사 조아킴 부베(白晋)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 세기 이래의 경험으로 사람들은 인식하게 되었다; 중국에 기독교를 들여오고 전파하려면, 과학을 선전한느 것이 일체의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현재까지, 하나님은 모든 선교사들에게 이런 수단을 운용하도록 했다. 오늘날, 하나님은 마치 더욱 분명하게 사람들이게 이후 과학으로 중국의 이교, 사도를 배척하도록 운용하라고 하는 것같다."
다만, 강희말년에 이르러 형세는 급변한다.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교황청이 중국신도들에게 제사를 금지시킨 것이다. "선교사들은 여하한 경우에도 기독교도는 일년에 여러번 행해지는 공자제사, 조상제사의 융중한 의식을 주재하거나, 참여하거나 출석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제사는 미신적인 색채를 지닌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중국문화의 핵심가치와 충돌하는 것이었다. 강희제는 명확하게 말한다: "중국은 이천년동안, 공자의 학문을 봉행해왔다." 옹정제는 선교사 갈대도(葛大度)를 접견할 때, 다시 한번 말한다: "우리는 너희의 종교때문에 수천년 역사가 있는 유학을 포기할 수 없다." 청나라조정과 로마교황청간의 그후 격렬한 문화충돌이 발생하고, 강희제는 1717년 천주교당을 '공묘(公廟)'로 바꾸는 것을 비준하고, 선교사는 모조리 강제출국당하고, 천주교는 중국내에서의 전파를 금지당한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전국에서 대규모로 서방선교사축출이 일어난다. 그들을 마카오로 보낸다. 그 출발점은 국가안전에 대한 우려와 밀접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옹정제는 직접적으로 선교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모든 중국인들을 기독교도로 만들고자 하지만, 이는 너희 종교의 요구이고, 짐은 그 점을 아주 잘 안다. 다만 이런 상황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너희 국왕의 신민이 되어야 하는가? 너희가 배양한 기독교도는 너희만 인정한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은 너희의 명령만 따를 것이다. 짐은 알고 있다. 지금은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을. 다만 수천수만의 선박이 왔을 때는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여기서 지적해야할 점은 천주교전파를 금지한 것은 중서과학문화교류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청나라전기, 서방종교는 중국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가졌다. 서방선교사들이 비밀리에 선교하는 상황도 드물지 않았다. 청나라조정은 서방의 선진과학기술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건륭제때, 기윤(紀昀)등은 서학정책에 대하여 논의할 때 이런 말을 한다: "구라파사람의 천문학 계산의 비밀, 장인들의 제작의 정교함은 실로 전고(前古)를 뛰어넘습니다. 그들의 논리의 괴이함, 과장됨은 이단적인 면이 강합니다. 우리는 그 기능을 선별하여 취하고, 그 학술의 전파를 금지하여, 깊은 뜻을 두루 살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기능을 선별하여 취한다"는 것은 선택적으로 서방의 선진과학기술을 학습하고 흡수하는 것으로 주로 서양천문역산과 제조기술이 그에 해당한다. 다만 실천에서, 청나라조정은 서방선진과학기술에 우려가 있어서, 이런 사상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 '그 학술의 전파를 금지한다'는 것은 주로 천주교 전파를 금지한다는 말이다. 당연히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학술'은 당시 서방의 선진적인 이데올로기 예를 들어 계몽사상등이 포함된다. 다만 선교사들은 그것을 중국으로 가져오지는 않았다. 청나라정부도 그런 사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확실히, 명청조정은 중서교류에서 취한 초치는 주로 제한적이었다. 완전히 중국의 대문을 걸어잠근 것은 아니었다. "폐관"으로 개괄하는 것은 역사의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다. "한관(限關)"은 자주적인 행위이고, 그 동기는 국토안전, 문화안전을 지키기 위함이고 외부의 습격에 대한 것, 특별히 서방식민침략위협이 있을 때, 취한 방어적 자아보호책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청시기 중앙정부가 취한 것은 '자주한관(自主限關)'의 대외정책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개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떻게 개방할 것인가, 개방범위는 얼마나 넓힐 것인가는 국가주권범위에 속한다. 국내외의 일부 학자들이 간단하게 이를 '낙후'하다고 치부하면서 '야만'스럽다고 비난하고 심지어 소위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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