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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논쟁/폐관쇄국논쟁

<명청시기폐관쇄국신탐>에 대한 몇 가지 의견

by 중은우시 2022. 9. 8.

글: 호문휘(胡文輝)

 

◇ 발표된 시기로 보면, 이 글은 현재 대외정책에 영합하려는 혐의가 있다. 그 의도가 영사(映射, 현재를 역사에 비추어보는 것)에 있으니, 용심불량(用心不良)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구체적인 논술과 견해를 보면, 내 생각에 이 글은 그리 큰 문제가 있지는 않다. 역사학과 그것이 일으키는 영사작용의 두 개는 반드시 등호를 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근대이전의 "폐관쇄국"과 근대이래의 "폐관쇄국"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경제사회에 대한 영향도 완전히 다르다.

 

◇ 근대이전의 "폐관쇄국"은 확실히 '성공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아편전쟁이전에 청나의 대외정책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다. 청나라보다 더욱 전형적인 것은 일본의 도쿠가와막부이다. 그 봉쇄정도는 청나라보다 훨씬 심했다. 다만 반드시 인정해야할 것은 그것이 확실히 300년동안 내부의 안정과 번역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 세계사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기술조건의 제약으로 근대이전의 경제체는 지역성, 국가성을 띄고 있다. 원거리무역은 사치품위주였고, 대외봉쇄 혹은 반봉쇄는 시장과 소비의 주체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반대로, 근대이래의 경제체는 갈수록 세계성, 초국가성을 지니게 되고, 원거리무역에서 일상생활용품까지 포함된다. 대외봉쇄 혹은 반봉쇄는 반드시 시장과 소비주체를 해친다. 쉽게 말하면, 범선의 시대에 '폐관쇄국'은 직접적으로 민생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고, 직접적으로 '침묵하는 다수'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다만 비행기와 컨테이너화물선시대에 '폐관쇄국'은 반드시 우리 모든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 명청시대는 완전한 "폐관쇄국"이라고 할 수 없다. 새로 정의한 '자주한관'이라는 용어도 못쓸 것은 없다. 중국사에서 가장 철저한 '폐관쇄국'은 1950 - 1970년대에 출현한다. 우리가 현재의 대외정책을 관찰하려면, 적당한 비교대상은 마땅히 1950-1970년대가 되어야지, 명청시대는 아니다.

 

◇ 대일(戴逸) 선생은 1979년의 <폐관정책의 역사교훈>이라는 글을 썼고, '폐관쇄국'을 비판한 당대사학의 선봉이다. 아주 농후한 정치적 색채를 띄었으며, 확실히 '개혁개방'을 위해 여론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성격상으로 보자면 역시 '영사사학'의 연장이다. 그 영사의 동기로 말하자면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이라는 글보다는 훨씬 취할 점이 많다. 다만 사학자체로 본다면 더욱 조잡한 논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