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한선제(汉宣帝) 유순(刘询): 중국역사상 최초로 감옥에 갇혔던 황제

중은우시 2024. 6. 12. 19:54

글: 조심방(赵心放)

 

한선제 유순은 서한 중기의 ‘중흥’군주이다. 그는 친정후 관료사회를 정돈하고, 세금을 경감하며, 처벌을 감경했으며, 효과적으로 생산을 발전시켰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대내적으로는 한무제 말기의 사회경제가 쇠락한 국면을 되살려냈고, 대외적으로 한왕조와 주변각족과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한소제, 한선제 시기에 사회가 안정되고, 국세가 흥성한 것을 두고 이 시기를 후대인들은 “소선중흥(昭宣中兴)”이라 부른다.

1. 역사상 최초로 감옥에 갇혔던 황제

유순은 한무제(汉武帝) 유철(刘彻)의 증손자이고, 위태자(卫太子) 유거(刘据)의 손자이다. 유거는 고혹지화(蛊惑之祸)를 당해 일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한다. 성문에 불이 나면 그 재앙은 연못의 물고기에도 미치는 법이다. 태어난지 수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유순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다행히 다행히 명을 받아 고혹사건을 처리하던 정위감(廷尉监) 병길(丙吉)은 그가 무고하게 해를 입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서 감옥안에서 여자죄수를 찾아서 유모로 삼고, 자신의 봉록으로 유순의 의복을 사서입혔다. 그리하여 그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중에 한무제는 고혹지화는 강충(江充)이 위태자 유거를 모함한 음모라는 것을 발견한 후 대사면령을 내린다. 유순은 병길이 자신의 외할머니집에 보내어 길렀었는데, 황족신분이 회복된 후에는 액정(掖庭)에서 자란다. 액정령(掖庭令) 장하(张贺)는 원래 유거의 부하였다. 자신이 돈을 내서 유순이 잘 살 수 있게 해줄 뿐아니라, 공부까지 시켰다.

유순은 성인이 된 후 용모가 당당한 미남자가 된다. 장하는 그를 위해 돈을 마련하여, 허씨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해준다. 허씨집안은 여건이 좋아서, 유순은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총명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며, 여러가지 경험도 하기를 즐겼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관리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74년, 한소제가 병사하고, 그의 뒤를 이은 창읍왕(昌邑王)은 황음무도하여 같은 해 육월에 폐위당한다. 누구를 후임황제로 할 것인지를 오랫동안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병길이 나서서 유순을 추천하고, 곽광(霍光), 장안세(张安世)등 권신들도 동의하여, 유순이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그가 바로 한선제이다.

2. 사회발전을 촉진하는 조치를 취하다.

“문경지치(文景之治)”를 거치면서 국가의 재정은 충실해졌지만, 한무제가 대규모로 대외전쟁을 벌이면서, 국력이 지나치게 소모되었고, 백성들의 고통은 이로 말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소제는 휴양하면서 생산에 주력하여 전기가 마련되었고, 한선제가 등극한 후에는 다시 생산발전에 유리한 여건들을 창조하는데 주력한다.

그는 여러번 조서를 내려 세금을 감면해주고, 인구세를 감소시켜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예를 들어, 재해가 닥친 해에는 빈민구제에도 주력했다. 고향을 떠난 유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공전을 그들에게 제공하여 농사를 짓게 한다. 양식과 씨가 없으면 관청에서 빌려주었고, 인구세를 면제했다. 대출해준 씨와 양식도 자주 감면해주었다. 당시 소금가격이 아주 비쌌는데, 백성들의 경제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천하의 소금값을 인하하도록 명을 내리기도 했다.

이전에는 조정에서 대량의 군대를 변방에 배치하였는데, 당시에는 변방의 문제가 줄어들어 여러번 조서를 내려 병마를 줄인다. 그리고 지방관리들이 임의로 백성을 징용하지 못하도록 명을 내린다. 그리고 사자와 관리의 숙식비용도 임의로 올리지 못하게 명을 내렸다.

한선제는 관리의 청렴을 아주 중시했다. 동시에 관리들의 실질적인 곤란을 해결하는데도 신경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층관리들은 일은 많이 하지만 급여가 너무 적다. 백석이하의 봉록을 받는 하급관리들에게는 일률적으로 50%인상하도록 명을 내린다. 일련의 관료사회정돈조치를 취한 다음, 한선제시대에는 비교적 청렴한 관리가 많이 나온다. 그리하여 백성들로부터 호평을 받게 된다.

형옥(刑狱)은 직접적으로 천하인의 안위와 사회의 안정에 관련된다. 그는 군수들에게 명을 내려, 간사한 관리가 법률조문의 헛점을 이용하여, 판결시에 마음대로 처리하고, 사실을 날조하여 죄를 만드는지 여부를 엄격히 조사하고, 만일 그러한 자가 발견되면 절대로 기용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그는 또한 옥리를 감독하는 조치를 취하고, 감옥내에서 죄수를 괴롭히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며, 사람을 보내어 각지를 순찰하고, 각지의 억울한 사건이나 백성들을 해치는 지방관을 고발하게 한다.

3. 서역제국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다

한나라때 서역을 경영하는 것은 한무제때부터 시작된다. 다만 서한왕조의 서역제국에 대한 통제가 확립된 것은 한선제때이다.

장건(张骞)이 서역과의 길을 열고, 이광리(李广利)가 대완(大宛)을 점령한 후, 서한은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서쪽으로 “돈황(敦煌)에서 염택(盐泽)까지” 역참을 세우고, 윤대(轮台), 거리(渠犁) 두 곳에는 수백명을 파견하여 둔전(屯田)하게 하고, 사자교위(使者校尉)를 책임자로 내보낸다. 둔전의 목적은 주로 비단길을 오가는 서한의 사절단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기, 서역각국은 수시로 흉노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시로 서한에 복속하다가 다시 흉노에 의탁하기도 했다.

한선제가 친정한 후, 흉노는 날로 허약해졌다. 그 기회를 잡아 적극적으로 서역을 경영하기 시작한다. 그는 시랑(侍郎) 정길(郑吉)로 하여금 형을 면제받은 죄수들을 데리고 거리로 가서 둔전을 하여, 식량과 풀을 쌓아, 거사(车师)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4년간의 노력끝에 효과를 크게 거둔다.

비단길은 서역에서 남도, 북도가 있다. 기원전64년 한선제는 조서를 내려 정길을 위사마(卫司马)로 승진시켜, 선선(鄯善) 서쪽의 남도의 호위를 책임지게 한다. 기원전60년, 흉노의 일축왕(日逐王)이 이끄는 무리가 정길에게 투항한다. 이렇게 하여 흉노의 서역에 대한 위협은 기본적으로 제거되었다. 한선제는 정길로 하여금 남도와 북도의 호위를 함께 책임지도록 하면서 명칭을 도호(都护)라 한다. 서역도호의 설치는 오늘날 발카시호수동쪽, 남쪽의 광대한 지역이 이미 서한왕조 강역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낭만적인 고사성어 “고검정심(故剑情深)”의 유래

곽광이 살아 있을 때, 한선제 유순은 곽광의 말에 전적으로 따랐다. 이는 그에게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를 설명하는 것으로는 바로 황후책립이 있다.

당시 조정대신들은 일치하여 곽광의 딸 곽성군(霍成君)이 황후로 가장 적당하다고 여기고 있었고, 심지어 단체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한선제는 조서를 내려, 한자루의 쓴 적이 있는 검을 찾아오게 한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여 대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했다. 마침내 그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한선제는 자신의 조강지처 허평군(许平君)을 황후로 세우겠다는 뜻이었다.

허평군과 유순은 기원전75년에 결혼했다. 기원전74년에는 나중에 등극하여 한원제(汉元帝)가 되는 유석(刘奭)을 낳는다. 대신들의 추대하에 한선데는 원하는대로 뜻을 이룬다. 법도대로라면 황제의 장인은 제후에 봉해져야 한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았던 곽광은 계속하여 여러가지 이유를 대면서 이를 미루며 시종 허락하지 않는다.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서 ‘창성군(昌成君)’에 봉한다. ‘고검정심’의 고사는 이렇게 하여 후세에 전해지게 되고, 유순은 중국역사에 가장 낭만적인 조서를 남기게 된다.

곽광의 처는 계속하여 딸인 곽성군을 황후에 올리고 싶어했다. 허평군은 다시 임신하여 딸을 하나 낳는다. 곽광의 처는 몰래 여의(女医)를 시켜 약에 손을 쓴다. 허평군은 약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이 발작하여 사망한다. 한선제는 매우 비통해 하면서 그녀에게 “공애황후(恭哀皇后)”라는 시호를 내린다. 곽성군은 마침내 황후에 오른다. 그녀는 아주 발호했으며 돈을 마구 썼다. 허황후가 제창하던 근검걸약, 현덕과는 완전히 배치되었다.

지절2년(기원전68년), 곽광이 사망하고, 유순은 그를 위해 융중한 장례식을 거행한다. 지절4년(기원전66년) 칠월, 곽씨집안의 반란이 미수로 끝나면서 멸족을 당한다. 같은 해 팔월, 한선제는 태자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곽성군을 폐위시킨다. 곽성군은 나중에 자살한다.

한선제는 26년간 재위했고, 전임 한소제의 기초 위에 한단계 더 나아가, 서한의 전성기를 최고조로 이끈다. 한원제가 황위를 승계한 후, 서한왕조는 신속히 내리막길을 걷고, 수십년만에 멸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