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대규(李大奎)
서한(西漢)왕조의 황위계승은 대체로 "입적불립서(立嫡不立庶), 입장불립유(立長不立幼)"(적자를 세우고 서자를 세우지 않는다. 장자를 세우고 유자를 세우지 않는다)의 원칙을 유지했다. 이는 중국고대에 명확히 규정된 적장자승계제도이다.
예를 들어 한혜제(漢惠帝) 유영(劉盈)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황후 여치(呂雉) 사이의 적자이다. 유비(劉肥)는 비록 장자이지만 서출이어서 번왕에 책봉되는데 그쳤다. 유방의 서사자(庶四子) 유항(劉恒)이 나중에 유명한 한문제(漢文帝)가 되는데, 이는 완전히 특수한 상황하에서 군공집단의 옹립으로 "형종제급(兄終弟及)"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경제에 이르러 다시 한번 특수한 상황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한경제의 박황후(薄皇后)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한경제는 기원전153년 19세의 서장자(庶長子) 유영(劉榮)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후계자인 유영은 큰 잘못만 범하지 않는다면, 순조롭게 황제위를 게승할 터였다. 그러나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기원전150년, 한경제는 22세의 유영을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나이 겨우 7살의 서십자(庶十子) 유철(劉徹)을 황태자로 세운다. 그리고 정식으로 유철의 모친 왕지(王娡)를 황후(皇后)로 책봉한다.
왜 그렇게 한 것일까?
유영이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아니면 한경제가 유영에 대해 불만이 생겨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되어서일까?
기실 모두 아니다. 유영은 나이가 많은 점으로 황태자에 오른 후, 법도를 잘 지키며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의 모친 율희(栗姬)는 한때 한경제의 총애를 크게 받았고, 유덕(劉德) 유알(劉閼)이라는 두 명의 동모형제도 있다. 이는 유영의 황태자지위를 더욱 굳히게 해주었다.
한경제는 유영에 대하여 무슨 불만이 없었고, 오히려 그를 아끼며,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주었다.
아쉽게도 유영은 때를 잘못 만났다. 게다가 모친 율희는 두뇌가 단순해서, 황실투쟁의 의식과 수완이 없었다. 그리하여 두차례의 저급한 잘못을 저지른다. 이는 유영이 황제가 되는 운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원래 유영이 19살때 부친 한경제에 의해 황태자에 세워졌는데, 한경제는 그의 모친인 율희를 황후에 책봉해주지 않았다.
그때 율희는 미모에 행동거지도 부드러워 한경제 유계(劉啓)의 총애를 크게 받고 있었다. 그녀의 지위는 박황후에 못지 않았다.
그러나 율희는 "모빙자귀(母凭子貴)" 모친은 아들에 기대어 귀해진다는 원칙대로 황후에 오르지 못한다. 나중에 박황후가 쫓겨난 이후에도 그녀는 황후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 이는 한경제가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녀의 조모인 박태황태후(薄太皇太后)는 한문제(漢文帝)가 서거한 후 가족이 점차 쇠락했고, 박황후가 자식을 낳지도 못하고, 한경제의 총애도 받지 못하자, 점차 후궁내에서 세를 잃어갔다.
한경제의 모친인 두태후(竇太后)는 두씨집단도 외척 박씨집안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여, 오랫동안 후궁을 주재하고, 황실내에서 호풍환후하고 싶어했다.
만일 황태자 유영이 즉위하면, 율씨가족이 반드시 굴기하여 새로운 외척세력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두씨가족은 아마도 날로 쇠락하여 몰락하게 될 것이고, 심지어 전면적인 탄압을 받아 발언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두씨집안에서는 유영이 황제에 오르는 것을 극히 바라지 않았다. 율씨가 외척이 되어 세력을 떨치는 것은 더더욱 바라지 않았다.
모친의 마음을 한경제는 알고 있었다. 어쨌든 효가 중요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황후를 세우는 일은 그저 시기를 기다려셔 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한경제도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꺼렸고, 두씨집안이 독보적으로 황실을 조종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장단점을 이리저리 고려한 후에 율희가 낳은 유영을 황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외척 율씨는 그의 구상대로 정치에 함부로 간여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면 유영의 웅재대략으로 서한왕조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한경제는 계속하여 율희를 황후에 앉히지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이는 그녀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후궁에 조용히 앉아 있으면서 황권을 탐하지 않고, '모의천하'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아마도 권력투쟁의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율희는 그런 기지가 없었다. 후궁투쟁은 너무나 가볍게 보았고, 통찰력도 없었으며, 정치적지혜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황제의 은총을 받아 자신의 장남이 황태자가 되었고, 다른 아들들도 약하지 않다는 생각에 맹목적인 자신감이 넘쳐나게 된다. 그리하여 교횡발호(驕橫跋扈)하며, 유아독존격의 우월감을 떨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일은 완전히 확정되기 전에는 여러가지 변수가 있는 법이다. 생각한 것처럼 안전하고 공고하지 않을 수 있다. 암조용동(暗潮湧動)의 분쟁국면에서 통찰력을 잃고 멍청한 짓을 하게 되면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좋았던 국면은 사라지고, 나락에 빠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황태자 유영의 폐위도 그러했다.
그의 모친인 율희는 황권투쟁은 생사가 걸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승리하기도 전에 미리 도취해버렸다.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는 아름다운 꿈에 젖어 스스로를 마비시켜버리고 만 것이다.
실제로, 유영이 황태자로 세워진 날부터 그녀를 대표로 하는 율씨외척은 꼬리를 말고 조용히 지내야할 뿐아니라 뛰어난 정치적 지혜를 가지고 처세했어야 했다. 반드시 끌어모을 수 있는 역량은 모두 끌어모아서, 한경제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유영이 황제위를 계승하는데 걱정할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쉽게도, "성야소하(成也蕭何), 패야소하(敗也蕭何)"였다. 율희는 여치처럼 시국을 좌우할 지혜와 수완이 없었다. 한경제의 친누나인 관도공주(館陶公主)가 손을 잡아고 했을 때, 즉, 그녀의 딸 진아교(陳阿姣)와 유영을 결혼시키자고 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양가는 정치적 연맹을 달성하고, "흥해도 같이 흥하고, 망해도 같이 망하는" 대국이 형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율희는 관도공주를 무시했다. 게다가 그녀가 한경제에게 여러번 미녀를 바치는 것에 대해 불만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혼사를 거절하고, 관도공주에게 욕설을 했다.
관도공주가 어찌 그런 모욕을 참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바로 한경제의 또 다른 총비인 왕미인 왕지와 손을 잡는다. 그리고 진아교를 당시에는 아직 교동왕(膠東王)이었던 유철과 결혼시키기로 약속한다.
이때부터, 관도공주와 율희는 불공대천의 원수가 되어 상대를 죽여야만 끝나는 싸움을 벌이게 된다. 관도공주는 자주 입궁하여 동생 한경제에게 율희는 자주 다른 후궁들을 저주하고 있다고 얘기하면서, 또한 유철이 얼마나 덕과 재주를 겸비하고 있는지를 언급한다.
한경제는 원래 관도공주와 오누이의 정이 깊었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왕지도 그가 좋아하는 후궁이다. 유철도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나 아주 좋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한경제의 사랑의 저울이 왕지모자에게 기울게 된다. 그러나 한경제는 율희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녀에게도 아주 중요한 기회를 준다.
한경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자주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한경제는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율희를 불러 그녀에게 후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물어본다. 내가 죽은 후, 너는 다른 후궁과 자녀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
율희의 대답은 놀라웠다. 그녀는 한경제에게 말이 불손했을 뿐아니라, 한경제의 다른 후궁들은 돌볼 생각이 없다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이를 보면 율희는 멍청하기 짝이 없다. 무뇌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크게 실망한 한경제는 점점 우려가 깊어진다. 이때부터 율희에게 더 이상 호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녀의 아들인 유영에게도 불만을 가지게 된다. 일단 유영이 황제에 오르면, 모친의 교사하에 유씨집안은 편안한 나날을 누릴 수 없을 것같았다. 다시 한번 여치의 '임조칭제'시대로 돌아갈 터였다.
그 소식을 들은 왕지는 크게 기뻐한다. 즉시 율희의 편에 선 대신을 부추겨서, "자이모귀(子以母貴), 모이자귀(母以子貴)"를 내세워 황제에게 율희를 황후로 봉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리게 한다
화가 나있던 한경제는 대노한다. 율희가 그에게 맞서는 것이라 여기고, 즉시 진언한 대신을 죽여버리고, 율희를 냉궁에 넣어버린다. 그리고 유영을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임강왕(臨江王)으로 봉한다.
삼개월후, 한경제는 왕지를 황후로 책봉하고, 7살짜리 유철을 황태자로 세운다. 그가 바로 나중의 한무제(漢武帝)이다.
유영은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디가 칼을 맞은 셈이 되었다. 그는 번왕으로 격하된 후, 비록 열심히 살았지만 처지는 곤란했다. 얼마 후 함부로 궁전을 지었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어 한경제에 의해 황궁으로 불려와 심문까지 받는다. 혹리 질도(郅都)가 고문을 하며 자백을 강요하자 그는 자살하고 만다.
유영의 처지는 안타깝다. 그의 모친 율희는 정치적으로 미성숙했고, 황태자였던 유영은 무고하게 피해를 입는다. 그는 폐위되었을 뿐아니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만일 유영이 황제에 올랐더라면, 한무제가 영토를 개척하는 위업은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스쳐지나간다. 아마 그것도 운명이 정한 것인지 모르겠다.
유영은 부친 한경제의 위업을 넘겨받지 못했고, 오히려 동생 유철은 후세의 역사에 크게 이름을 남기는 전설을 이룬다. 그저 그것만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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