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채신곤(蔡愼坤)
18대에 만일 쌍리(雙李, 리커창과 리위안차오)가 승계하였더라면, 중국의 정치민주화와 경제시장화는 아마도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17대이전에 리커창(李克强), 리위안차오, 시진핑(習近平)은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서 있었다. 단지 최종적으로 장쩌민, 쩡칭홍이 시진핑을 선택했고, 리위안차오는 18대에 정치국상위에도 들어가지 모사고,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국가부주석을 1기 지내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린다. 19대이전에, 당내에서는 리위안차오가 "기꺼이 은퇴방안을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돌았고, 19기 1중전회가 폐막하기 전에 중앙판공청은 그에게 이렇게 통지한다. 당중앙은 그가 은퇴이후 생활지로 난징 혹은 상하이를 선택하겠다는 청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리위안차오는 할 수없이 베이징에서 은퇴후 생활을 보내야 했다.
18대이전에 당내와 사회각계에서는 보편적으로 중앙조직부 부장인 리위안차오가 정치국상위에 들어가 당무와 조직인사업무를 관장하는 것이 확정적이라 여겼다. 이는 이전의 쩡칭홍(曾慶紅) 모델이다. 쩡칭홍은 중앙조직부 부장을 지낸 후, 정치국상위가 되어 당무와 조직인사업무를 관장했었다. 그러나, 18대에 당무와 조직인사업무를 넘겨받은 사람은 중앙선전부 부장 류윈산(劉雲山)이었다.
리위안차오가 중앙조직부 부장을 맡고 있는 동안 적지 않은 사상이 활발하고 양호한 교육을 받았으며 상대적으로 개명화된 관리들을 발탁 기용했다. 그중 많은 관료들은 시진핑이 좋아하지 않는 유형이었다. 시진핑은 지청(지식청년)을 지내고, 정규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을 좋아했다. 리위안차오는 임기동안 "천인계획"을 추진했고, 중앙과 지방간부의 교류도 실시하고, 덕망과 재능을 겸비한 우수한 관리들을 하버드대학 케네디정치학원에 연수를 보내어 교육받게 하여, 여러 방면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리위안차오의 개명한 이미지는 보수세력의 불만을 사게 된다.
리위안차오가 공청단중앙서기처 서기를 맡고 있을 때, 그가 주관한 <중국청년보>는 아주 활력이 있었다. 언론이 대담하며 예리했다. 89년 6.4사건때 <중국청년보>는 학생운동과 학생을 동정하는 글을 실었다. 베이징에 계엄이 선포된 후, 리위안차오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문사로 달려가 각부서책임자를 모아 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안전에 주의하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만일 길거리에서 총소리를 들으면 "즉시 엎드리라"고 말한다.
6.4이후, <중국청년보>는 동란을 선동했다고 지적받는다. 리위안차오는 신문사의 편집기다들을 다독이며 모두 함께 위기를 헤쳐가자고 말한다. 리위안차오의 6.4기간동안의 입장은 보수파로부터 동란에 대하여 "태도가 강경하지 않았다"는 질책을 받는다. 그의 관료로서의 길은 6.4이후 10여년간 정체되어 있었다.
리위안차오는 16대 중앙위원 예선에서 탈락한다. 그리하여 부득이 중앙후보위원에 머물러야 했다. 그후 쩡칭홍은 사적으로 리위안차오, 류옌둥(劉延東), 리톄린(李鐵林)등 "태자당" 그룹을 모아놓고 반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6대개최이전에 리위안차오를 장관성장급의 직위에 올려놓지 않은 것은 나의 중대한 실수이다.
쩡칭홍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당시 장쩌민, 쩡칭홍과 후진타오가 리위안차오를 배양하는 문제에서 거의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위안차오와 류옌둥은 마찬가지로 홍얼다이(紅二代)이면서 단파(團派)였다. 류옌둥의 부친 류뤼룽(劉瑞龍)은 장쩌민의 친숙부이자 의부인 장샹칭(江上靑)이 입당할 때의 소개인이다. 리위안차오의 부친은 쩡칭홍의 부친과 관계가 남달랐다.
장쩌민은 80년대에 상하이에서 일할 때, 리위안차오의 부친 리깐청(李干成)이 시정협부주석과 상하이시위고문을 맡고 있었다. 리깐청과 장샹칭은 항전이전에 상하이에서 국민당의 감옥에 같이 갇혀 있었고, 항전초기 같이 장쑤 안후이지방에서 항일근거지를 창건했다. 장쩌민은 리깐청을 부친뻘로 대우했다. 후진타오는 리위안차오를 중시했다. 원인은 당연히 '단파'이기 때문이다. 리위안차오는 대학졸업후 1년이 되지 않아 관직이 부청장(副廳長)급에 이르고, 나중에 정청장(正廳長), 부부장(副部長)이 된다. 리커창의 경력과 거의 완전히 같다.
1980년대초에 리위안차오와 동시에 단중앙서기처에들어간 홍얼다이로는 류옌둥, 천하오쑤(陳昊蘇)와 허광웨이(何光偉)가 있다. 뒤의 두 사람은 자신이 '홍얼다이'라는 신분을 내세워, 계속하여 후진타오와 힘겨루기를 벌였다. 1985년 후진타오가 중앙조직부로 들어가 상무부부장을 맡지 못하고, 꾸이저우로 내려간 것은 바로 이 두 명의 '홍얼다이'가 보이보(薄一波)에게 가서 후진타오에 대하여 나쁘게 말한 결과이다. 그러나, 같은 '홍얼다이'이지만 리위안차오와 류옌둥은 후진타오의 업무를 묵묵히 지지해주었다.
후진타오가 14대이후 당무를 관장하자, 천하오쑤와 허광웨이는 주변으로 밀려난다. 리위안차오는 중앙후보위원의 신분으로 장쑤성위서기를 맡는다. 그때 후계자는 시진핑, 리커창과 리위안차오 세 명으로 좁혀져 있었다.
16대가 개최되기 전에 그들 3명은 성위서기를 맡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리위안차오는 후이량위(回良玉)의 자리를 넘겨받아 장쑤를 떠나 중앙정치국위원 겸 국무원부총리에 오른다. 시진핑은 장더장(張德江)의 자리를 넘겨받아 정치국위원으로 승진하며 광둥성위서기가 된다, 리커창은 천꾸이위안(陳奎元)의 자리를 넘겨받아 정협부주석이 된다.
리위안차오의 출신과 업무경력은 그가 '홍얼다이'와 '단파'의 이중색채를 지니고 있는데다가 더더구나 '북경대학'의 덕까지 보고 있으므로, 후진타오는 당연히 리위안차오를 밀어주었다. 그러나, 18대 정치국상위에 단지 리커창만 남고 나머지 인선은 모두 장쩌민파가 점거한다. 즉, 18대로 후진타오는 몰락의 길을 걸은 것이다. 비록 보시라이(薄熙來)를 저격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사람들까지 밀려나게 된다. 이는 시진핑이 나중에 헌법을 수정하고 단파를 청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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