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북낭(西北狼)
청나라때의 명사연구자인 부몽린(傅夢麟)은 원나라말기 농민반란을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원나라를 망하게 한 자는 바로 방국진이다(亡元者, 國珍也)"
그렇다. 부몽린이 보기에, 원나라에 가장 크게 해를 끼친 자는 진우량(陳友諒)도 아니고, 장사성(張士誠)도 아니며, 더더구나 주원장(朱元璋)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나라말기 난세에 존재감이 별로 없는 소군벌 방국진이었던 것이다.
더욱 이해되지 않는 점이라면, 반원의 기치를 가장 먼저 들었던 방국진은 원말의 난세를 무사히 넘기고, "명태조 주원장의 통치하에 말년을 편안하게 보내면서, 자손을 보호하고, 부귀복록을 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강남백만병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주원장이 왜 유독 자신과 천하를 쟁패했던 효웅 방국진만은 살려준 것일까?
- 해양:반란의 온상
방국진은 오늘날의 절강성(浙江省) 태주(台州)지구에서 태어났다. 자고이래 절강지구는 칠산이수일분전(七山二水一分田, 7할이 산이고 2할이 물이며, 경작지는 1할밖에 되지 않는다)이다. 경작지가 부족하여 백성들은 부득이 해양으로 나아가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진(秦)나라때, 이 지방에는 동해외월(東海外越,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때 백월족은 진나라에 복속한 내족과 복속하지 않고 바다로 나간 외족으로 나뉜다. 어떤 학자는 이들이 유구, 대만, 큐슈남부등으로 갔다고 본다.)이라는 해민(海民)집단이 나타난다. 그들은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생활하며, 편호(編戶)에 들어가지 않는다. 정부는 그들에게 세금을 거둘 수 없을 뿐아니라, 요역도 시킬 수 없었다. 이처럼 정부의 관리를 받지 않는 부류들을 역대 대륙의 통치자들은 심악통절(深惡痛絶), 즉 극도로 미워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민절(閩浙, 복건 및 절강)일대의 궁산악수(窮山惡水)는 자연스럽게 백성들에게 중앙정부에 대항한 기반을 마련해준 것이다. 다만, 마찬가지로, 해양무역이라는 살길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의 백성들은 정치적야심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그들의 최대한의 정치적 바램은 조정이 해금(海禁)을 개방하여 그들의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해주고, 그들을 너무 심하게 괴롭히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다만 대다수의 시간동안, 대륙의 통치자들은 이 정도의 정치적 바램마저 만족시켜주려하지 않았다. 진시황이 죄수를 이주시켜 동외월을 막았다. 이때부터 만청통치자들의 천계금해(遷界禁海), 폐관쇄국(閉關鎖國)에 이르기까지 대륙통치자들은 이들 화외지민(化外之民, 통치에서 벗어난 사람을 가리킴)에 대하여 수천년동안 일관되게 악의를 가지고 있었떤 것이다. 역대왕조에서 이들 해민에 대한 태도가 가장 우호적이었던 왕조는 몽골인이 건립한 원(元)나라라고 할 수 있다.
남송(南宋)말기 동남연해일대에 두 명의 해적두목이 있었따. 바로 주청(朱淸)과 장선(張瑄)이다. 두 사람은 모두 사염판자(私鹽販子, 소금밀매업자) 출신인데, 남송정부의 단속으로 부득이 바다로 나가서 해적이 된 것이다. 결국 연해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무장세력이 되고, 전성기때는 전선(戰船)이 500척에 달하게 된다.
원태조는 남송을 멸망시킨 후, 동남일대의 식량을 대도(大都)로 운송해야 했다. 정강지치(북송멸망)이후, 남북은 백여년간 분열되어 있었고, 게다가 황하가 여러번 물길을 바꾸면서, 대운하는 막혀버렸다. 원나라는 큰돈을 들여 대운하를 수리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해운을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해상운송시스템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배를 만드는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선원을 교육시키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쿠빌라이는 돌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해적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주청, 장선의 해적집단은 이 기회를 잡아 해적일을 그만두고 원나라정부의 남량북운(南糧北運)을 책임지는 임무를 맡는다. 그리하여 조운만호(漕運萬戶)가 되어 일약 관리신분을 가진다.
대원의 해상양식운송은 이렇게 하여 해적들이 참가하여 완성되게 되고, 순조롭게 70여년간 유지된다.
2. 염판수국문(鹽販守國門), 해도사사직(海盜死社稷)
항간에 이런 말이 있다: 시작한 곳에서 끝을 본다. 운명은 나중에 원나라에서 반전을 맞이한다.
지정8년(1348년), 방국진이라는 소금밀매업자가 원나라정부로부터 수배를 당하게 되면서, 주청, 장선과 같은 길을 걷는다. 바다로 나가 '창업'한 것이다.
이때는 원나라말기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3년전이다. 원나라정부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 태평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방국진은 반원의 첫번째 기치를 내건 셈이다. 나중에 주원장은 이 일을 가지고 방국진을 놀렸다: "네가 거사할 때는 원나라가 아직 태평했는데, 천하에서 누가 감히 어지럽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네가 바다에서 병력을 일으켰을 뿐이다."
누가 알겠는가. 당시 절강연해의 백성들은 이미 도탄에 빠져 있었다. 원정부는 통치에 게으르고, 지방호족의 세력은 크게 팽창하였으며, 그들은 백성들을 수탈했고, 온갖 나쁜 짓은 다했다. 다른 지역의 백성들은 아직 이만 악물고 있는 수준이지만, 경작지가 원래 부족한 절강동부지역의 백성들은 이미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당시 연해의 촌락에 살던 백성들은 모두 마을 입구에 깃발을 내걸었는데, 그 위에 이런 타유시(打油詩)가 한 수 쓰여 있었다:
천고황제원(天高皇帝遠)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다.
민소상공다(民少相公多) 백성은 적은데 뜯어먹는 관리는 많다.
일일삼편타(一日三遍打) 하루에도 세번이나 빼앗아가니
불반대여하(不反待如何)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기다려서 무엇하겠는가.
다만 이 지방의 백성들은 다른 지방과 달랐다. 다른 지방에서는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대도를 향해 쳐들어가거나, 최소한 성과 도시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그러나 절강동부의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키면 바다로 달려간다. 방국진의 말에 따르면, "혹리들이 양민을 괴롭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일가족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 차라리 바다로 나가는 것이 계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위 방국전이 반기를 들 때 원나라가 태평했다는 것은 순전히 환각이라 할 수 있다.
'
단지 당시의 연해의 백성들은 내륙으로 가서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그래서 국면이 아직 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실제로는 일찌감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절강동부의 혼란한 상황을 원나라조정은 매우 우려했다. 이들 난민은 홍건군보다도 훨씬 무섭다. 그들은 해로운송을 차단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조정은 물자가 부족해진다.
그리하여 강소, 절강, 복건일대의 원나라해군은 여러번 방국진을 소탕하러 나선다. 그러나 연전연패했다. 매번 패전하고나면 할 수 없이 방국진을 초안(招安)하면서 그에게 위국공(衛國公), 태위(太尉), 강절좌승(江浙左丞)같은 작위와 관직을 내렸다. 그렇게 방국진을 다독여서 잠시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막곤 했다.
그러나 몇번을 패배했든간에 방국진같이 국가명맥위에 웅거하고 있는 거구(巨寇)는 조정에서 온갖 방법을 강구해서 제거하려 하게 된다. 이건 협상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어쨌든 조정에서는 "위로는 공경사대부로부터 아래오는 부리서도(府吏胥徒)까지, 매년 해운이 늦고 빠르고, 풍성하고 부족하고, 순조롭고 막히고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며 근심하고 안심해야했다."
1351년, 원나라가 다시 한번 방국진을 소탕하려 할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천하가 대란에 빠진다. 조정은 방국진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방국진은 그 기회를 틈타 절강동부연해의 명주(明州, 지금의 영파), 온주(溫州)와 태주(台州)를 점령한다. 근거지를 확보한 후, 방국진은 그곳을 발전시킨다. 그는 해상무역을 진흥시키고, 하도(河道)를 수리하며, 세금을 균등하게 하고, 제방을 쌓았으며, 학교를 짓고, 왜구를 막았다. 확실히 그는 좋은 일을 적지 않이 많이 했다.
이때 그의 부하중 장자선(章子善)이라는 모사가 있었는데, 그가 제갈량의 융중대같은 전략을 제시한다:
"지금 호걸이 일어나서, 분열의 모습이 나타났다. 족하께서 들고 일어나면 천척, 백척의 배와 수십만의 무리가 모여들 것이다. 이들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남북을 끊어버릴 수 있고, 조운의 운송을 막을 수 있다. 배를 사방으로 보내면 청서, 요해, 민광, 구월을 모두 장악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인심이 따라올 것이니 패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국진은 자신의 실력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 자신은 동아시아 최대의 해군역량을 장악하고 있다. 연해지방을 종횡하는 것은 자유자재로 가능하지만, 그의 역량으로는 내륙 깊숙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왜 그런가? 이유는 사대부계층이 그를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국진도 거사초기에 가식적으로 선비, 사대부들을 후대하는 자태를 보인 적이 있다.절강의 명사인 달해(達海)와 조유항(趙惟恒)이 막료로 들어와서 보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방국진을 멸시했고, 인신공격하며 모욕하기까지 했다. 방국진은 대노하며 이들 두 사람을 강물에 빠트려죽인다.
이런 거동은 금방 사대부계층에 퍼져갔다. 지식분자는 그를 호랑이보듯 대했다. 특히 그의 관할구역하에 있넌 청전(靑田)의 진사 유백온(劉伯溫)은 여러번 원나라관군을 이끌고 방국진을 소탕하러 나선다. 방국진이 살아있는 제갈량이라는 유백온을 당할 수는 없었다. 전투에서 패배했고, 하마터면 다시 바다로 쫓겨날 뻔까지 한다. 나중에 원나라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쳐 겨우 유백온을 감옥에 갇히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방국진은 자신의 위치를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천하를 다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보경안민(保境安民, 자신이 있는 곳을 지키면서 백성들을 안정되게 살도록 한다)하면서 진짜 군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원나라조정에서 반군을 토벌하는 선봉인 유백온을 하옥시킨 것은 뇌물을 받았기때문이라는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나라조정의 골치거리를 해결하려면 방국진의 역량을 빌려야하기 때문이었다.
원나라말기에 반란이 크게 일어난 후, 또 다른 소금밀매업자인 장사성이 오늘날의 강소일대이 식량생산지를 점거했다. 그리하여 원나라의 동남지역의 양식공급이 끊어지게 된다. 이건 방국진보다 원나라조정에 훨씬 큰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1354년, 원나라는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해서 장사성을 토벌한다. 원나라의 토토(脫脫)은 백만대군을 이끌고 이 소금밀매업자를 고우성(高郵城)에 가두고 포위한다. 마무리가 눈앞에 왔는데, 바로 이 때 원나라조정 내부에 갈등이 폭발하여 토토가 체포되고, 원나라군대는 대장이 교체된다. 토토계열의 군대는 자동작으로 해산하고, 장사성은 그 기회를 틈타 원군을 대파하고, 원나라말기의 중요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후 장사성은 잘못된 선택을 한다. 그는 원나라를 쫓아내는데 힘을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3년후 원나라조정과 상호침범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달성한다. 그리고 매년 원나라에 20만담(擔)의 양식을 제공하기로 약속하여 원나라조정이 목숨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장사성이 이처럼 이해되지 않는 결정을 내린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그의 점령지에서의 통치방식은 원나라때와 똑같았다. 즉 소정부대사회의 방식이다. 지방호족들을 방임했다. 그래서 장사성이 죽은 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동오(東吳)식의 정권은 확장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호족들은 쁘띠부르조아의식은 있지만, 대국굴기의 생각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고우성전투에서의 승리는 완전히 원나라조정내부의 내분으로 인한 것이고, 장사성은 그들을 격퇴했지만, 격멸하지는 못했다. 원나라군대가 다시 수습하여 쳐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 뒤에 원나라는 권토중래했고, 한때 장사성은 매우 낭패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동안 방국진은 남쪽전선에서 원군을 도와 장사성을 공격했고, 칠전칠승을 거둔다.
장사성은 생각했다. 어쨌든 천하를 쟁패할 욕심이 없는데, 싸우긴 뭘 싸우는가. 서로 악수하고 화해하는 것이 좋겠다. 양식문제가 해결되었는데, 운송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알아야할 것은 장사성이전에 원나라의 해상운송계통은 이미 방국진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몽골인들은 방국진에게 부탁해야 했다.
원나라가 1368년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두 소금밀매업자의 공로이다. 그리고 주원장이 강산을 차지할 수 있었떤 것도 이 두 사람의 공이 크다. 생각해보라. 만일 그들이 원나라와 합의를 달성하여 원나라를 안정시키지 않았더라면 원나라조정은 분명 만사를 제치고 남하아여 반군과 죽어라 싸웠을 것이다. 그후 14년에 걸친 기간동안 북방에서 그저 내부투쟁에만 골몰하지 않고. 일단 원군이 남하했더라면, 이들의 바로 옆에 있던 주원장이 성장할 수 있었겠는가.
3. 대명의 바다를 책임지다.
나중에, 주원장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이들 두 사람의 좋은 시절도 끝이 난다.
장사성은 따로 얘기하지 않겠다. 그는 주원장에게 붙잡힌 후 바로 죽임을 당한다. 그의 수하였던 호족들도 금방 대국굴기가 없이는 소민존엄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방국진은 붙잡힌 후에도 주원장이 그를 죽이지 않는다. 그의 수하인 해적집단도 대명정규군으로 편입시킨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이유때문일까?
그 원인은 방국진이 투항할 때, 그의 수하들은 자유로운 해적생활에 이미 습관이 되어, '왕법'의 관할을 받고싶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섭희대(葉希戴)와 왕자현(王子賢)을 우두머리로 하는 해상저항세력이 형성된다. 해양과 대륙, 해민과 왕권의 갈등이 그들에게서 연속된 것이다.
그런데, 주원장은 바로 대륙주의자이다. 근본적으로 통제불가능한 해양을 끌어안을 생각이 없었다. 이들 귀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심악통절했다. 그리하여 홍무원년, 주원장은 탕화(湯和)를 보내 해적을 소탕하게 한다. 그러나, 결과는 일패도지한다. 탕화는 이번 참패로 명나라초기 공신들에게 작위를 내릴 때, 겨우 2등급의 중산후(中山侯)를 받게 된다.
그후 3년간, 섭희대와 왕자현은 여러번 동남연해를 습격한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추적하여 소탕하려 하였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주원장이 상황을 보고는 판단한다.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역시 전문적인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그리하여 방국진의 조카 방명겸(方鳴謙)을 불러 대책을 물어본다. 너희 일가는 일년내내 바다에서 생활했는데, 이들 왜구(당시 왜구는 일본에서 온 인원외에 중국인들중에서 바다로 나간 자들이 대부분이었다)를 해결할 방법이 없겠는가?
방명겸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방식은 너무 엉터리이다. 해안에 군사거점을 마련하여 방어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대응하느라 피곤하기만 할 뿐 진정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 마땅히 직접 섬에 기지를 건립하여, 해안의 방어초소와 연동시켜 "왜구로 하여금 바다의 문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혹시 들어오더라도 육지에 상륙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주원장이 말한다. 이치는 나도 알겠는데, 해상에 방어배치를 하려면 어디에서 해전에 익숙한 병사들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방명겸의 대답은 이러했다: "구시위장(舊時僞將, 옛날의 반란군장수)"중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보충하시지요.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명나라초기 해전에 뛰어난 '구시위장'이 누가 있는가? 방국진 말고는 아무도 없다.
기실 신군의 핵심장수는 모조리 방국진의 해적집단에서 왔을 뿐아니라, 하층병사들도 "정해후(靖海侯) 오정(吳禎)으로 하여금 방국진의 부하들을 통솔하게 했다. 온주, 태주, 경원(명주) 삼부의 군사 및 난산 수산의 전답이 업쇼는 백성들로 선호(船戶)를 충당했으며 모두 십일만일천칠백삼십인이었다."
대명의 해군은 바로 군복을 갈아입은 방국진의 해적집단이었다.
이 점만으로도 주원장은 방국진을 함부로 죽일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명의 연해는 바로 왜구의 습격으로 혼란에 빠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홍무7년, 방국진이 남경에서 사망한다. 주원장은 직접 찾아가서 절을 하고 애통해 한다. 방국진은 역사상 반란을 가장 먼저 일으키고도 천명을 다할 때까지 살았던 유일한 인물이 된다. 방국진이 이런 경력을 가지게 된 것은 많은 정도로 그가 바다의 비호를 받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군의 소탕아래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는 스스로의 포지션을 잘 알았다. 천하를 쟁패하겠다는 분수에 넘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주원장이 그를 살려둔 가장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찬(倪瓚): 결벽증을 가진 원(元)나라때의 화가 (2) | 2024.12.23 |
---|---|
충선왕(忠宣王) 왕장(王璋): 티벳(西藏)으로 귀양간 고려왕 (0) | 2024.11.01 |
명나라의 영왕(寧王), 원나라의 아릭부케: 후손의 백년후 복수... (3) | 2024.08.24 |
유흑마(劉黑馬): 원나라때 가장 성공한 한인(漢人), 몽골인은 왜 그를 신임했을까? (0) | 2024.08.04 |
동문병(董文炳): 쿠빌라이가 형님으로 부른 한족... (0) | 2024.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