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일주(吳一舟)
1901년초, 청정부는 서방열강의 조건을 받아든다. 그중에는 강력하게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12명의 명단이 들어 있었다: 재의(載漪), 재란(載瀾), 재훈(載勳), 영년(英年), 조서교(趙舒翹), 육현(毓賢), 계수(啓秀), 서승욱(徐承煜), 서동(徐桐), 강의(剛毅), 이병형(李秉衡), 동복상(董福祥)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각각 달랐다. 어떤 사람은 처형당하고, 어떤 사람은 유배를 가고, 어떤 사람은 단지 파직당했으며, 어떤 사람은 전사했다.
서태후는 서안으로 도망치는 도중에 군대에 의화단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의화단은 소탕되었는데, 그 의화단의 고위층들(서태후에 의해 의화단 총지휘관으로 임명된 사람, 혹은 조정에서 의화단을 적극 지지한 대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서태후는 이홍장(李鴻章)등을 대표로 임명하여, 팔국연군과 담판을 진행한다. 외국인들이 내세운 조건은 의화단은 소멸시켜야 하고, 의화단 고위층도 가만히 놔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아주 골치아팠다. 그러나 서태후가 만일 과감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그녀는 북경으로 되돌아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녀는 과감하게 결심을 굳히고 마침내 손을 쓴다. 이것이 바로 서태후가 손을 써야할 때는 손을 쓴다는 것이고, 이 점에서 그녀는 양산박의 사람들보다 대단하다.
1901년 2월,서태후는 명을 내린다. 경친왕 재훈에게 자진(自盡)을 명하고, 육현은 법에 따라 처벌하게 하며, 강의는 이미 죽었으므로 원래 관직을 삭탈한다. 감숙제독 동복상등도 하나하나 처벌을 받는다.
팔국연군은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청나라조정이 단친왕(端親王) 재의와 보국공(輔國公) 재란에 대해 너무 가볍게 처벌했다고 여겼다. 1주일후, 서태후는 다시 명을 내린다. 재의, 재란은 일단 감옥에 수감한 후, 나중에 신강으로 유배보내고, 영원히 사면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한다; 강의는 비록 이미 사망했지만, 유가문화에서 가장 중한 형벌인 부관참시를 한다; 조서교, 영년 두 사람은 자진을 명받는다; 군기대신 계수와 서동의 아들 하나는 북경에서 처형당한다. 이와 동시에 의화단에 반대하다가 처형당한 원창(元昶), 허경징(許景澄)등의 대신들에 대하여도 명예를 회복시킨다.
재미있는 것은 조서교라는 사람이다. 서태후는 그를 아주 보호하고 싶었다. 그러나 팔국연군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고집했다. 서태후가 뒤에서 시킨 것인지, 아니면 조서교 본인이 정말 그렇게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인지 서안의 수백명이 연명으로 그에 대한 청원서를 낸다. 그리고 그 본인도 죽고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태후는 결국 팔국연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조서교를 사사한다.
조서교는 시간을 끌어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찾으려 했다. 그 결과 몇번 자살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형집행을 감독하던 관리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두꺼운 종이에 저급한 술을 적셔서 그의 목구멍에 집어넣는다. 한번 해도 죽지 않고, 두번 해도 죽지 않았다. 조서교의 명은 정말 질겼다. 전후로 5번을 시도한 끝에 비로소 그를 죽게 만들 수 있었다.
같은 죽음인데 그렇게 고생하며 죽는가. 장음환(張蔭桓)은 사형을 당할 때도 대장부였다. 형을 받기 전에 장음환은 부채에 그림을 그려 조카에게 준다. 그림을 다 그린 후에는 소매를 떨치고 형장으로 나간다. 그리고 망나니에게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시원하게 부탁합니다!" 이어서 담담하게 죽었다. 이런 죽음은 체면도 잃지 않고, 존엄도 잃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ㅏ시 주제로 되돌아가서 재훈(청태조 누르하치의 후손)의 죽음을 보자. 재훈은 가족들과 산서 남부의 포주(蒲州)관서에 살고 있었다. 흠차대신 갈보화(葛寶華)가 성지를 가지고 왔다.
갈보화가 도착한 후, 먼저 재훈을 만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떠난다. 갈보화의 뜻은 분명했다. 그냥 장친왕(莊親王)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가 집안에서 고분고분 성지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자신의 목표가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갈보화는 물러나서 방을 살펴본다. 그는 장친왕의 집 뒤에 오래된 고묘(古廟)가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한 빈 방을 선택한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갈보화는 현의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주위를 지키게 하고, 그가 가서 장친왕 재훈을 만난다.
재훈을 만나, 갈보화는 여전히 굳은 을굴로 말한다: "무릎꿇고 성지를 받으라!" 친왕에 있어서 이는 아주 불손한 말이다. 그러나, 재훈은 천천히 꿇어앉는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한 마디 묻는다: "내 목을 원하는 거냐?"
갈보화의 손에는 성지가 들려 있었다. 이건 상방보검이나 같다. 그는 죄신(罪臣)의 물음에는 전혀 대답해주지 않았다. 갈보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재훈은 이미 결과를 알아챈다. 그는 그저 무릎꿇고 성지를 받들 수밖에 없었다. 사사한다는 조서를 다 들은 후, 재훈은 가족들과 작별인사하기를 청했고, 갈보화는 응락한다.
재훈의 아들은 이 소식을 들은 후, 일찌감치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재훈의 두 첩은 공포로 혼절했다. 당시의 장면이 매우 처량했다. 재훈은 조사교처럼 굴지 않고, 가족을 밀치며 갈보화에게 묻는다: "어디로 가서 죽으면 되는가?"
갈보화가 말한다: "왕야께서는 뒤의 빈방으로 오시겠습니까?" 재훈은 그곳으로 따라간다. 대들보에 이미 밧줄이 걸려 있었다. 그는 갈보화에게 말한다: "흠차대신께서 정말 주도면밀하게 생각해주었군요." 말을 마치자 그는 목을 매어 자진한다.
영년의 죽음을 보자.
그는 담량이 작은 사람이었다. 가족들과 작별하는 날,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그후 그는 서안에 임시로 마련된 형부감옥으로 들어간다. 다음 날, 즉 원단(元旦)에 사람들이 새해를 맞이하느라 바빠서 아무도 그를 보러 오지 않았는데, 그는 하루종일 눈물로 보낸다. 밤새도록 울다가 돌연 멈춘다. 날이 밝았을 때, 그의 하인은 그가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본다. 얼굴은 흙이 가득 묻어있었고, 거의 반죽음상태였다. 이때는, 사사한다는 명령이 아직 하달되지 않았을 때이다. 영년은 미리 놀라서 죽은 것이다. 정말 가련하고 탄식할 만하다.
육현의 죽음을 보자. 그의 죽음도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어쨌든 그는 의화단의 백락(伯樂)이라 할 수 있다. 의화단을 적극지지한 대신들이 하나하나 죽어나갈 때, 육현은 병든 몸으로 유배길을 떠난 상태였다.
그는 도중에 자신의 운명이 좋지 않다고 계속 한탄했다. 그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더욱 나쁜 일이 벌어질 줄은. 그가 아직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목숨을 끊는다는 성지가 도착한다. 육현은 성지를 받고 졸지에 사색이 된다. 이는 이전헤 그가 산서순무로 부임할 때 미쳐날뛰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형장에 오를 때, 육현은 이미 스스로 걸을 수도 없게 된다. 결국 다른 사람이 부축해야 했다. 그날 오후 1시, 육현은 목이 잘린다. 육현은 관리로서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인정할 수 있는 점은 육현이 그래도 청렴했다는 것이다. 죽은 후에도 아무런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염을 할 때는 걸칠 새옷 하나 없었다.
마지막으로 계수의 죽음을 보자.
계주와 서승욱은 함께 북경 채시구(菜市口)에서 처형당한다. 시간은 1901년 2월의 어느 새벽이었다. 계수는 행형명령을 들은 후, 묻는다: "누구의 명이냐?" 망나니가 대답한다: "성지가 서안에서 왔습니다." 계수는 담담하게 말한다: "아, 태후의 뜻이구나, 서양인의 뜻이 아니고.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계수는 정말 가장 우둔한 노재(奴才)이다. 너의 목숨을 거두어가는데 그것이 서양인의 뜻이면 안되고, 반드시 서태후의 뜻이어야 한단 말인가?
서태후가 이들 의화단을 지지하던 대신들을 처리하자, 북경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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