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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능정송(凌禎松): 풍수학파(風水學派) 요편천성파(搖鞭天星派)의 창시자

by 중은우시 2025. 3. 16.

글: 중생평등(衆生平等)

능정송(凌禎松, 1782-1855), 자는 자악(子岳), 강소 오강(吳江)사람. 청나라 가경7년(1802년) 임술과(壬戌科) 진사(進士). <청사고. 예문지> 및 <오강현지>의 기록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음양술수(陰陽術數)를 연구하고 특히 하락리수(河洛理數)와 팔괘구성(八卦九星)의 학문에 정통했다. 어렸을 때는 "술수신동(術數神童)"으로 인근에 명성을 떨쳤다.

능정송은 과거급제후 흠천감(欽天監)에서 일하면서, 영대랑(靈臺郞), 오관정(五官正)등의 직위를 역임했다. 흠천감은 청나라조정에서 천문역법(天文曆法), 지리감여(地理堪輿)를 관장하는 중앙기관으로 직책은 황실의 능침부지선정, 궁궐풍수배치등 중요한 업무가 포함된다. 그는 청나라 풍수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능정송은 재직기간동안 <시헌서(時憲書)>를 편찬하는 일을 주재했고, 후기에 승덕피서산장(承德避署山莊)의 풍수계획과 능침에 참여했고, 그의 전문소양은 가경제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흠천감 우감부(右監副)로 옮겨갔고, "영대청망(靈臺淸望)"이라는 어편(御匾)도 하사받았다.

<청사고>, <소주부지>등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청나라때 저명한 풍수가 능정송이 가경제때부터 도광제초기까지 20여년간, 여러 황제능침의 감여(풍수)업무에 참여했다고 한다. 주요 공적은 두 가지라고 했다:

첫째, 흠천감에 재직할 때의 능침기획

가경7년(1802년) 관직에 오른 후, 능정송은 영대랑, 오관정등의 관직을 맡았고, 전문적으로 황가능침의 부지선정과 배치를 책임졌다. <청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재임기간동안 창릉(昌陵, 가경제의 능)의 후침구역(后寢區域)의 풍수배치를 주재하여 완성했고, '천성이기법(天星理氣法)'을 통하여 새롭게 지궁(地宮)의 방위를 계산하여, 천체운행궤적에 대응하는 시공대응을 확보했다. 이 공사는 현존하는 <창릉지세도>에서 그의 독창적인 '사상오행십이궁(四象五行十二宮)'의 배치이념을 엿볼 수 있다.

둘째, 동릉 능구의 건조

정동릉(定東陵)의 건설에 참여한다. <동릉공정주소당>의 기록에 따르면, 도광초기, 능정송은 명을 받들어, 동릉의 일부 부속건축물에 대한 풍수수정을 진행한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1) 가경13년(1808년), 경릉비원(景陵妃園寢)의 신도(神道) 방향을 조정한다. '관성정향법(觀星定向法)'으로 신도의 협각을 17도로 조정하여 북두칠성의 방위와 맞추었다:

(2) 도광원년(1821년), 유릉(裕陵) 성덕신공비정(聖德神功碑亭)의 기지(基址)를 다시 측정하여, 나침반 28분도법으로 정자의 중축선을 정확하게 측정한다. 그리하여 자미성원(紫微星垣)과 대응관계를 형성하게 했다.

주목할 점이라면, 능정송은 능침기획에서 창조적으로 서양의 천문측량기술을 전통풍수실무에 도입한 것이다. 그의 <요편천성이기서(搖鞭天星理氣書)>에 기재된 '북극성상고(北極星象考)'이론은 일찌기 창릉 지궁의 방위측정에 응용했고, 구진일(勾陳一, 작은곰자리 알파성)의 위치를 관측함으로써 정북방향을 확정했다. 이는 전통적인 '입표측영법(立表測影法)'보다 3분도정도 더욱 정교했다. 이런 다문화의 기술융합은 청나라때 능침영조사에서 중요한 혁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도광3년(1823년), 동릉의 풍수를 정할 때 권신 목창아(穆彰阿)에게 무고를 당하여, '사사로이 황릉의 용맥을 고친다'는 죄명으로 형부삼사회심(刑部三司會審)을 받는다. 비록 아무런 실제증거는 없었지만, 관직을 박탈당하고, 흑룡강성 영고탑(寧古塔)으로 유배를 간다. <적술기(謫戌記)>의 기록에 따르면, "얼음을 깨서 물을 긷고, 황무지를 개간해서 밭을 만들었다. 비록 눈과 서리를 맞았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그 동안 <북극성상고> 3권을 완성한다."

도광15년(1835년) 사면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온 후, 소주의 현묘관(玄妙觀)에서 강의를 한다. 그가 창립한 "요편천성파"는 '별의 모습을 보고 지맥을 알며, 용혈을 판단하여 길흉을 정한다"는 것을 핵심요지로 하며,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청낭오어(靑囊奧語)>와 서양천문술을 결합하여 독득한 감여체계(풍수체계)를 완성한다. <소주부지>의 기재에 따르면, "강소, 절강, 안휘, 강서를 주유하면서 음양택조를 판단했고, 아주 잘 들어맞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강남제일지사(江南第一地師)"로 부른다.

이 유파는 '사상오행십이궁'을 핵심이론으로 하여 '천성이기법'을 창안하였다. 천상을 관찰함으로써 지맥을 알고, "용, 혈, 사, 수, 향'의 5개 요소의 시공이 모두 대응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제자들은 품성을 중시했고, '오덕팦기(五德八忌)'의 문규(門規)를 만든다. 그래서 전수받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풍수계보고>에 따르면, 청나라말기의 명상 증국번(曾國藩)과 그의 동생 증국전(曾國荃)의 저택의 풍수도 그의 재전제자의 손에서 나왔다고 한다.

능정송의 '천성풍수'는 청나라때 풍수의 양대체계중 하나였다. 그의 <요편부(搖鞭賦)>, <삼원총신(三元總新)>등저작은 <사고전서.술수류>에 들어갔고, 지금까지도 홍콩 양공풍수연구회(楊公風水硏究會)의 중요전적이 된다. 2008년, 소주박물관은 평강로에서 능정송의 강학비각을 발견하였는데 ,현존하는 비문 300여자는 도광 요편천성풍수유파의 발전상황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