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예젠잉(葉劍英)가족: 성극이쇠(盛極而衰)

by 중은우시 2020. 10. 26.

글: 장걸(張杰)

 

예젠잉가족은 홍콩, 시진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난세기말, 예씨일가는 남월(南越)을 웅패한다. 홍콩, 마카오의 여러 홍색자본가들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광동에 투자하게 하고, 기술을 도입하며 여러 대형 SOC공사를 추진했다. 그리고 중공을 위하여 홍콩, 마카오의 부호자본가들과의 통전네트워크도 구축한다. 마카오의 카지노왕 스탠리 호(何鴻燊)가족, 헨리 폭(霍英東)가족, 리카싱(李嘉誠)가족은 모두 예씨일가와 빈번하게 내왕했다. 광동현지의 본토세력은 주로 객가(客家), 조산(潮汕), 광부(廣府)의 3대세력으로 나뉘는데, 그중 예씨일가를 대표로 하는 "객가방"의 세력이 가장 컸다.

 

예씨일가는 시진핑일가와의 관계도 밀접하다. 개혁개방초기, 예젠잉은 시중쉰이 광동의 정무를 담당한 최선의 후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시중쉰에게 '남대문을 지키게 하자'고 극력 주장한다. 나중에 시진핑이 정권을 잡고, 군권을 장악하는데에도 예씨일족은 적극 협력한다.

 

중공의 홍색가족은 무수한 정치운동을 겪게 되는데, 피비린내나는 싸움 과정에서, 그들은 혁명의 가장 사악한 일면을 본다. 89년 6.4사태는 다시 한번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자손들만이 조상의 묘를 파헤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족내의 단결외에 가족간에 이익의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국가를 개인재산으로 바꾸고 손바닥위에 놓고 놀게 된다.

 

예젠잉은 아름답고 젊은 여성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그리하여 중공화수(花帥)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는 일생동안 전후로 10명의 여인이 있었는데, 그중 3명의 여인은 명분을 얻지 못한다. 마지막 한 여인은 예젠잉보다 60세가 어렸다.

 

예젠잉의 첫째 부인은 부모간의 포판(包辦)혼인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예젠잉의 둘째 부인은 펑화(馮華)인데, 의료계에 종사했다. 1924년 예젠잉과 결혼한다. 전후로 아들 예쉔핑(葉選平), 딸 예추메이(葉楚梅)를 낳는다. 예추메이의 남편은 전국가부총리 저우자화(鄒家華)이다. 저우자화(추가화)의 부친은 추도분(鄒韜奮)으로 민국시대 유명한 애국인사이다. 30년대 세상을 풍미한 구국회 7군자 중 한 명이다.

 

예젠잉의 셋째 부인은 쩡센즈(曾憲植)이다. 그녀는 아주 예뻐서 중공지도자들의 부인중 으뜸이라 할 만했다. 쩡센즈(증헌식)는 명문집안 출신이다. 고조부는 증국전(曾國荃)으로 증국번(曾國藩)의 아홉째 동생이다. 청나라조정의 1품고관을 지낸다. 일찌기 병력을 이끌고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지금의 남경)을 함락시킨다. 그녀는 예젠잉과의 혼인관계를 여러 부인들 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한 사람이다. 끊기고 이어지면서 10여년간 지속되었다. 그녀는 18살때 예젠잉과 결혼한다. 다만 그녀는 결혼때 예젠잉의 둘째부인인 펑화가 예추메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항전발발후, 쩡센즈와 예젠잉은 몇번 헤어졌다 다시 만나곤 했다. 그리고 예젠잉과의 사이에 예쉔닝(葉選寧)을 낳는다. 다만 그녀는 풍류가 몸에 밴 예진잉이 바로 얼마전에 그녀의 우한분교 학병대 동기동창인 웨이공즈(危拱之)와 결혼했다는 것을 몰랐다. 전쟁때문에 두 사람은 헤어져 있는 기간이 만나서 함께 산 기간보다 길었다. 몇년후 다시 만났을 때, 예젠잉은 다시 새로운 처 우보(吳博)과 결혼했고, 딸도 하나 낳았다.

 

웨이공즈는 예젠잉의 넷째 부인이다. 1936년 예젠잉과 결혼한다. 당시 나이 31살이다. 이 혼인은 1년정도 지속된다. 서안사변후 예젠잉이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냈고, 예젠잉과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던 쩡센즈가 신문에서 예젠잉의 소식을 보고, 서신을 보내 그와 연락한다. 웨이공즈는 친구의 혼인을 깰 수 없어서 예젠잉과 헤어진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현재 <예젠잉전>에 나오지 않는다.

 

우보는 예젠잉의 다섯째 부인이다. 그녀는 원래 신4군의 속기원이다. 두 사람은 1940년에 결혼한다. 당시 예젠잉의 나이 43살이고, 우보의 나이 22살이다. 다음 해에 딸 예샹쩐(葉向眞)을 낳는다. 예샹쩐의 예명은 능자(凌子)이다. 북경영화학원과 중앙희극학원을 다녔다. 예샹쩐의 첫째 남편은 피아니스트인 류스쿤(劉詩昆)이다. '문혁'때 그녀는 중앙희극학원의 '조반파'조직의 홍위병 우두머리였고, 수도예술대학의 '조반파' 지도자였다. 그녀는 '팽진(彭眞)'을 납치하기도 했다.

 

리강(李剛)은 예젠잉의 마지막 명분있는 부인이다. 두 사람은 1948년에 결혼했다. 당시 예젠잉은 51살이고, 화북군사대학 교장이었다. 리강은 군사대학의 학생으로 나이는 겨우 22살이었다. 리강은 예젠잉과의 사이에 아들 예쉔롄(葉選廉)을 낳는다. 1955년, 예젠잉과 리강은 불화로 이혼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1961년 리강은 예젠잉과의 사이에 딸 예원싼(葉文珊)을 또 낳았다.

 

예젠잉의 말년에도 전후로 3명의 여성이 있었다. 그중 마지막 여성은 예젠잉보다 60살이나 어렸다. 다만 이 세명의 여인읜 모두 부인이라는 명분을 얻지 못했다.

 

예젠잉의 아들 세명은 예쉔핑, 예쉔닝, 예쉔롄이고, 딸 세명은 예추메이, 예샹쩐과 예원싼이다. 세 아들 중에는 정치인물인 예쉔핑, 예쉔닝이 있고, 베이징의 플레이보이 에쉔롄도 있다. 세 딸 중에 비교적 조용한 사람은 예추메이와 예원싼이다. 그리고 홍색복장과 군복을 즐겨입는 예샹쩐도 있다. 예씨집안의 손자대를 보면, 남자들은 평범하고, 여자들 중에서는 패션계와 연예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장남 예쉔핑. 1924년생, 소련에 유학했었다. 문혁이 끝난 후 관계로 나아가, 광동성에서 일하며, 부성장이 된다. 1983년, 중공광주시위 부서기, 시장이 되고, 1985년 광동성 성장이 된다. 1991년부터 2003년까지 그는 제7,8,9기 전국정협부주석이 된다. 작년 9월 17일, 그는 광저우에서 병사한다. 향년 95세였다.

 

차남 예쉔닝. 비록 관직은 큰형인 예쉔핑만큼 높지 않았지만, 그는 예씨집안에서 가장 권세있고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중공 홍얼다이의 지도자격의 인물이었다. 예쉔닝은 지모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예젠잉의 유장의 풍모를 갖추었고, 일처리마다 여지를 두고, 막힘없이 해결해나가서 돌파구를 마련하고, 잘 수습했다. 예쉔닝은 문혁때 감옥에 갇힌 적이 있다. 그때 사고로 오른팔이 잘려서 장애인이 된다. 1984년 그는 정식으로 군대에 들어가고, 동시에 카이리(凱利)회사의 동사장 겸 총경리를 맡는다. 이 카이리회사는 바오리(保利)와 나란히 군대를 위해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대형기업이다.

 

1988년, 군에 들어간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예쉔닝은 소장의 계급을 단다. 1990년 예쉔닝은 총정치부 연락부장이 된다. 총정치부 연락부장은 국가안전부, 총참모부 정보부와 나란히 중공의 3대정보기관이다. 예쉔닝은 사람됨이 조용하며, 공공장소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북경 태자당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천윈(陳雲)의 딸 천웨이(陳偉)는 그를 "우리 세대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말했다. 덩푸팡(鄧樸方)은 이렇게 말했다: "나와 쉔닝을 비교하면 그는 하늘 위에 있고 나는 땅 속에 있다." 이를 보면 "여러 태자당은 예쉔닝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진핑이 2010년 군위 부주석을 맡은 후, 예쉔닝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금방 군대를 장악할 수 있었다. 홍콩매체 <전초>는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예쉔닝은 중공총정치부에서 연락부장으로 있는 동안, 일찌기 3천여명의 태자당 구성원을 해외에 유학보내어 스파이로 활동하게 한다. 예쉔닝은 수하의 3천여 복병을 모조리 시진핑에게 넘겨 주었다. 이를 통해 시진핑이 군대를 지휘할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시진핑에게 비밀자료도 넘겨주어, 중공의 모든 역대 상임위원급의 지도자들이 해외에 가진 개인재산명세를 파악하게 해준다. 즉, 예쉔닝의 이런 거동은 시진핑으로 하여금 가볍게 모든 중공지도자들의 뒷목을 잡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덩샤오핑집안에서, 장쩌민집안까지, 쩡칭홍집안에서 저우용캉 집안까지 쉬차이허우집안에서 궈보슝집안까지, 심지어 후진타오, 주룽지 및 원자바오등등. 이는 왜 시진핑이 당내의 위망을 돌연 끌어올렸는지 설명해준다. 아무도 나서서 반대하지 않았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예쉔닝의 무서운 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2008년 타이완에서 천수이벤이 대만독립을 주장할 때, 예쉔닝이 사람을 보내 천수이벤에게 말한다: 타이완에서 누가 권력을 잡든 상관없다. 타이완독립만 하지 않으면 대륙은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천수이벤은 그저 중공이 겁주는 것으로 생각하여 무시한다. 그 결과 예쉔닝은 그가 스위스은행에 오랫동안 잠복시켜놓았던 스파이를 통해 천수이벤가족이 스위스은행에 예금한 증명서를 국민당에 넘겨주고, 이로 인하여 천수이벤의 가족부패사건이 드러나 버리고, 천수이벤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2012년 왕리쥔사건이 발발했을 때, 예쉔닝은 공개적으로 시진핑이 중공18대에서 총서기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18대이후 쉬차이허우를 끌어내리는 반부패행동에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총후근부의 전 정치위원 류위안(劉源)등이 공개적으로 해방군의 반벽강산을 장악한 쉬차이허우에 대들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서 예쉔닝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6년 7월, 예쉔닝은 광저우에서 사망한다. 향년 79세이다. 그의 장례식은 부친 예젠잉보다도 대단했다.

 

삼남 예쉔롄. 1952년생이다. 바오리집단 산하의 카이리회사 동사장 겸 총재를 역임한다. 예쉔롄은 전형적인 경성의 홍얼가이이며 플레이보이이다. 예쉔롄의 첫째부인은 쑤단단(蘇丹丹)인데, 총정치부 문공단의 보막원(報幕員)이다. 그녀의 연예계에서의 지위는 동칭(董卿)과 저우타오(周濤)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쑤단단은 나중에 홍콩으로 이주한다. 둘째부인은 자오신위(趙欣瑜)이다. 그녀는 경성제일명원(京城第一名媛)으로 불렸다. 경성의 고급구락부를 장악했다. 영화드라마게의 거물인 판빙빙, 자오웨이, 장쯔이, 저우쉰등도 모두 그녀를 경외(敬畏)했다.

 

쑤단단이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오신위는 웨이보에서 예쉔롄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공개한다. 그러나 1달도 되지 않아, 그녀는 다시 웨이보를 통해 예쉔닝과 이혼했다고 발표한다. 원인은 또 다른 여자배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쉔롄은 1남2녀를 두었다. 각각 쑤단단이 낳은 예밍쯔(葉明子), 예칭칭(葉晴晴), 그리고 자오신위가 낳은 예더중(葉德中)이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예쉔롄에게는 약간의 사생아도 있다고 한다. 예밍쯔는 현재 홍콩의 저명한 패션디자니어이고, 남편은 유태계미국금융가이다. 예칭칭은 홍콩가수로 시즌3, 중국호성음(中國好聲音) 경연에 참가한 바 있다.

 

예원싼은 예젠잉의 막내딸이다. 그녀가 출생했을 때 큰오빠 예쉔핑은 이미 37살이다. 이들 오누이는 완전히 세대가 다르다. 그녀의 남편은 전 중신회사 동사장, 바오리집단 동사장인 왕쥔(王軍)으로, 왕쩐(王震)의 차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