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그녀는 문혁때 모욕을 참지 못하고 강물이 투신한다. 그의 아들이 종남산(鍾南山)이다.

중은우시 2020. 10. 16. 00:27

글: 이대야(二大爺)

 

1.

 

1957년 9월 21일, 당산철도학원 '마르크스레닌부'의 역사 강사인 '우파'로 낙인찍힌 호사두(胡思杜)는 '자살'한다. 그는 당형인 호사맹(胡思孟)에게 유서를 남긴다:

 

"현재 나는 가족이 없습니다. 오직 형뿐입니다. 제가 남긴 600위안이 돈은..... 형님의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해서 사회주의를 위해 공을 세우기 바랍니다."

 

1948년 12월, 북평(북경)은 이미 포위되었다. 당시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던 호사두는 부모와 함께 타이완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하고 북평에 남기를 고집했다. 그는 "내가 무슨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 후의 운동에서, 가정배경이 부담을 가진 호사두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적극적으로 조직에 가까워지려 하며 사상을 개조하느라 노력했다. 요구하는대로, 홍콩 대공보에 부친과 선을 긋고 관계를 단절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그는 직접 부친을 국민당의 '충실한 주구' '기꺼이 미국을 위해 일한다' '반동계급의 충신이며 인민의 적'이라고 욕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친과의 관계단절도 그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부담만 더욱 가중된다. 성분이 좋지 않으므로, 그는 서른 몇 살에도 결혼을 하지 못한다. 1957년이 대명대방(大鳴大放)때, 그는 적극성을 보이기 위해, 학교의 고위층에 교학개혁에 관한 몇 가지 건의를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순식간에 '우파'로 낙인찍히고, 전체 학교에는 그와 그의 부친을 욕하는 대자보가 가득차게 된다.

 

상황을 파악한 호사두는 환멸을 느끼게 된다. 살아나갈 신념을 잃어버린 그에게 자살은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의 부친은 '호적(胡適)"이라고 한다.

 

2

 

1963년초, 북경대학 철학과의 곽세영(郭世英)은 몇몇 뜻이 맞고 문학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X시사(X詩社)"라는 문예조직을 만든다. 곽세영은 이름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했다: "X라는 것은 미지수를 말한다" 당시 고압적인 사회환경에, 문학적으로 절차탁마하는 것은 젊은이에게 유일한 통로였다. 당연히 시국에 대한 논의도 하게 된다.

 

금방 이 조직은 '반동사상'을 전파하고, '계급투쟁'을 잊은 것으로 고발당한다. 모든 구성원이 연루된다. 일부는 죄를 받아 감옥으로 갔다. 곽세영은 가정배경으로 인하여 하남 서화농장으로 보내어져 노동개조를 당한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멸시했다.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전세계에서 무엇이 가장 깨끗한가? 진흙!"

 

1965년 가을, 가족의 노력으로 그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북경농업대학에 들어가 다시 학업을 계속한다. 1968년 3월, 새로운 비판의 광풍이 불어왔다. 많은 대학의 조반파는 '반동학생'을 솎아냈다. '사건이력'이 있는 곽세영은 자연히 거기에 포함되었다. 조반파는 곽세영을 붙잡아서 계속 옛날 "X시가"사건의 여죄를 캐내려고 했다.

 

3일간 계속된 고문으로 곽세영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숨이 겨우 붙어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모친은 상황이 급박한 것을 알고, 곽세영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매일 모주석과 같이 극을 보는 부친에게 아들을 구해달라고 사정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친은 끝까지 응락하지 않았다. 

 

1968년 4월 22일, 갖은 모욕을 견디지 못한 곽세영은 간수가 부주의한 틈을 타서, 3층의 방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투신자살한다. 그가 죽었을 때 두 손은 묶여 있었고, 전신의 여러 곳에 골절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곽말약(郭沫若)"이라고 한다.

 

3

 

1956년, 풍성학려(風聲鶴唳)의 정치분위기 가운데, 이미 44살된 진자미(陳子美)는 자신의 가정배경이 좋지 않아, 상해의 조산사(助産士) 일을 그만두고, 광주고 일가가 이사를 가서 화를 피한다. 그녀는 가두거민위원회(街頭居民委員會)에서 문맹타파선생의 일을 했다. 

 

다만 1966년 문혁이 시작된 후, 진자미의 가정배경은 누군가 알아버려서, 약점이 잡힌다. 그녀는 "중국최대의 우경기회주의분자의 자손"이 된다. 집안이 수색당하고, 비투를 당하는 것이 일상사가 되어 버린다. 우붕(牛棚)에 무려 14개월이나 갇혀 있는다. 계속되는 모욕에 젊었을 때 혼자서 어렵게 생활한 의지가 굳은 이 여성도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홍콩으로 밀항하려는 생각을 품게 된다.

 

1970년 9월,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이미 58세가 된 그녀는 자신의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다. 그리고 자신은 5통의 장을 담는 철피통을 몸에 묶고, 마음씨 착한 사람의 도움으로 파도치는 대붕만(大鵬灣)에 뛰어든다. 10시간의 표류를 거쳐, 구사일생으로 홍콩에 도착한다. 이처럼 고령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밀항하다니, 그녀를 본 홍콩경찰도 참지 못하고 그녀와 악수를 한다.

 

홍콩당국이 그녀를 대륙으로 돌려보낼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여, 그후 진자미는 아들을 데리고 천신만고끝에 캐나다로 간다. 결국은 다시 미국으로 옮겨서 거주한다. 그리고 1989년 미국국적을 취득한다.

 

말년의 그녀는 내지의 관련부서에서 그녀 부친의 묘를 다시 만든다는 말을 듣고도 그녀는 기뻐하지 않았다. "다시 백성들의 돈을 쓰는구나. 언제 다시 부숴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녀의 부친은 바로 "진독수(陳獨秀)"이다.

 

4

 

1946년 국민정부가 건설한 3개의 중앙의원중 하나인 귀주중앙의원(貴州中央醫院)이 광주(廣州)로 이전하여, 광주중앙의원이 된다. 종세번(鍾世藩)은 부원장이었다. 그의 처인 저명한 간호전문가 요월금(廖月琴)도 같이 갔다. 부부 두 사람은 북경협화의과대학을 졸업한 인재였다. 이전에 모두 미국유학도 했다.

 

1949년,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치기 전날, 당시 원장이던 종세번은 상급에서 병원자금과 인원을 이끌고 대만으로 이전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병원을 신정권의 군사관리위원회에 넘긴다.

 

문혁이 개시된 후, 부부는 에전에 국민정부에서 일하였고, 유학을 다녀왔다는 배경으로 인해 모두 비투를 당한다. 종세번은 '자산계급반동학술권위'로 타도되어 소아과로 가서 분유병을 세척하는 일을 해야 했다; 처인 요월금은 중산의과대학 암센터의 부원장이었는데, 상황이 더욱 비참했다.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1966년 7월 주강(珠江)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당시 나이 56세였다.

 

종세번은 처의 유골을 계속 자신의 침실에 놓아 두었다. 꼬박 12년간이나.

 

그의 아들은 바로 '종남산(鍾南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