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봉황인문역사(鳳凰人文歷史)
1967년 9월 14일, 쓰촨 청두의 조반파, 홍위병은 50만명을 조직하여, 지금의 텐푸광장(天府廣場)에서 문혁중 쓰촨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비투회(批鬪會)를 개최한다. 이번의 비투대상은 쓰촨의 지도자들이다. '반혁명수정주의분자 리징췐(李井泉) 및 한줌의 동료들"이다. 흑패(黑牌)를 목에 걸고, 좌분기식(坐噴氣式, 목에 흑패를 걸고 몸을 90도로 굽히는 동작을 하게 하는 것)외에 비투당하는 사람은 청두시의 주요 길거리로 끌려다녔다.
서남국 서기 겸 조직부장이었던 류즈얜(劉植巖)도 비투당한 10명 중 한 명이었다. 3개월후, 그는 갇혀있던 청두 진장(錦江)호텔 9층에서 투신자살한다. 나이 49세때였다.
류즈얜의 아들이 바로 부총리 류허이다.
1.
광서14년 사월 이십사일, 허베이성 창리현(昌黎縣) 량허촌(兩河村)의 류관루(劉冠儒)의 집에 아들이 태어났다. 류관루는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고, 농사일을 열심히 해서 약간의 재산을 모았다. 그는 아들에게 룬춘(潤春)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의 자(字)는 위러우(雨樓)였으므로, 후인들은 그를 류위러우라고 많이 부른다.
비록 류위러우는 고향에서 몇년간 사숙에서 공부했고,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류관루는 독서를 중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3살때 일찌감치 류위러우를 세징이(謝靜宜)와 결혼시킨다. 그를 집안에 붙들어놓고 집안 일을 착실하게 하도록 만들려는 의도였다. 류위러우는 이에 불만이었다. 나중에 그의 장모는 그의 뜻이 원대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밭을 팔아서 그가 용핑푸중학당(永平府中學堂)과 대청은행전수과(大淸銀行專修科)에서 공부하도록 도와준다.
용핑푸중학당때 류위러우의 동기동창중에는 나중에 유명해지는 리다자오(李大釗)도 있었다.
대청은행전수과를 졸업한 후, 류위러우는 금융업에 투신한다. 전후로 대청은행, 중국은행, 변업은행, 농공은행, 동래은행에서 근무한다. 그리고 일찌기 다롄, 칭다오, 텐진과 베이징등지의 은행지점에서 양리(襄理), 내지 경리(經理)를 지낸다.
나중에 류위러우는 상사에게 밉보여 면직된다. 류씨집안 후손들의 회고에 따르면, 상사는 류위러우에게 은행금고의 열쇠를 달라고 했다. 그는 규정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은행금고를 열려면 규정에 따른 인원수를 맞추어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거절한다. 나중에 은행이 투자를 했는데, 류위러우가 상황을 오판하여 은행에 손실을 입게 된다. 상사는 그 기회를 노려 그에게 죄를 물어 사직하게 한다.
은행을 떠난 후, 류위러우는 동창인 국립북평연구원 부원장 리슈화(李書華)의 소개로 연구원에 들어간다. 먼저 회계과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대리서무과장이 되고, 대리총재판사처의 문서를 담당한다.
류위러우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시류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배척을 당하는 일이 많았고, 일기에 그런 울분을 토로했다. 예를 들어, "연구원의 사무에서 베이핑의 여러명 예를 들어 XX, 00는 모두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이성장(李聖章)이 끌어주니, 마치 한 사람이 득도하니 개도 닭도 하늘로 올라가는 것가다. 그러나 이윤장(李潤章, 이서화의 자는 윤장이다) 선생은 군자의 도량이 있지만, 현우(賢愚)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가끔 이것을 생각하면 불만이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늙었다. 윤장과의 사적교분 공적의리는 좋지도 두텁지도 않으니, 부득이한 경우를 만나면 떠나면 그만이다. 다시는 XX등으로부터 배척받지 않을 것이다."
2
1918년 2월 7일, 류허의 부친 류즈얜이 출생한다. 류위러우는 자녀 4명을 낳았는데, 장녀 류즈롄(劉植蓮), 차녀 류즈란(劉植蘭), 아들 류즈얜, 삼녀 류즈췐(劉植荃). 류즈얜은 독자였다.
류즈얜은 원로공산당원이다. "918"사변후 북경사범대학부속중학에서 초중생이던 류즈얜은 동기들과 학교도서관벽에 구망장보(救亡墻報)를 만든다. 적극적으로 애국구망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1935년, 그는 고등학교 동기들과 공산당의 외곽조직인 민족무장자위회와 '사련(社聯)"에 가입한다. 같은 해에 '12.9"학생운동에 참가한다. 1936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화민족해방선봉대 제5구대 대장이 된다.
류위러우는 아들이 혁명에 가담하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쓴다: "즈얜에게 서신을 쓰고 싶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진성지세(晋城之勢)를 벗어난 것같다. 십중팔구 받지 못할 것이다. 쓰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받든지 말들지같에 써서 부쳐야 겠다."
항전때, 류즈얜은 평진(북경,천진)의 망명학생들 중에서 항일구국선전활동을 진행한다. 나중에 조직에서 그를 손전영(孫殿英) 부대에 파견하여 구군개조공작을 한다. 그는 당지부서기, 공위서기를 맡는다.
1939년, 류즈얜은 명을 받아 태악항일민주근거지를 연다. 1940년부터, 전후로 태악구위선전과과장, 제1지위서기 겸 태악구제1군분부 정위, 악북지위 선전부 부장 겸 둔류현위서기, 지위 조직부 부장, 지위서기 겸 군분구 정위등의 직을 맡는다.
해방전쟁때, 그는 악북지위 서기, 운성지위 서기, 서북국 공위위원, 태악군구 제13군분구 정위, 진수11지위서기 겸 11군분구 정위등을 맡는다.
1949년 5월, 류즈얜은 북경으로 가서 먼저 중앙정책연구실에서 일하고, 나중에 정무원 참사실의 참사, 인사부 제3국 부국장, 제1국 부국장이 된다. 1952년 가을, 다시 조직부로 가서 간부관리처 부처장, 간부관리처 2처처장이 된다.
류즈얜은 중앙조직부 내에서 비교적 유명한 '필간자(筆杆子, 글쓰는 사람)'였다. 그가 글을 잘 쓰는 것은 집안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부친 류위러우는 구체시를 좋아했고, 항상 집에서 시를 지었다. 재직한 곳도 국립북평연구원이다. 역시 민국시대 유명한 학술기구이다. 류즈얜의 큰누나 류즈롄은 북평대학 문리학원 영국문학과를 졸업하고,나중에 레이얜(雷姸)이라는 이름으로 윤함구의 유명한 여작가가 된다.
부친과 누나의 훈도를 받아, 류즈앤도 시가를 좋아했고, 글을 잘 썼다. 항일구국때, 그는 '상관귤(上官橘)' '조귤(趙橘)'이라는 필명으로 상하이 <신시(新詩)>등 잡지에 진보시가를 발표했다.
1936년 공산당에 가입하기를 전후하여 류즈얜은 <서회(書悔)>라는 시를 짓는다
一种迷茫,一种需求,一种爱。/落日时黄金的叶子,暮春时的风,初秋的雨。/没有声音,没有思索,只有遥远的凝视。/或是行走,或是叹息,或是永恒的休息。/逝者如斯夫,念前不见古人后不见来者。/我独惆怅于美好的往昔,不觉日之迟暮了。/泛孤舟于无尽的溪流或仰首看一天风云憔悴。/在沉沉的寂静中,已显露出神明的启示。
1937년의 제1기 <신시>에 그는 <위(喟)>라는 시를 발표한다:
是大雾中旅人的来临吗/在那被阳光照成橘色的迷雾中/他吹响了一支芦苇/像火焰 红的 黄的/燃烧在薄暮的森林中/幻异地诉说忧愁的故事
저명한 음악가, 지휘가인 리더룬(李德倫)은 류즈얜의 북평사범대학 부속중학의 같은 반 친구이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중학때 류즈얜은 현대파, 상징주의, 신감각주의등 방면의 저술을 읽었다. 1947년 여름, 리더룬은 서박파에서 전국토지회의에 참가했다가 류즈얜을 만난다. 당시 류즈얜은 로망 롤랑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읽고 있었다.
중앙조직부에서 적지 않은 문건, 보고서, 사론은 모두 류즈얜이 쓴 것이다. 예를 들어 <간부심사에 관한 결정>, <당원간부 역사상 체포된 후 범한 각종 잘못을 처리하는데 관한 의견의 보고서> <중앙조직부의 중앙에 대한 공작보고>등등.
3. 1958년 7월, 류즈얜은 중앙조직부에서 윈난으로 간다. 쿤밍시위서기, 윈난성위상위가 된다. 1961년 서남국이 성립된 후, 그는 전후로 조직부장, 비서장, 서기처서기등을 맡는다.
그후 문혁이 일어난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 류즈얜은 서남국 문화혁명영도소조의 조장이 된다. 포타서남국(炮打西南局)의 구호하에 대거 학생들이 서남국기관으로 쳐들어왔다. 이들 학생들을 상대하는 것은 주로 류즈얜이었다. 그가 학생들을 상대하는 것을 보았던 사람의 회고에 따르면, 류즈얜은 키가 아주 크고, 말을 잘했으며, 강개한 말투는 호소력이 있었다고 한다. "학생은 원래 소란을 부리려 온 것인데, 그의 말에 설득당해서 그가 말을 마치면 박수를 쳤고, 그를 따라 구호를 외치고 학교로 돌아갔다"고 한다.
얼마 후, 류즈얜도 타도된다. 그는 유소기, 등소평, 안자문(安子文)이 추진한 "반혁명수정주의간부노선의 대모사(大謀士), 대방흉(大幇凶)으로 유소기, 등소평자산계급사령부의 충실한 조아(爪牙)"로 규정된다. 그리하여 계속 비투와 박해를 받게 된다.
안자문은 류즈얜의 오랜 상사였다. 항전시기, 안자문은 태악구의 당위서기였고, 류즈앤은 그의 부하로 일했으며, 안자문에게 인정을 받았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안자문은 조직부장이 되고, 류즈얜도 조직부에서 일한다. 여전히 그의 부하였다. 1956년, 안자문의 추천으로, 류즈얜은 중앙조직부의 유일한 처급간부중 제8대 전인대대표가 된다.
류즈얜의 지상중에는 "고급지식분자를 보호했다'는 것이 있다. 숙반(肅反)때 안자문이 이그는 조직부는 고급지식분자 '숙반통제명단'을 만든다. 중앙기관과 각 성시의 천명의 문제있는 고급지식분자들이 명단에 들어갔고, 보호를 했으며, 비판하지 못하게 했다. 이 명단은 바로 류즈얜이 이끄는 조직부 제2처에서 수집정리한 것이다. 이후 안자문과 류즈얜의 죄상중 하나가 된다.
또 다른 죄상은 유소기를 보호했다는 것이다. 전 동북국 판공청 연구실 부주임 리춘류(李純六)이 자료를 만들어, 유소유(劉少猶)라는 사람이 지하공작을 하다가 배신하여 적에게 투항했다고 말한다. 이춘류는 "유(猶)는 기(奇)를 잘못 쓴 것이다. 유소유는 바로 유소기이다."라고 말한다. 류즈얜은 당시 조직부 2처에 있었고, 사람을 동북으로 보내 조사하게 한다. 그리고 리춘류에 대하여는 처분을 한다. 류즈얜은 이렇게 말했다. "유소기는 동북에 간 적이 없다. 계속하여 남방에서 일했다. 이춘류의 말은 완전히 헛소리이다." 이것도 그의 또 다른 죄상이 된다.
자산계급분자, 문화대혁명파괴, 수정주의, 흑간장(黑干將), 유등고취등의 죄명을 류즈얜에게 씌운다. 계속하여 비투받고 구타당했다. 당시의 조반파의 소책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리징췐, 류즈얜을 위시한 서남국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그들이 문화대혁명중에 범한 엄청난 죄행에 대하여 우리는 반드시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 이 소책자에는 심지어 그의 '진술서'도 있다.
1967년, 류즈얜은 진장호텔 9층에 감금되어 학습반에 참가한다. 12월 12일, 그는 검은색의 모직코트를 입고, 9층에서 몸을 던진다. 그렇게 투신자살했고 그의 나이 49살때였다.
4
그 해에 류허는 15살이었다.
그는 저명한 북경101중학을 졸업했다. 이 학교는 혁명지구에서 창건하고 베이징으로 옮겨온 유일한 중학이었다. 1951년, 주은래의 특별허가를 받아 허베이 장가구에서 원명원 남쪽으로 옮겨온다. 학생들은 대부분 고위간부의 자제이거나 열사의 고아였다.
1969년, 류허은 길림으로 하향삽대간다. 다음 해에 군대에 들어간다. 3년후, 퇴역하고 북경무선전기공장에서 노동자가 되고 나중에 간부가 된다.
문혁이 끝난 후, 대학입시가 부활된다. 류허는 중국의 제1차 대학생이 된다. 중국인민대학에서 공업경제학과를 졸업한다. 그는 2008년에 이런 글을 쓴 바 있다: "30년전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시대의 막차를 탄 것이다."
1988년 류허는 국가계획위원회에 들어간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류허는 미국유학을 간다. 하버드대학 케네디학원에서 경영학학위를 받는다.
학술형의 관리인 류허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부총리가 되기 전까지 그를 아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그때 미국인의 눈에 류허는 보통의 문직 관리였다. 2013년 5월 미국 국가안전고문 Tom Donilon이 베이징에서 미중정상회담에 참가했을 때, 최고지도자가 그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 사람이 류허이다. 그는 나에게 아주 중요하다. 이후 미국인은 류허를 중국의 중요한 경제고문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찌기 1989년, 류허는 국가계획위원회 산업정책사 산업구조처 경제사로서 <우리나라 산업정책실시의 전체적 생각>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사회자본을 충실하게 하여, 직접경제활동과 외자유입에 양호한 외부환경을 조성하여야 한다, 시장의 조직화를 강화하여 종점적으로 자본을 개조한다. 전력으로 외화창출산업을 지지한다는 등의 의견을 제시한다.
여러 해 후, 류허는 부총리가 되고, 류허는 특사로서 미국과의 협상을 주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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