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월(劉越)
명나라가 건립된 후, 주원장은 한고조 유방을 본받아 번왕을 두었다. 1370년 주원장의 열번째 아들인 주단(朱檀)이 태어나자, 그의 모친이 총애를 받고 있어, 두 달만에 노왕(魯王)에 봉하고, 봉지를 산동 연주(兗州)지역으로 한다. 이때부터 노왕의 세계(世係)가 정식으로 시작된다.
1. 초대 노왕: 약을 먹고 죽은 황당한 왕야
1370년은 주단이 노왕에 봉해진 첫해이다. 주원장은 사람을 곡부의 공묘로 보내 제사를 지내고, 동시에 제사글에서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열번째 아들 주단을 위해 노국(魯國)을 건립하니, 그 안의 산천의 제사는 노왕이 실제로 주재한다. 아직 나이가 여려서 제사를 지낼 수 없으므로 글을 지어 신에게 바친다. 그 글은 비록 노왕이 직접쓰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짐의 마음이 미안하다. 그리하여 짐이 글을 지어 사실대로 고하고 사신을 보내어 예물과 제사물품을 차려 신에게 제사지내고 고하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만 보더라도 주원장이 아들 주단에 대한 부친의 사랑을 여볼 수 있다. 그러나 주단은 나중의 인생궤적에서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게 된다.
14살때, 주단은 개국원수 탕하(湯河)의 딸고 부부가 된다. 15살때 노왕 주단과 노왕비(魯王妃)는 산동의 봉지로 간다. 젊은 노왕은 산동에서 먼저 연주지부를 맡고, 나중에는 봉지를 계속하여 확대한다. 그는 글읽기를 좋아했고, 명사들을 널리 사귀었다. 이 점은 주원장에게 칭찬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 못했다. 번왕에 취임한 주단은 금방 일생생활이 재미없다고 여기고, 그의 봉지내에서 널리 방사(方士), 도사(道士)를 불러모아 장생불로의 선약을 연단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의 생활은 점차 포악하고 황음해진다. 그리하여 현지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원망을 산다. 1390년, 노왕 주단은 봉지에서 사망하니 나이 겨우 19살이었다. 주원장은 그의 행위에 불만이 컸기 때문에 그의 시호를 "황(荒)"이라고 내린다. 노황왕(魯荒王)은 이렇게 주단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주원장은 주단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했다. 비록 노황왕을 그의 봉호로 삼기는 했지만, 주원장은 그의 왕릉을 아주 호화스럽고 대량의 기진이보를 부장품으로 넣도록 한다.
2. 제2대 노왕과 청군의 침입으로 순국한 제10대노왕 주이파
주단의 사후 그의 유일한 아들이자 차비(次妃) 과씨(戈氏)의 아들인 주조휘(朱肇煇)는 아직 두 살도 되지 않았다. 주원장은 주단을 싫어했기 때문에 조주휘는 노왕의 작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계속 세자(世子)의 신분으로 지낸다. 명성조(영락제)가 즉위하고나서 비로소 주조휘를 노왕에 봉한다. 주조휘는 비록 주단의 정실왕비인 탕씨의 친아들이 아니었지만, 탕씨는 주단과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으므로, 탕씨는 주조휘를 아주 아끼고, 그에게 예악과 시서를 가르친다. 명성조 주체도 이 어린 조카를 아주 좋아했다. 매번 연주를 지날 때면 주조휘를 보러 가곤 했었다. 조주휘는 노왕이 된 후 선비들을 예로 대했다. 명선종 주첨기가 즉위한 후에는 주조휘가 상소를 올려 근면하게 일해온 국장사(國長史) 정소(鄭昭)등의 은퇴를 청했고, 명선종의 윤허를 받는다. 1466년, 홍무제, 건문제, 영락제, 홍희제, 선덕제, 정통제, 경태제, 천순제, 성화제의 9조 8황제를 거친 2대 노왕 주조휘가 사망한다. 시호는 노정왕(魯靖王)이고 향년 79세였다. 그는 명나라의 번왕들 중에서 가장 장수한 왕이다.
노정왕이 사망한 후, 노왕은 여러 대에 걸쳐서 전승되지만, 대다수는 평범하게 일생을 보낸다. 명나라말기에 이르러 1640년 주이파(朱以派)가 노왕의 작위를 계승하여, 제10대 노왕이 된다. 그는 명나라때 끝에서 두번쨰 노왕이다. 이때의 명왕조는 이미 내외적으로 곤경에 빠져 있었고, 이자성이 농민군을 이끌고 국내에서 파죽지세로 성을 하나하나 함락시키고 있었으며, 관외에서는 여진일족이 팔기철기와 한인들에게 배운 화포기술을 가지고 산해관내외의 강토를 휩쓸고 있었다. 1642년 청군이 다시 관내로 침입하여 산동 연주부를 기습한다. 비록 지부인 등번석(鄧藩錫)이 죽기살기로 저항했지만, 내통한 간세로 인해 성문이 열리고, 지부등 명나라의 관리들이 생포된 후 잔인하게 피살당한다. 노왕 주이파도 일가족을 이끌고 왕부내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이때 청군이 산해관을 넘어들어온 목적은 명나라정권을 탈취하기 위함은 아니었고, 자원을 약탈하고 관내에 있는 명군의 허실을 탐색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연주성을 약탈한 후 관외로 물러난다. 명나라조정은 주이파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난 후, 1644년 동부이모의 동생 주이해(朱以海)를 제11대 노왕으로 봉한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것은 이 해가 명왕조의 마지막 해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노왕 주이해의 이야기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된다.
3. 마지막 노왕 주이해
1644년 삼월초, 노왕에 책봉하는 사자가 북경에서 출발하여 연주로 간다. 그가 아직 연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숭정제는 음력삼월 십구일 매산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명제국은 농민군과 만청철기의 진공하에 멸망한다. 음력사월초, 주이해는 전화가 가까워진 연주에서 북경에서 온 사자를 맞이하고, 마지막 노왕에 오른다. 주이해가 책봉성지를 받았을 때, 청군은 이미 남하하여 산동에 가까워졌다. 당시 사람들의 기록에 따르면, 청군은 산동의 수비장수 유택청(劉澤淸)을 뇌물로 매수한 후, 순조롭게 연주부를 함락시키고 노왕을 포로로 잡는데 성공한다. 다만 기이하게도 청군이 노왕을 세 차례나 베려고 했지만 모두 피해갔다. 그들은 노왕은 하늘이 보우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를 풀어준다. 그리하여 노왕은 산동을 벗어날 수 있었다.
도망과정에서, 노왕의 계비(繼妃)와 차남이 남쪽으로 도망가는 도중에 사망한다. 비분에 빠진 노왕은 절강성 태주까지 내려가서 멈춘다. 이때의 국내정세는 아주 복잡했다. 남경의 육부대신은 숭정제가 사망한 후 명신종 주익균의 손자인 주유숭(朱由崧)을 홍광제로 옹립하여 남명정권을 건립한다. 그러나 조정의 내부분열이 끊이지 않아 청군은 금방 남경성을 함락시킨다. 1645년 오월, 홍광정권이 끝난다. 남경성이 함락된 후, 조정의 여러 신하들은 다시 도망치면서 주명종실에서 황제로 옹립할 대상을 찾는다. 이때 명나라의 황족은 청군의 도살로 몇명 남지 않았었다. 혈연이 가장 순정한 인물로는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 주원장의 23째아들 朱桱의 팔대손)과 노왕 주이해였다. 남아있던 대명관리들은 누구를 선택하여 옹립할지를 놓고 의견이 일치되지 못했다. 1645년 육월 당왕이 복건에서 황제에 옹립되니 그가 융무제(隆武帝)이다. 이때 절강에서 감국(監國)으로 옹립된 노왕 주이해는 황제를 칭하는데 있어서 뒤쳐지게 된다.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는 없다. 이때의 남명은 청군철기하에서 이미 위기일발이었지만, 융무정권과 노왕간에는 여러가지 갈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상대방을 퇴위시키게 만들려 했지만, 실패로 끝난다. 계속되는 양진영의 마찰고 남명의 항거역량은 약화된다. 1946년 마음이 조급해진 노왕 주이해는 남경성을 함락시켜 자신의 정통지위를 확립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항주성조차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같은 해 여름, 청군은 항주에서 출발하여 노왕정권을 압박한다. 하늘도 돕지 않아서, 항상 물이 깊고 파도가 크게 일던 전당강이 이해는 가뭄으로 말라버린다. 그리하여 청군은 순조롭게 노왕을 칠 수 있었고, 노왕은 어쩔 수 없이 바닷가로 쫓겨난다. 청군은 절강동부지역까지 순조롭게 점령하고, 노왕을 옹호하던 여러 대신들은 순국한다.
노왕은 그후 금문도로 가서 정성공(鄭成功)의 비호를 받는다. 그러나 융무정권이 패배한 후, 명신종의 손자 주유랑(朱由榔)이 영력제(永歷帝)로 옹립되면서 여러 항청세력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이렇게 하여 노왕은 외톨이가 되어 더 이상 항청세력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된다. 시간은 흘러 1661년, 영력정권이 실패하고 멸망한다. 그러나 이때도 주이해는 여전히 정성공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고, 몸은 중병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 금문도에서 병사하니, 이렇게 하여 명나라의 노왕일맥은 끝이 난다.
노왕일맥은 1370년 초대 노왕 주단때로부터 1662년 마지막 노왕 주이해가 금문도에서 병사할 때까지 지속기간이 명나라의 지속기간보다 길었고, 근 300년동안 끊이지 않았다. 명나라의 여러 번왕세계중에서 독특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초대 노왕은 황당한 행동으로 주원장에게 '황'이라는 시호를 받았지만, 제10대노왕 주이파가 자살로 순국하고, 마지막 노왕 주이해도 끝까지 청나라에 항거하다가 1661년 금문도에서 병사한다. 그들은 비록 웅재대략을 지닌 인물은 못되었지만, 그래도 적에게 투항하지는 않았다. 이 점을 보면, 노왕 일맥은 미유선시(未有善始) 각유선종(却有善終)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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