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관도전투(官渡之戰)의 발생지: 정주 중모현(中牟縣)? 신향 원양현(原陽縣)?

중은우시 2024. 11. 20. 15:37

글: 애역사(愛歷史)

한헌제 건안4년(199년), 여러 해동안의 전투를 거쳐 조조는 원술, 장수, 여포등 할거세력을 평정하여, 강역을 더욱 넓혔을 뿐아니라, 군사력도 크게 증강된다. 이미 하북의 원소와 맞서싸울만한 실력을 갖춘 것이다. 조조와 그의 모사들은 치열한 토론을 거쳐 업성(鄴城)을 기습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조조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유비는 조조가 소홀한 틈을 타서, 허창에서 서주로 도망치고, 공개적으로 조조에 반기를 든다. 이와 동시에, 유비는 이 비밀계획을 원소에게 알린다.

조조의 기습계획을 들은 후, 원소는 매우 분노한다. 그는 유주에 할거하고 있던 공손찬을 섬멸시킨 후, 10만대군을 몰아 '청군측(淸君側)'의 명목을 내세워 조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중원의 양대 할거세력간의 전략적인 대결이 전개된 것이다. 이 전투는 한헌제 건안4년(199년)에 서막을 열고, 다음 해 십월에야 끝난다. 역사에서는 관도전투(官渡之戰)으로 불린다.

관도전투의 경과와 결과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여기에서 반복하여 설명하지는 않겠다. 본문에서는 한 가지 이슈만을 다루고자 한다. 관도는 도대체 오늘날의 어느 지방인가? 이 문제에 관하여 역대이래로 적지 않은 논쟁이 있었는데, 주로 두 가지이다.

첫번째 견해, 관도의 위치를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 중모현 경내로 보는 것이다.

<중국사고<中國史稿)>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조조와 원소가 교전한 초기에 원소의 우유부단한 결점을 충분히 이용하여 신속히 병마를 이동시켜 먼저 서주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세력을 궤멸시켜,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 후, 병력을 황하의 관도로 보내어, 원소와 대치한다. 여기에는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관도는 지금의 하남 중모라고.

<중국사강요(中國史綱要)>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한헌제 건안5년(200년), 원소와 조조간에 관도에서 대규모 결전이 벌어진다. 그리고 관도에 대하여는 주석으로 지금의 하남 중모라고 적었다.

<중국고대사강(中國古代史綱)>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조조는 관도지전을 통해 1만여명의 병력으로 관도에서 원소의 7만정에를 섬멸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관도의 위치를 지금의 하남성 중모현이라고 적었다.

또 다른 <위진남북조사(魏晋南北朝史)>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한헌제 건안4년(199년), 조조는 허도로 돌아온 후, 원소군의 배치에 대해 전술적인 조정을 거쳐 병력을 나누어 관도에 주둔시킨다. 이 책에서는 관도에 지금의 중모현 현의 동북 12리에 위치하는 곳이라고 주석을 붙여놓았다.

<하남성지(河南省誌)>에도 관도에 대하여 구체적인 위치를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는 양군의 주전장은 관도교(官渡橋)인데, 주변의 촌락은 이 다리를 따서 이름지었다. 한헌제 건안5년(200년),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이 곳에서 원소를 대파한다. 이 책에는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관도교의 구체적인 위치는 중모현 동북 5리에 있는 소강향(紹崗鄕) 경내에 있다고.

그리고 <중국고대운하공정<中國古代運河工程)>에서는 관도를 황하의 도구(渡口, 나루터)라고 적고 있다. 이 책에서는 관도는 당시 황하의 가에 있는 도구이고, 구체적인 위치는 하남성 정주시 중모현 현성동북의 황하남안이라고 한다. 조조는 2만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적을 맞이할 때 원소의 대군과 이곳에서 맞부닥쳤다고 한다.

이상의 몇 가지 사료에서는 관도의 성격이 교량이건, 마을이건 아니면 도구이건, 그 위치는 모두 지금의 중모현 경내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관도의 구체적인 위치가 중모현이 아니라, 지금의 하남성 신향시 원양현내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관련사료기재에 따르면,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한 후 양무현(陽武縣)을 설치한다. 치소(治所)는 지금의 하남성 신향시 관할하의 원양현(原陽縣) 현성의 동쪽 30여리 떨어진 곳이다. 이 현은 "박랑사(博浪沙)"라는 명칭도 가지고 있는데, 진나라말기, 저명한 장량이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이를 통해 천하에 이름을 떨친다.

서한(西漢)시기 조정은 양무현 현상의 서쪽에 원무현(原武縣)을 설치한다. 치소는 지금의 원양현의 현성인 관진(關鎭)이다. 그후 원무현은 여러차레 변화를 겪는다. 수나라때, 원무현은 원릉현(原陵縣)으로 개명되고, 당나라이후 다시 원무현으로 회복된다. 양송시기에는 원무현이 다시 폐지되었다고 다시 설치된다.

지난세기 중엽에 이르러, 원무현과 양무현은 합병하여 원양현으로 지금까지 칭해지고 있다. 지금은 신향시 관할하의 원양현이다.

<사기.고조본기>에 따르면, 진시황시기, 사람을 시켜 동남방향으로 흐르는 홍구(鴻溝)를 파도록 했다. 그리고 황하의 물을 대량(大梁,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으로 끌어들여 관개농업에 사용하고, 백성들이 쓰도록 했다. 홍구는 양무현의 현 남쪽을 지나간다. 이 구간은 "관도수(官渡水)"로 명명된다.

그러나, <사기.하거서>에는 홍구에 대하여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홍구와 관도수가 기실 서로 다른 수계(水係)라는 것이다. 양무현을 지나서 흘러가는 것이 관도수이고, 대량으로 흘러가는 것이 홍구, 즉 변수(汴水)라는 것이다. 두 곳의 사료에서 비록 수계를 다르게 기록하기는 했지만, 양무현을 지나가는 것이 관도수라는 점은 일치한다. 이는 관도가 지금의 원양현 경내에 있다는 것이고, 조조의 군영은 바로 이 수계 부근에 있었다는 것이다.

청나라 강희연간의 <양무현지>와 건륭연간의 <회경부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관도는 양무현 현의 동남쪽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조조와 원소는 이곳에서 대치하고 교전을 벌였다.

<양무현지>에서는 관도의 위치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충설명하고 있다. 관도는 양무현 현성의 동남쪽 마두집(馬頭集)이다. 한나라말기, 원소와 조조가 이곳에서 대치했고, 마두집 부근에는 한 산언덕(山崗)이 있는데,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안량을 죽인 곳이다. 그리하여 "안량강(顔良崗)"으로 불린다.

이 몇 곳의 사료에서는 관도의 구체적인 위치를 지금의 원양현 경내인 대빈진(大賓鎭) 마두촌(馬頭村)을 보고 있다.

금세기초, 원양현 대빈진 마두촌의 서쪽에 있는 오불사(五佛寺) 유적지에서 두 가지 유물이 발견된다. <황경비기(皇經碑記)>와 <중수비기(重修碑記)>이다. <황경비기>에는 양무현의 고관도촌주민의 선행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중수비기>에서는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한헌제 건안5년(200년) 가을 구월, 조조와 원소가 이 곳에서 상호 대치하며 몇달간 교전을 벌였으며, 최종적으로 조조가 원소의 양초치중을 기습하여, 원소가 패배한 후 병력을 이끌고 멀리 도망쳤다고. 이 두 가지 유물의 출토는 관도지전의 발생지가 마두촌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증명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한나라말기의 관도는 지금의 하남성 신향시 관할하의 원양현 대빈진 마두촌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