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도원결의(桃園結義): 정사로 본 유비, 관우, 장비......

중은우시 2024. 11. 19. 15:27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나 정사(正史)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간의 정의(情誼)에 대한 묘사는 <삼국지.관장마황조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사서에는 몇 마디로 적었는데, 유비가 일찌기 평원상(平原相)으로 있을 때, 관우, 장비 두 사람과 "침즉동상(寢則同床), 은약형제(恩若兄弟)"(잠을 잘 때는 같은 침대에서 자고, 그 정은 형제와 같았다). 평소에 관우, 장비는 유비의 별부사마(別部司馬, 정식편제에 들어 있지 않은 하급무관을 가리킴)로 공손하게 유비의 곁에 서서 호위를 섰다. 그리고 유비를 따라 각지를 전전하며 어려운 일들을 함께 겪는다.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싸우는 수십년동안 유비, 관우, 장비는 여러번 서로 흩어졌지만, 다시 만나면서 시종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군신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후세인들에게 큰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준 셈이다.

후세인들은 세 사람을 위해 도원결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계속하여 인물의 이미지를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에서 신으로"의 변신이 이루어진 것이다.

1

신격화요소를 배제하면, 유비, 관우, 장비의 성공사는 보통사람의 분투노력의 역사이다.

유비의 창업조건은 매우 어렵고 힘들었다.

그는 미천한 출신으로, 부친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모친과 함께 짚으로 신과 자리를 만들어 팔았다. 평상시에는 장사를 하는 외에 지방의 호걸들과도 어울렸다. 비록 유비는 한나라종실이라는 신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별다른 이익은 얻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의 황족혈통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배송지(裴松之)는 <삼국지>에 주(注)를 달면서 이렇게 말한다: "선주(先主, 유비를 가리킴)는 비록 스스로 효경(孝景)의 후순이라고 하였지만, 세수유원(世數悠遠)하여 소목난명(昭穆難明)하다" 소목제도(昭穆制度)는 종법제도하에서 종묘의 배열순서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시조를 가운데 두고, 좌를 소, 우를 목이라 한다" 소목난명이라는 말은 유비가 자칭 한경제(漢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라고 하지만, 연대가 오래 되어서, 조부 위로의 세계(世係)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비와 동시대의 한나라말기의 군웅들 중에서 조위의 기초를 닦은 조조(曹操)는 부친과 조부가 모두 조정의 고관이며, 그가 거병했을 때 조씨(曹氏), 하후씨(夏侯氏)등 동족들이 많이 도와준다. 손권(孫權)의 부친 손견(孫堅)이 처음 의군을 일으켰을 때 수하에 손정(孫靜), 오경(吳景)등 친척집단의 종족자제들이 있었다. 그러나 장삿꾼 출신의 유비는 거의 맨손으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동한 광화7년(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유비는 고향인 탁군(涿郡, 지금의 하북성 탁주)에서 거병한다. 같은 마을의 장비 그리고 하동(河東) 해현(解縣, 지금의 산서성 운성)에서 온 관우가 그의 휘하에 들어온다. 처음에 유비에게 자금지원을 해준 사람은 중산(中山)의 대상인 장세평(張世平), 소쌍(蘇雙)이었다. 그들은 유비에게 자금도 지원해주고, 병력도 모아주었다.

장비는 유비의 탁군 동향인물이지만, 관우는 외지에서 탁군으로 흘러들어온 망명객이다.

정사에서는 평민출신의 인물을 묘사할 때, 어렸을 때의 경력을 왕왕 별로 묘사하지 않는다. <삼국지>에 관우가 해현에서 '망명'한 원인도 기록해놓지 않았다.

한영제(漢靈帝)떄, 하동은 '백파적(白波賊)'의 습격을 받는다. 이 도적집단은 십여만에 이르렀고, 하동, 태원, 하내를 연이어 함락시킨다. 관우의 고향인 해현도 그 피해를 받았다.

해현은 산서성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고, 하동염지(鹽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고이래로 소금이 나왔다. 당시, 하동에서 탁군으로 통하는 소금,말 무역로가 있었는데, 관우는 난을 피하여 아마도 해현상인들이 이 무역로에 익숙했으므로 하동에서 탁군으로 흘러들어온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호걸과 사귀기 좋아하는 유비와 알게 된 것일 것이다.

유비를 자금지원해준 장세평, 소쌍은 탁군과 하동의 사이에 있는 상업도시 중산사람이다. 아마도 이 무격노선을 통해 탁군에서 소금, 말을 판매했을 것이다.

2

사서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만나는 과정을 전혀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았다. 후세소설이 허구적으로 만든 '도원삼결의'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삼국지.관장마황조전>에 따르면, "관우는 나이가 몇살 많아서, 장비가 형으로 모셨다(羽年長數歲, 飛兄事之)"라는 말이 나온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장비의 자(字)는 익덕(益德)이다. "익덕"의 의미는 계속하여 덕을 쌓고, 분발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므로 장비의 이름과 서로 대응한다. 또한 한나라때 유가의 가치관에도 들어맞는다. 그러나 소설가는 아마도 우익(羽翼, 날개)이 있어야 날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관우의 이름과 호응하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장비의 자를 "익덕(翼德)"으로 바꾸어 버렸다.

한나라말기에는 서로 형제로 부르는 것이 유행했다.

장비가 관우를 형으로 대했듯이, 유비, 관우에게도 각자 '형제'로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유비가 15살때, 요서(遼西) 공손찬(公孫贊)등과 함께 탁군의 명사 노식(盧植)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다. 유비는 독서를 좋아하지 않아,평상시에 개와 말과 어울려 놀고, 음악을 좋아하고 옷을 잘입었다." 그러나 이때 공부한 경력은 유비에게 학력을 주었을 뿐아니라, 나중에 유주군벌이 되는 공손찬과 사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유비는 공손찬을 "형으로 모셨다(以兄事之)". 나중에 유비가 고당령(高唐令)으로 있을 때, 고당현이 도적에게 점령당한다. 유비는 바로 공손찬에게 도망쳐서 도움을 청한다. 동탁(董卓)의 난때, 유비도 '의군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한다' 이때의 경력은 나중에 소설에서 '관우온주참화웅(關羽溫酒斬華雄)',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등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비는 공손찬을 따라 약간의 책응성의 행동을 했을 뿐이고, 중원의 전장에서 활약하지는 않았다.

유비의 큰형은 공손창이다. 그리고 관우에게도 형제가 있으니 서황(徐晃)이다.

관우는 말년에 수엄칠군(水淹七軍)으로 화하에 위명을 떨쳤는데, 손권의 군대에 기습당해 형주를 잃는다. 이때 조조는 대장 서황을 파견하여 양양의 전선에서 조위의 군대를 지원하게 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관우와 서황은 "오랫동안 서로 좋아했고, 멀리 있어도 서로 연락했다. 그러나 일상적인 일만을 얘기했지 군사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여러 해동안 서로 다른 주군을 모시고 있지만 항상 서로 연락하였다. 이 우의는 개략 건안5년(200년) 관우가 조조의 군영에 몸담았을 때부터일 것이다.

관우의 말년에 일전을 벌이게 되는데 양군이 진을 쳤고, 서황은 군령을 내린다: "운장의 목을 가져오면 상금 천근을 내리겠다!"

관우는 조금 놀라서 서황에게 말한다; "형제! 그게 무슨 말인가?"

서황이 대답한다. "이건 국사(國事)이다!"

그는 공사가 분명했던 것이다. 관우를 살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를 보면, 한나라말기에 영웅들은 의기투합하면 서로 형제로 결의를 맺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서에 비록 '도원삼결의'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유비, 관우, 장비의 사이에는 형제간의 정이 있었다는 것은 알 수가 있다.

3

후세의 각도에서 보면 삼국시대는 '신'이 만들어지는 시대이다.

<삼국지>의 작자인 진수(陳壽)는 촉한(蜀漢)의 구신(舊臣)이다. 그가 '당대사'를 편찬할 때, 관우, 장비에 대한 평가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며, 위세호신(爲世虎臣)이다"라는 것이다.

관우, 장비는 동한말기부터 "관장(關張)"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다.

조조의 모사 정욱(程昱), 곽가(郭嘉), 유엽(劉曄)등은 모두 조조에게 관우, 장비를 경계하라고 일깨워준 바 있다. 손오의 주유(周瑜)도 관우, 장비는 "웅호지장(熊虎之將)"이라고 했다. 유비는 이들의 보좌를 받았으므로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서에서 관우가 전투에서 적을 죽이는 장면을 묘사할 때 가장 멋있는 것은 "참안량(斬顔良)"이다.

그러나, 조조는 관우가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오래 머물 뜻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부하 장료(張遼)를 보내 동정을 파악하고자 한다. 관우는 장료를 만난 후 탄식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공(曹公, 조조)이 나를 아주 후대해주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고 있다. 다만 나는 유장군(劉將軍, 유비)의 후은을 받아서 함께 죽기로 맹세했다. 그리하여 그를 배반할 수 없다. 나는 어쨌든 남지 않을 것이다. 내가 조공에게 보답을 한 후에는 떠날 것이다."

그 해에 조조는 원소와 대전을 벌인다. 원소는 수하맹장 안량을 보내 황하를건너 백마(白馬, 지금의 하남 활현 동북)을 공격하게 한다. 조조의 모사 순유(荀攸)는 병력을 연진(延津, 지금의 하남 급현 동쪽)에서 황하를 건너는 척하여 원소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그후 조조의 군대가 백마를 기습하여, "그들이 대비하지 않고 있는 틈을 타서 공격하면 안량을 생포할 수 있다"고 건의한다.

원소는 조조군대의 동향을 보고 일부 군대를 연진으로 보내 공격하게 하고, 안량으로 하여금 혼자 병력을 이끌고 백마를 포위공격하게 한다. 원소측에도 모사가 있다. 저수(沮授)는 당시에 안량이 혼자 병력을 이끄는 것에 반대하고, 원소에게 이렇게 간언한다: "안량은 도량이 좁다. 비록 용맹하지만, 혼자서 병력을 이끌고 지휘할 수는 없다." 다만 원소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하여, 원소가 병력을 나눈 후, 조조는 관우, 장료를 선봉으로 보내 경병(輕兵)으로 급속히 백마로 보낸다. 관우는 멀리서 안량의 휘개(麾蓋)를 보고, 말을 몰아 안량의 앞까지 치고 들어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와중에 안량을 찔러죽이고, 그의 수급을 벤다. 원소의 군대는 관우의 기세를 막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친다. 관우는 이렇게 백마의 포위망을 풀어주게 된다.

그러나, 그후 "주문추(誅文醜)"는 관우의 공로가 아니다. 같은 해에 원소는 대장 문추를 보내 연진에 주둔시킨다. 이 전투에서 문추는 조조군대의 '유인책'에 말려 혼전중에 사망한다. 그는 관우가 죽인 것이 아니다.

관우가 안량을 참한 후, 조조는 한헌제에게 청하여 그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한다. 관우는 자신이 이미 조조의 은혜에 보답했다고 여기고 떠날 생각을 한다. 그는 유비의 소식을 알아본 후, 조조가 하사한 물건들을 모두 그대로 남겨두고, 떠나겠다는 서신을 남기고, 유비에게 돌아갈 준비를 한다. 조조의 수하가 그 소식을 들은 후, 추격하려고 하자, 조조는 말한다: "각자 모시는 주인이 있는 법이니, 쫓아가지 말라!"

관우의 이때 경력은 후세에 충의(忠義)의 모범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기실 조조가 그걸 이루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이후, '관장'은 자주 맹장의 모습으로 형용되었다. 남북조때, 유송(劉宋)의 설안도(薛安都), 북위(北魏)의 양대안(楊大眼), 남진(南陳)의 소마가(蕭摩訶)등에 대하여 사서에서는 모두 이들을 '관,장'에 비견되는 무장으로 묘사한다. 예를 들어, 설안도, 소마가는 모두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적장을 참살한 기록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유사한 사적을 모두 관우가 안량을 참하는 것을 재현한 것으로 보았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장비에 대하여, "웅장위맹(雄壯威猛), 아어관우(亞於關羽)"라고 하여 용맹함에서 관우에 버금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국사지풍(國士之風)"이 있다고 하였다. 장비의 풍도는 "의석엄안(義釋嚴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유비가 익주로 들어간 후, 남군에 주둔하게 된 장비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파군(지금의 중경)을 공격한다. 파군태수(巴郡太守) 엄안은 유비가 배신했다고 여기고, 병력을 이끌고 죽기살기로 저항하다가, 장비에게 패배한 후 포로로 잡힌다.

장비는 엄안에게 소리치며 질책한다: "나의 대군이 이미 도착했는데, 너는 어찌 투항하지 않고, 병력을 이끌고 반항하였는가?"

엄안이 대답한다: "너는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 병력을 몰고 나의 강토를 빼앗으려 한 것이 아닌가. 우리 여기에는 단두장군(斷頭將軍)은 있지만, 투항하는 장군은 없다!"

장비는 대노하여 좌우에게 엄안을 끌고가 참수하라고 명한다. 엄안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말한다: "머리를 베려면 벨 것이지, 왜 화를 내느냐!" 장비는 엄안의 호기로운 기개에 감동하여, 그를 풀어주고 상빈(上賓)으로 대한다.

4

삼국도 사람이 만든 역사이다. 사서의 인물들은 대부분 다면적인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사서에 관우와 장비를 같이 논하면서 그들 각자의 결점까지 언급한다: "관우는 병졸들에게는 잘 대해주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다, 장비는 군자는 존경하고 아꼈지만, 소인은 도와주지 않았다."

관우는 병졸에게 잘 대해주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만 그는 사람됨이 교만하고 자부심이 강해서 사대부나 동료들은 멸시했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건안19년(214년), 유비가 촉으로 들어가 작전할 때, 서량명장(西凉名將) 마초(馬超)가 투항해온다. 마초도 맹장이다. 유비는 기뻐해 마지 않아 그에게 바로 중임을 맡긴다.

형주를 지키고 있던 관우는 그 소식을 들은 후 제갈량에게 서신을 써서, 마초의 재능이 어떠한지 물어본다.

제갈량은 관우의 "호전(護前)" 즉, 호승심이 강하고 다른 사람들은 무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회신한다: "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열(雄烈)함이 남달라, 일세지걸(一世之傑)이다. 그는 진나라말기 경포(鯨布), 팽월(彭越)같은 류의 인재이다. 장익덕과 나란히 비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 미염공의 '절륜일군(絶倫逸群)'에는 미칠 수 없다." 관우는 서신을 받은 후, 제갈량이 보내온 서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관우의 오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건안24년(219년), 유비가 이미 촉을 차지했고, 조조와 한중(漢中)을 놓고 다투어 승리를 거둔다.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으로 칭하고, 부하들에 대해 논공행상을 벌인다. 무장중에서는 관우를 전장군(前將軍)으로 삼고, 장비를 우장군(右將軍), 마초를 좌장군(左將軍), 황충(黃忠)을 후장군(後將軍)으로 삼는다. 그중 황충은 한중을 취할 때 큰 공을 세웠다.

유비의 사자 비시(費時)가 형주로 와서 관우에게 관인을 수여할 때, 관우는 황충의 지위가 자신과 같아진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받지 않고 화를 내며 말한다. 대장부가 어찌 노병과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

비시는 관우를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왕업을 건립하는 주공은 오직 한 가지 유형의 사람만을 기용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의 소하, 조참과 한고조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지만, 진평, 한신은 나중에 가입한 망명객입니다. 지위로 따지면 한신이 뒤에 참가했지만 먼저 승진했습니다. 그러나 소하, 조참이 이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한왕은 일시의 공로로 황충에게 상을 내렸는데, 그의 마음 속에서 황충과 군후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한왕은 당신과 한 몸이나 다름없고, 영욕을 함께 하고 화복을 함께할텐데. 제 생각에 군후께서 이런 일을 가지고 따지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군후께서 임명을 받지 않으시면, 저는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다만 군후를 위해서는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나중에 후회하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우는 비시의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아 임명을 받는다. 그러나 그 후에도 여전히 오만했다.

유비는 관우의 이런 부정적인 성격을 억누르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교만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버린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는 것과 같은 시기에, 관우는 혼자서 형주의 대군을 이끌고 양(襄), 번(樊)을 공격한다. 처음에는 아주 순조로웄다. 우금(于禁)을 압박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방덕(龐德)을 참살했으며, 한때 '화하에 위명을 떨친다' 허창의 남산숲에 있는 많은 도적들까지 관우의 명령을 듣고 그의 부하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원래 유비와 결맹하고 있던 손권도 이때 등 뒤에서 칼을 들이민다. 오나라장수 여몽(呂蒙)이 군대를 이끌고 백의도강(白衣渡江)하여 형주를 기습한다.

손권과 유비는 형주를 놓고 경계선을 긋는데 있어서 갈등이 심했다. 연맹이 여러 차례 파열될 뻔한다. 손권은 일찌감치 형주를 차지하고자 했고, 관우가 이번에 북벌에 나설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손권을 다독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우는 손권과 물과 기름사이였다. 손권이 일찌기 사람을 보내 관우에게 정략결혼을 청했을 때, 관우는 온 사람을 욕하면서 그 혼인을 거절한다. 관우가 북상하여 양, 번을 공격할 때, 손권은 출병하여 관우를 돕고자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호랑이가 싸우는 것을 관망했다. 관우가 번성을 공격할 때, 손권의 지원군이 오지 않는 것을 보고 "학자감이(狢子敢爾)"라고 욕하며, 번성을 함락시킨 후, 손권을 토벌하겠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관우의 행동은 손권으로 하여금 관우를 기습할 생각을 더욱 굳히게 만들었다.

관우는 자기 사람들에게도 아주 오만하게 행동했다. 그가 병력을 출동시켜, 양,번을 공격할 때, 남군태수 미방(糜芳)과 장군 사인(士仁)을 후방에 남긴다. 두 사람은 양초공급을 책임졌는데, 행동이 느렸다. 관우는 사람을 보내 그들에게 말한다: "돌아간 후, 너희 둘을 엄히 징벌하겠다!' 미방과 사인은 유비의 오래된 부하이다. 그런데도 관우의 말에 놀라서 불안해 한다. 그러므로, 여몽의 군대가 도착하자 그들은 싸우지도 않고 바로 투항해버린 것이다.

조조와 손권의 협공을 받아, 관우는 신속히 궤멸하고, 생명을 잃으며, 형주를 잃는다.

장비의 성격적 결함은 관우와는 좀 다르다.

장비는 "군자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는 사대부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했다. 유비가 촉에 들어간 후, 장비는 특별히 현지 명사 유파(劉巴)를 방문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유파는 하룻 밤 내내 장비를 무시한다. 그리하여 장비는 돌아온 후에도 계속 마음이 불쾌했고, 그 일을 제갈량에게 말한다. 제갈량은 유파를 찾아가서 말한다: "장비는 비록 무인이지만, 그대를 크게 앙모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공이 문무인재를 모으도록 명하셨고, 큰 사업을 이루고자 하는데, 그대는 사람됨이 청고하지만, 몸을 낮추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유파는 성격이 마음대로였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일개 무부와는 얘기하지 않겠다.

그 일이 동오에 전해진다. 강동의 노신 장소(張昭)마저도 장비가 부당한 일을 당했고, 유파의 마음이 너무 좁다고 말하여 그렇게 장비를 거절해서는 안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손권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유자초(劉子初, 유파)가 시류가 흘러가는데로 살았다면 유현덕과 잘 지내기 위해 장비와 교분을 맺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그가 고사(高士)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장비는 영웅을 경애하고, 문사들을 잘 대해주었다. 그러나 "포악하고 은혜를 베풀줄 몰랐다(暴而無恩)" 그는 부하들에게 아주 가혹했고, 자주 채찍으로 부하들을 때렸다. 유비는 그에게 이렇게 일깨워주기도 했다: "너는 형벌을 너무 심하게 하고, 자주 장병들을 채찍으로 때린다. 그리고 그렇게 벌받은 자들을 너의 곁에 두고 있다. 이는 나중에 화근이 될 것이다."

221년, 유비가 오를 토벌하러 나섰을 때, 장비에게 병력 1만을 이끌고 낭중(閬中)에서 출발하여 회합하도록 한다. 장비의 부대가 출발하려 할 때, 그의 부하인 장달(張達), 범강(范强)은 장비에게 채찍질을 당한 일이 있어, 마음 속으로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장비를 죽이고, 그의 수급을 들고 장강을 따라 내려가, 손권에게 투항한다.

장비의 군영에 있던 도독이 발견한 후 유비에게 보고한다. 유비는 보고서를 보고 탄식한다: "아! 장비가 죽었구나!"

5

군주로서의 유비는 사서의 이미지가 관우, 장비보다 훨씬 복잡하다.

장작요(張作曜)가 <유비전>을 통계낸 바에 따르면, 유비는 평생 22차레 전쟁을 벌였는데, 9번 승리하고, 13번 패배했다. 그중 유비가 직접 독전하거나 지휘한 전투는 17번이고 9번 패배했다.

이들 패전중에 유비는 4차례에 걸쳐 처자식과 헤어진다. 적벽대전전에, 거의 매번 그가 영토 하나를 점령할 때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패도지하고, 도망치게 된다.

<삼국지>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구주춘추(九州春秋)>기록에 따르면, 유비가 형조의 유표에 의탁했을 때,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밑에서 지내다보니 말을 타고 전투를 할 일이 없어, 허벅지의 살이 많이 붙었다고 한다.

한번은 유비가 유표의 연회에 초청을 받았는데, 함께 술을 마시고 얘기를 나누다가 절반쯤 마셨을 때, 유비가 일어나 화장실을 갔다. 거기에서 자신의 '허벅지살이 다시 오른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좌석에 돌아온 후, 유비의 얼굴에 눈물자국이 있자, 유표는 그에게 무슨 일인지 묻는다.

유비가 대답한다: "이전에 남정북전할 때는 몸이 말안장에서 떨어지지 않아, 허벅지에 살이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말을 타지 않으니 허벅지 살이 붙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는 점점 늙어가는데, 저는 아무런 공로나 업적도 세우지 못했으니, 슬퍼하는 것입니다."

연전연패하는 유비는 끝까지 꿈을 쫓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반평생 실패만 했지만 백전불굴의 정신으로 마침내 몇년이 지난 후에는 형주, 익주를 차지하여 인생의 최고봉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관우가 형주를 빼앗긴 후, 유비도 이릉전투에서 인생의 마지막 패배를 맛보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이렇게 하여 이 대희대비(大喜大悲)를 거친 인물은 효웅(梟雄)과 인군(仁君)의 두 가지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

소설연의에서의 그 울고짜고 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삼국지>의 유비는 일찌감치 효웅의 면모를 드러낸다.

유비가 황건적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안희현위(安喜縣尉)라는 하급관직을 얻는다. 다만 조정은 얼마 후 새로운 정책을 반포하여, 군공으로 관직을 얻은 관리들을 정리하도록 한다. 유비는 스스로 나서서 군(郡)내에서 이 업무를 처리하는 독우(督郵)를 만나, 자신을 면직시켜달라고 하려 한다. 그러나 그 독우는 병을 핑계로 그를 만나주지 않아, 고의로 유비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때 유비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전공을 세워 조정에서 관직을 얻은 것인데, 네가 나를 이렇게 대우하면 안되지 않느냐. 유비는 화를 참지 못하고 독우를 붙잡아 두들겨 팬다. 그후 관인을 말을 매는 기둥에 걸어두고, 떠난다.

이를 보면, 유비는 비록 미천한 출신이지만, 절대로 고개를 숙이고 굽신거리는 사람이 아니다. 후세의 소설에서 독우를 채찍으로 때린 일은 장비가 했다고 하지만, 기실 이는 유비의 효웅이미지를 약화시킨 것이다.

유비는 일생동안 여러번 실패를 맛본다. 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인심을 얻었다. 이는 그의 긍정적인 이미지이다.

다만 일단 위기가 닥치면 그는 임기응변에 뛰어나다. 온갖 방법을 써서 살아남는다. 그리하여 여러번 주군을 바꾸게 된다. 황건적의 난 이후, 유비는 전후로 공손찬, 도겸, 여포, 조조, 원소, 유표등의 세력에 의탁한다. 유비가 주군을 바꾼 횟수는 여러번 주군을 바꾼 여포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심지어 여포의 부장은 이렇게 진언했을 정도이다: "유비는 여러번 반복하여 주군을 바꾸는 사람이니 일찌감치 그를 도모하여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비가 변신에 능한 개성은 아마도 그가 일찌기 장사를 하면서 닦은 경력에서 온 것일 것이다. 이런 신축적이고 임기응변에 능한 능력은 여러번 그의 목숨을 구해준다.

한번은 조조가 유비와 시사를 품평할 때, 조조가 돌연 유비에게 "지금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 뿐이다. 본초(원소)의 무리는 넣을만한 가치가 없다." 유비는 마침 식사중이었는데, 조조의 말을 들은 후,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려버닌다.

<화양국지. 유선주지>에는 세부적인 내용을 보충해 놓았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유비는 젓가락을 집어들고 조조에게 말한다. "성인의 말씀에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면 반드시 바뀐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맞는 것같습니다. 번개의 위력이 이렇게 큽니다." 그는 이렇게 조조의 의심을 불식시킨다.

일생동안 기구했던 유비는 스스로 고생을 견딜 뿐아니라, 선비들과 현인들에게 잘 대해주었고, 인재를 잘 대했다. 그리하여 관우, 장비, 조운등 부하들의 충성을 얻어내고, 나중에 삼고초려("선주가 마침내 제갈량에 이르러 무릇 세번가서 마침내 보았다")로 제갈량을 하산하게 만들어 <융중대>의 전략방침에 따라 점점 기세를 형성하게 된다.

자신의 적수가 될 사람을 만나면, 유비는 왕왕 표면적으로는 온화하게 대하면서 뒤로는 살기를 품었다.

익주의 명사 팽양(彭羕)이 유비에 투항한 후 자주 '광언'을 내뱉었다. 나중에 마초를 도발하여, 마초에 의해 고발된다. 유비는 직접 팽양을 사형에 처한다.

유장(劉璋)의 부하 장유(張裕)은 어느 연회에서 '노탁군(潞涿君)'이라는 말로 유비에게 수염이 없는 것을 풍자했다. 유비는 익주를 차지한 후 바로 그를 처치하지 않고, 장유를 익주후부사마(益州後部司馬)로 임명한다. 그리고 나중이 핑계를 잡아 그를 처형하고, 그의 시신을 길거리에 버려두게 한다.

한중을 차지한 후, 유파(劉巴)와 옹무(雍茂)는 유비에게 칭제를 늦출 것을 건의한다. 유비는 핑계를 잡아 옹무를 죽여버린다. 겁먹은 유파는 그 후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유비가 임종탁고한 것이 권모술수의 음모라고 말한다.

한편으로, 그는 촉한조정을 제갈량에게 위임하면서 동시에 이엄을 부(副)로 붙여서, 이엄을 "위중도호(爲中都護), 통내외군사(統內外軍事). 유진여안(留鎭永安)"하게 하여 제갈량을 견제하고 제갈량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았다.

다른 한편으로, 유비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재능은 조비보다 열배이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고, 대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만일 그럴 인재가 아니면, 그대가 취하시오."

제갈량은 유비의 말에 크게 감동받는다. 아무런 원망없이 유비의 탁고를 받아들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앞에서 맹세한다: "신은 어찌 죽을 때까지 고굉지력을 다하고, 충정지절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비는 마음을 놓고 눈을 감는다. 제갈량도 유비의 당부를 어기지 않고, 그후 촉한을 위해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했다.

6

역사의 변화에 따라, 유비,관우,장비는 죽은 후에 천년간 '신격화'의 길을 걷게 된다.

세 사람중 가장 먼저 사당을 갖게 된 사람은 장비이다.

장비가 죽은지 얼마 후, 그가 생전에 지키고 있던 파서(巴西)일대의 백성들이 그를 위해 묘우(廟宇)를 짓는다. 송나라때의 증공(曾鞏)이 파촉에서 쓴 <환후묘기>에 따르면, "주의 동쪽에 장후(張侯)의 무덤이 있다. 지금까지 천여년간,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환후는 장비가 촉한에서 추봉한 시호이다.

현지백성들은 장비를 숭배하고 동정했다. 그리하여 그를 위해 묘우를 지었다.

촉한의 창업자인 한소열제 유비의 혜릉(惠陵)은 성도 무후사의 오른쪽에 있다. 제갈량에게 인기를 빼앗겨 사람들은 촉을 다스리는데 공이 있는 제갈승상을 더욱 그리워했지, 군주 유비는 아니었다. 당나라말기에 이르러, 유비의 고향인 탁현에 비로소 소열묘(昭烈廟)가 건립된다.

이는 당나라말기에 비바람에 흔들릴 때, 충의정신이 통치자가 숭상하는 도덕이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 한실의 충신으로 자처했던 유비는 이렇게 충의의 모범이 되어 영웅으로 숭배된 것이다.

관우가 "신격화"된 과정은 유비, 장비보다 더욱 연원이 길다.

관우가 손오에 피살된 후, 형주 일대의 백성들은 처음에 그를 여귀(厲鬼), 악신(惡神)으로 숭배한다. 원인은 원귀가 소동을 부려 동네에 위해를 가할까봐 두려워해서이다.

수나라에 이르러, 저명한 고승이자 천태종의 창시자인 지의(智顗)가 말년에 형주로 가서 불법을 전파하면서, 관우의 평생사적과 사후의 소문들을 알게 된다.

지의는 아주 혁신적인 사고를 한다. 현지에서 신도를 늘이기 위해,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사람들에게 관우, 관평부자의 혼이 나타나서, 꿈 속에 그에게 옥천산(玉泉山)에 절을 짓도록 청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우는 불교에서 "가람호법(伽藍護法)"으로 거두어지게 된다.

현지인들은 그 말을 듣고, 관우마저도 불교에 의해 진주(鎭住)되었다고 생각하여 속속 불문에 의탁하게 된다.

그후 도교도 관우의 가치를 깨닫는다.

송나라때 황제는 보편적으로 도교를 신봉했다. 도사들은 관우가 해주염지에서 요괴를 제압한 신화를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해주 일대는 관우의 고향이고, 이 이야기는 널리 퍼질 시장이 있었으며,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송휘종의 재위시기, 내우외환에 시달렸고, 충의쌍전의 영웅인물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관우를 "충혜공(忠惠公)"으로 봉하고, 나중에는 "무안왕(武安王)"으로 승격된다.

송,원이후,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 이야기가 점점 형태를 갖춘다. 사람들은 세 영웅호걸의 이야기를 통해 군신간의 한계를 돌파하고, 이성형제로 만든다.

소설 <삼국연의>가 유행하면서, 명나라때 소열묘를 중수하고, 묘안에 관우, 장비도 배치한다. 그리고 '군신처럼 앉은 것이 아니라, 형제처럼 나란히 둔다' 세 사람의 신상을 병렬시킨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유비, 관우, 장비는 나중에 각 업종의 업종신으로 모셔진다는 것이다. 편직업은 유비를 모시고, 도축업은 장비를 모시고, 관우는 금, 피혁, 두부등 수십개 업종의 업종신이 되며 더더구나 "무재신(武財神)"이 된다.

명청양대에 관우숭배는 최고조에 이른다.

명나라는 관우로 하여금 강자아(姜子牙)를 대체하여 국가무신(國家武神)으로 삼는다. 관우에게 존호를 보여한다: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遠鎭天尊關聖帝君). 이때부터 관제의 지위는 '지존무상'이 된다.

청나라가 들어온 후, 명나라를 이어 관우를 모신다. 동시에 청나라 통치자들은 남송악비의 묘가 천하에 널리 퍼져있는 것을 보고 악비의 최대공적이 바로 여진의 남침을 막은 것이므로, 그들은 관우의 지위를 더욱 끌어올린다. 그리하여 관우는 공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성인(武聖人)"으로 지위가 격상되어 악비의 명성을 뒤덮어버린다.

통치자들은 관우의 "충"을 찬양하지만, 민간에서는 관우의 "의"를 찬양한다.

유,관,장은 민간에서 비밀결사에서 모시는 신이 된다. 특히 관우는 명말청초 천지회에서도 그를 모시고, 근대이후에는 청방, 홍방에서도 그를 모신다.

묘당에서의 제사, 강호에서의 존중, 역사와 전설이 뒤섞인 '관이야(關二爺)'이미지는 충의의 상징이 되고, 유관장은 형제의리의 대명사가 된다.

사람은 역사를 창조하고, 신화를 창조한다. 그리고 시노하는 왕왕 현실을 반영하는 환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