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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54

적벽대전: 조조가 패배한 원인은 화공이 아니다? 글: 역사학당군(歷史學堂君) 역사상 적벽대전은 한말 삼분천하의 정치국면을 결정한 중대사건이다. 의 가공을 거쳐, 특히 설전군유(舌戰群儒), 초선차전(草船借箭), 차동풍(借東風), 장간도서(蔣幹盜書), 주유타황개(周遊打黃蓋), 화소적벽(火燒赤壁)등의 이야기로손류연합군이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대파한 민간기억을 채워놓았다. 그렇다면, 위, 촉, 오 삼국정립 국면을 확립시킨 적벽대전에서 결정적인 승패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중 결정적인 작용을 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정말 손류연합군이 동풍을 빌어, 조조의 전선을 태워버렸기 때문에 조조의 군대가 패배하게 된 것일까?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에 대하여, 최근 들어, 여러 연구자들이 삼국연의의 사고범위를 넘어, 역사로 되돌아가 더.. 2023. 8. 14.
"관도대전(官渡大戰)"에 대한 의문점 글: 이경서(李慶西) 에는 관도대전을 쓰면서, 관우(關羽)가 조조(曹操)의 백마(白馬)에서의 포위당한 상황을 풀어준 것부터 시작한다. 그 일은 제25회 후반부에 쓰여 있다. 원소(袁紹)는 대장 안량(顔良)을 보내 여양(黎陽)에서 황하를 건너게 했고, 안량은 황하남안의 백마에서 유연(劉延)을 증원하러 가던 조조의 군대와 부닥친다. 안량은 송헌(宋憲), 위속(魏續) 두 장수를 연이어 참하고, 무예가 뛰어난 서황(徐晃)마저 물리친다. 그리하여 조조군영의 여러 장수들은 전율하게 된다. 이때 정욱(程昱)이 나서서 추천하여 관우가 출전한다. 책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조가 산 아래 안량이 배치한 진세를 가리키며, 기치가 선명하고 칼과 창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엄정하고 위엄이 있어, 관우에게 말하기를, .. 2023. 6. 18.
동오(東吳) 역사상 3차례의 탁고(托孤): 1차례 성공, 2차례 실패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223년, 유비(劉備)는 백제성(白帝城)에서 탁고(托孤)한다. 같은 해,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諸葛亮)과 이엄(李嚴) 두 탁고대신은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즉위시킨다. 나중에 이엄은 제갈량과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파면당한다. 다만, 촉한은 제갈량의 통치하에 국력을 회복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조위에 적지 않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벡제성탁고는 비교적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동오의 역사에서도 3차례의 탁고가 있었다. 그러나 한번은 성공했지만, 두번은 실패하고 만다. 1. 손책탁고(孫策托孤) 건안5년 사월 사일(200년 5월 5일), 손책(孫策)은 단도산(丹徒山)에서 사냥하다가 허공(許貢) 문객의 암살을 당한다. 손책은 상세가 엄중했고,.. 2022. 11. 17.
"이사쟁공(二士爭功)": 위나라가 촉과 오를 멸망시킨 후 왜 두 공신의 다툼이 일어났을까? 글: 역사대학당(歷史大學堂) 삼국시대 말기에 사마소(司馬昭)가 주도한 조위(曹魏)가 촉한(蜀漢)을 멸망시키는 전쟁이 성공한 후, 종회(鍾會)와 등애(鄧艾) 두 공신간에 서로를 공격하는 '이사쟁공'의 비극이 일어난다. 이 이야기는 후세에 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고, 오늘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뿐아니라, 사마소의 아들인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馬炎)이 주도한 서진(西晋)이 동오(東吳)를 멸망시키는 전쟁에 성공한 후, 다시 한번 두 공신 왕혼(王渾), 왕준(王濬)간에 서로 반목하여 원수가 되어 다시 '이사쟁공'의 일막이 벌어진다. 유사한 상황이 유사한 과정을 거쳐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 사마씨가 주도하는 촉과 오를 멸망시키는 전쟁이 성공한 후, 항상 공신.. 2022. 7. 26.
삼국시대 12필의 명마(名馬) 글: 흔다적노력(很多的勞力) 적토(赤兎) 말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적토연지수(赤兎臙脂獸).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가 1장이며, 말굽부터 꼭대기까지 키는 8척이다. 포효하면 하늘로 오르고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이다. 이 말은 먼저 동탁(董卓)이 타가가, 나중에 양아들 여포(呂布)에게 넘겨준다. 인중여포, 마중적토는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여포가 죽은 후에는 조조(曹操)가 관우(關羽)에게 넘겨주고, 관우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한다. 관우가 죽은 후, 이 말은 여러 날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결국 굶어죽는다. 이 말은 말중의 극품일 뿐아니라, 의리를 아는 좋은 말이었다. 적로(的盧) 마작적로비쾌(馬作的盧飛快), 궁여벽력현경(弓如霹靂弦驚). 적로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아주 빨리 달리고, 아주 높이 뛴다. 비록.. 2022. 6. 16.
삼국시대 조위(曹魏)는 왜 5개의 도성(都城)을 두었을까? 글: 역사D학당 역사상 많은 왕조는 정치, 군사, 경제적인 여러가지 고려하에 수도 이외에 일부 중요도시에 도성을 설치했고, 그 지역중심 및 전략요충지로서의 작용을 발휘하게 했다. 예를 들어, 진나라때는 구도(舊都) 옹성(雍城)과 신도(新都) 함양(咸陽)을 두었고, 동한(東漢)왕조는 서경(西京) 장안(長安)과 동경(東京) 낙양(洛陽)을 두었으며, 명나라는 북도(北都) 북경(北京), 중도(中都) 봉양(鳳陽), 남도(南都) 남경(南京)의 세개의 도성을 두었다. 그런데, 삼국시대 조위는 그중 특별한 경우이다. 나라의 강역은 북방의 절반인데, 다섯개의 도성을 설치한다. 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위나라는 장안(長安), 초(譙), 허창(許昌), 업(鄴), 낙양(洛陽)을 오도(五都)로 하였다" 도성의 수량은 심지어 강.. 2021. 12. 12.
칠종칠금(七縱七擒)(II): 맹획은 남만의 오랑캐가 아니다. 글: 의사리(衣賜履) 건흥3년(225년)의 봄날, 제갈량은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 남하한다: 문하독(門下督), 파서군(巴西郡, 사천성 낭중시)사람인 마충(馬忠)이 장가군(牂牁郡, 귀주성 복천현)을 공격하고, 내항도독(庲降都督) 이회(李恢, 이때의 이회는 평이현에 주둔하고 있었고, 평이현은 장가군 소속이며 귀주성의 필절시이다)은 익주군을 공격하고, 제갈량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수로를 통해 월전군(越嶲郡, 사천성 서창시)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건위군태수이자 광한 사람인 왕사(王士)를 익주군태수로 임명한다. 오랑캐왕 고정(高定)은 모우현(旄牛縣, 사천성 한원현 동북), 정작현(定筰縣, 사천성 염원현), 비수현(卑水縣, 사천성 소각현)의 일선을 따라서 내려오며 많은 보루에 주둔시켰다. 제갈량은 고정의 인마가 .. 2021. 10. 25.
칠종칠금(七縱七擒)(I): 제갈량은 왜 직접 남정에 나서야 했을까? 글: 의사리(衣賜履) (제갈량의 "칠종칠금"은 삼척동자도 아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제갈량은 일곱번이나 소수민족의 우두머리인 맹획을 붙잡은 후, 잘 먹이고 대접한 다음 보내주고 다시 싸운다. 맹획은 결국 제갈량에게 완전히 굴복한다. 그때부터 촉의 남쪽에 있는 소수민족은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제갈량과 맹획은 마치 민족융합을 상징하는 천고의 아름다운 한쌍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럼 실제 상황이 그러할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유비가 사망하기를 전후하여, 익주의 남부지역에서는 여러번 반란이 일어난다. 유비의 후사를 처리한 후, 관료들을 정돈하여 조정의 상하관계를 바로잡은 후 제갈공명은 남부지역에 손을 쓰기로 한다. 다만 그 전에 반드시 해야할 일이 하나 있었다. 동오와의 연합 유비가 .. 2021. 10. 23.
위,촉,오 삼국의 승상제도는 어떻게 달랐을까?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삼국이 정립된 후, 가장 먼저 건국하여 황제를 칭한 위(魏)는 승상을 두지 않는다. 그후에 건립된 촉(蜀)과 오(吳)는 처음부터 승상을 둔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오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승상을 두었지만, 촉한은 제갈량이후에 더 이상 승상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위나라. 건안13년 조조가 승상에 오른다. 건안18년에 이르러 조조는 위공(魏公)이 되고, 기주(冀州)내의 10군은 그의 봉지가 된다. 두달 후, 조조는 위나라의 종묘사직을 건립하고, 십일월에 이르러, 상서(尙書), 시중(侍中)과 육경(六卿)을 설치한다. 원래 건안연간에, 조정백관은 모두 조조의 말을 들었고, 승상이 되었으며, 승상부를 두며, 모든 정령은 승상부에서 나왔다. 조조.. 2021. 10. 19.
이릉지전(夷陵之戰)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이릉지전은 동한말기 3대전투중 하나이고, 또한 최후의 대형전투이다. 이 전투이전에 촉한과 동오의 합작관계는 육손이 관우를 기습함으로써 끝났다. 쌍방은 전우에서 적이 된 것이다. 조위는 그래서 잠시 숨돌릴 기회를 갖느다. 촉한은 이 전투에서 일패도지했고, 명장과 정예병사들의 손실이 참혹했다. 이릉지전을 시작하기 전에, 동오는 위에서 아래까지 촉한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어쨌든 육손이 한 행위는 군자의 행동은 아니었다. 동맹국이 적국과 싸우는 틈을 타서, 힘을 보태지 않는 것 정도라면 몰라도, 오히려 등뒤에서 칼질을 했다. 그리하여 관우, 관흥 부자는 피살되고, 유비, 유봉부자는 멀어졌으며, 맹달이 촉한에 투항하고, 더더욱 간접적으로 장비의 죽음을 가져온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2021.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