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위촉오 삼국의 화폐정책: 건위오수(犍爲五銖)와 대천오백(大泉五百)

중은우시 2024. 11. 20. 12:02

글: 천료역사재(淺聊歷史齎)

서론

중국고대의 화폐주조는 매우 골치아픈 일이었다. 왜냐하면 전폐(錢幣)의 분량도 맞추어야 하고, 색깔도 아주 중요했다. 한무제(漢武帝) 이전에는 전폐의 상황이 거의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동전주조기술을 장악한 후에는 대량으로 열악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한다. 이들 열악한 동전을 시중에 유통시킨 후, 양호한 동전은 자신이 가져온다. 그리고 양호한 동전을 이용하여 다시 열악한 동전을 주조한다.

예를 들어, 여기서 말하는 열악한 동전에 4전의 구리가 필요하다면, 양호한 동전에는 8전의 구리가 필요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후, 유비는 양호한 동전을 회수하여, 양호한 동전 1개로 열악한 동전 2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순환되면 백성들이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동전은 여전히 같지만, 오왕 유비만 승리자가 되는 것이고, 그의 주머니에는 동전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동전의 구매력은 기실 절반으로 하락하게 된다. 부가 감소했을 뿐아니라, 그 감소한 부는 유비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한무제는 화폐를 개량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는 유명한 오수전(五銖錢)을 발명한다. 이 동전의 중량은 오수(五銖)이다. 이 동전에는 가짜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리하여 화폐환경을 양호하게 개선했고, 오수전은 동한말기까지 계속하여 사용된다.

  1. 동한말기, 오수전의 가치하락이 심각했고, 백성들은 물건을 구매하는데 불편했다.

동한말기에 이르러,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동전은 이미 가치가 많이 하락했다. 특히 황건적의 난 이후, 전란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논밭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적어지고, 자연재해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식량생산이 크게 감소한다.

동한은 농업대국인데, 경작하는 양식이 심각하게 줄어들자, 많은 사람들이 굶는 상황이 발생한다. 먹을 것이 없으면 군대에 들어가 병사가 된다. 그리하여 병사는 많아지고 농사짓는 사람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다음 해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병사가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착실하게 농사짓는 사람은 몇몇 남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동한 말기에는 무엇이 가장 비싸졌을까? 바로 양식이 가장 비싼 물건이 되어버린다.

오수전은 비록 사용하기에 아주 편리하지만, 이것으로 양식생산량의 심각한 감소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동전의 가치는 부지불식간에 절하된다. 다른 물건이라면 그래도 괜찮다. 옷같은 경우에는 화려한 의복이 비싸면, 싼 것으로 사서 입으면 된다. 도시의 집값이 비싸면, 교외로 나가서 사서 살면 된다. 그러나 식량은 그렇지가 않다. 매일 모든 사람이 먹어야 한다. 식량이 부족해지면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게 된다. 이렇게 되면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 양식을 구매하려면 한 가마니의 오수전을 등에 지고 가서 사와야 한다. 식사를 하려고 해도 목에 오수전을 목걸이처럼 가득 달고 가서 먹어야 한다. 그래서 백성들의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화폐 자체의 품질이 하락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오수전은 여전히 무게 그대로 오수전이고, 재질도 원래 그대로이다. 다만 이때의 오수전으로는 물건을 많이 살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동인(銅人)과 종거(鐘虡, 종을 거는 틀)를 모조리 부수고, 오수전을 없애고, 다시 소전(小錢)을 주조했는데, 크기가 오푼이고, 글도 없으며, 두텁고 윤곽도 없으며, 매끈하게 갈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돈은 가치가 없고, 물건은 비싸져서 곡물 1곡(斛)에 수십만전이 되어, 그후부터 화폐로 물건을 살 수 없게 된다." <삼국지.동탁전>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상품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싸진 것이다. 나중에 시장에서 동전은 유통되지 않게 된다.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물물교환을 하는 원시시대로 회귀하게 된다.

2. 유비의 건위오수(犍爲五銖), 문제해결과 동시에 착취도구가 되다.

이때 우리의 비교적 인의로운 군주라는 유비가 등장한다. 그가 등장하는 방식은 비교적 특별하다. 등장하자마자 그는 새로운 동전을 내놓는다. 이름하여 "건위오수"이다.

"건위오수"란 무엇인가? 이건 재미있다. 왜냐하면 이 동전은 "건위군"이라는 곳에서 주조한 것이기 때문에 건위오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전의 액면가격은 아주 크다. 1개의 건위오수는 100개의 오수전에 해당하는 것이다. 유비집단은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 여러분은 동전으로 거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화폐의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이건 겉으로 보기에는 백성들의 편의를 위한 조치이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방법이다.

이전에는 식당에 갈 때 가마니에 오수전을 넣어가야 했지만, 지금은 건위오수 몇개만 가지고 가면 된다. 다만 건위오수의 출현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불러온다. 그것은 바로 시장에서 오수전이 갈수록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사회총자산의 양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그 줄어든 부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원래 모조리 유비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이었다. 유비가 발명한 이 건위오수는 액면가치가 오수전의 100배에 달하지만, 중량은 여전히 예전 오수전과 같은 중량이다. 그는 단지 앞면에 액면가격만 100배로 적었을 뿐이다. 이건 미친 짓이다. 유비는 동전주조기술을 장악한 후, 무수한 오수전을 회수하여 다시 액면가격이 100배인 건위오수로 주조하여, 시중에 내놓았던 것이다.

새로 1개의 건위오수를 만들면 100개의 오수전으로 바꿀 수 있다. 다시 바꿔온 오수전을 건위오수로 주조하게 된다. 이렇게 1대 100으로 유비는 백성들의 돈을 긁어간 것이다.

"처음에 유장을 공격할 때, 유비는 사중(士衆)들과 약속을 한다. 만일 일이 성사되면 부고(府庫)의 물건은 내가 간섭하지 않겠다. 마침내 성도를 점령하고, 사중들이 무기를 버리고 창고로 달려가서 재화를 취했다. 그렇게 되니 군사비용이 부족해져서, 유비가 고민하게 된다. 유파가 말하기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백전을 주조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여 물가를 잡고, 관용화폐로 삼으면 됩니다' 유비가 그의 말에 따랐고, 몇달만에 부고가 충실해진다." <삼국지.유파전.배송지주>

당연히 유비집단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돈은 조조와 싸우는데 쓸 것이다. 어쨌든 유비집단의 백성은 모두 한나라의 회복을 원했고, 자신이 아무리 심하게 착취당하더라고 관계없었다. 관건은 대한왕조를 회복시키는 것이기 떄문에.

3. 손권의 대천오백은 더욱 심하다. 좋은 것은 배우지 않고 나쁜 것만 배웠다.

손권도 야심이 큰 인물이다. 그는 촉한의 유비가 동전을 주조하여 민간자본을 끌어모으는 것을 보고 자신도 따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도 국내의 자본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고 싶었다. 백성들이야 먹을 것만 있으면 된다. 지나치게 부유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배부르면 음욕이 생각나는 법이니까. 겨우 먹고살만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상을 가지고 손권은 대천오백이라는 동전을 만든다. 이 동전은 너무 심했다. 같은 원리로 유비는 겨우 100배짜리를 만들었는데, 손권은 500배짜리를 만든 것이다.

손권은 돈이 부족했던 것같다. 그는 어떻게 하면 최단기간내에 돈을 모조리 긁어모을지를 생각한 것같다. 그래서 나중에 1대 500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계속 신상품을 내놓는다: 대천당천(大泉當千), 대천이천(大泉二泉), 심지어 대천오천(大泉五千)까지.

"손권 가화5년, 대전(大錢)을 주조하여 1당 오백으로 했다. 적오원년, 다시 1당 천전을 주조한다. 그리하여 여몽이 형주를 차지했을 때, 손권은 여몽에게 전1억을 하사한다. 돈의 금액은 크지만 쓸모는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우려하게 된다. 손권은 백성들이 불편해 한다는 것을 듣고 유통을 중단시키고, 기물을 주조했으며, 관청에서도 다시 내놓지 않게 된다. 백성들이 가지고 있으면 보관한 것을 보내게 하여 그 가격을 낮게 맞추었고, 바르지 못한 것이 없어지게 했다."(<진서.식화지>)

이는 짐바브웨와 유사하다. 돈은 모조리 손권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동오의 백성들은 모두 순민이 아니었다. 그들이 반항했다. 이런 대전행위에 엄중하게 항의한 것이다.

손권은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급히 대전주조를 멈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일정비율로 규제하여, 백성들이 가진 대전을 오수전으로 바꾸어가도록 했다.

당연히, 대천오백이라고 하여 오수전 500개를 주지는 않았다. 일정한 비율로 교환해 주었다. 그것만 해도 손권이 크게 선심을 쓴 것이다.

4. 오수전의 가치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전을 주조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천재지변으로 오수전의 가격은 계속하여 하락한다. 당시의 필수품은 부동산이 아니라 양식이다. 배부르게 먹는 것이 백성들의 가장 기본적인 바램이었다.

위문제는 황초2년 오수전을 폐기하고, 백성들이 곡백(穀帛)으로 시장에서 교환하게 한다. 위명제에 이르러, 동전을 없애고 곡백을 쓴지 오래되자, 사람들은 교묘하게 장난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젖은 곡식으로 이익을 보거나, 품질이 떨어지는 견(絹)으로 거래를 했다. 비록 엄한 형벌로 처벌하였지만 금지되지 않았다. 사마지(司馬芝)등이 조정에서 크게 의논하여, 동전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형벌도 줄일 수 있으니 지금 다시 오수전을 주조하면 나라도 부유해지고 형벌도 줄일 수 있으니, 국가의 일처리에도 편리하다고 판단한다. 위명제는 그리하여 다시 오수전을 주조하고 진나라때도 사용하며, 고치거나 새로 만들었다는 말은 없었다. <진서.식화지>

오늘은 10전으로 쌀 한가마니를 사지만, 내일은 20전으로 쌀 한 가마니를 살 수도 있다. 그리고 매일 구매할 수 있는 쌀의 수량은 유한하다. 즉, 백성들의 집에 양식을 저장하고 있지 않으면, 매일 물가상승의 재난이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모두 마대로 돈을 들고가서 물건을 사야 한다. 유비와 손권은 이런 상황을 보고 아이디어를 내서 대전을 주조하는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오수전은 우리의 대전으로 바꾸어 가라. 그렇게 되면 너희는 대전으로 거래할 수 있다. 대전은 조금만 가지고 다녀도 된다. 그러니 좋지 않은가? 이 이유는 그럴 듯하긴 하다. 만일 표준적인 순민이라면, 단기간내에 거기에 숨겨진 이해관계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기실 여기에서의 문제는 대전이 정말 대전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느냐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대전을 발행하는 정권은 정말 신뢰할만한가라는 것이다. 만일 유비집단이 정말 천하를 통일한 정권이라면, 이 돈은 전국각지에서 유통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유비의 건위오수는 촉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손권의 대천오백은 강동에서만 유통된다. 바꾸어 말하면, 촉한의 상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건위오수로 동오에 가서 양식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동오의 상인도 가지고 있는 대천오백으로 촉한으로 가서 양식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건위오수와 대천오백간에는 서로 교환의 가능성이 없다. 이렇게 되니 백성들이 가진 대전은 갈수록 많아지는데, 유비, 손권의 주머니는 오수전으로 가득차게 되어버린다.

그들은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오수전을 점점 빼앗아간 셈이고, 백성들에게는 그다지 구매력이 없는 대전을 남겨준 것이다. 대전은 확실히 휴대에 편리하지만, 유통에는 불리하다.

5. 조비는 오수전을 유지했고, 그래서 그의 강산은 공고했다.

제갈량은 온갖 방법을 써서 조위의 강산을 멸하고자 했다. 그러나 왜 배수거신(杯水車薪)의 느낌일까? 기실 그건 아주 정상적이다. 조위의 백성들은 평안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위의 경제는 극히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촉한은 지방정권으로 조위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든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건 바로 조비이다. 이전에 동탁이 대전을 주조했던 일이 있다. 그것으로 북방집단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이했었다. 그 어떤 화폐도 북방에서 유통되지 못했다. 오직 오수전만이 약간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비가 등극한 후,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수전을 폐지하지 않고, 계속 이 화폐를 사용한다. 일정한 시간동안 백성들의 안정을 보장해준 것이다.

그러나 조위도 마찬가지로 식량감산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런 문제에 부닥쳤을 때, 조비도 참지 못하고 대전을 발행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수전을 쓸 수 없다면, 아예 백성들에게 돈으로 거래를 하지 말도록 한다. 물물교환을 진행하던 시대도 있었다. 시장이 자유로운 시장이면 되는 것이다. 조비가 오수전을 고집한 것은 심지어 단기간내에 물물교환방식으로까지 진행시킨 목적은 간단했다. 조비는 이런 방식으로 촉과 오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역시 조비의 곁에는 고수들이 있었다. 그들이 조비에게 한 건의는 화폐안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백성들의 정권에 대한 신뢰의 기초이다. 그래야 정권이 발행하는 화폐에 신뢰를 가진다. 일단 화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그 정권은 오래 갈 수가 없다. 이런 상황하에서, 촉한과 동오는 모두 크게 타격을 입는다. 오직 조위만이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 화폐가 삼국의 앞날을 결정했고, 조위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비록 마지막에 천하를 통일한 것은 사마씨가족이지만, 사마씨가족은 조씨의 모든 기업을 그대로 승계했다. 조비의 화폐제도를 포함해서. 그래서 당시의 조위가 가장 강대했던 것이다.

촉한을 보자. 여러 해동안의 소모로 일찌감치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화폐정책의 실패로, 촉한의 내부소모는 아주 컸다. 경제가 낙후하는 동시에 백성들도 조정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는다. 동오는 약간 좋았다. 그 원인은 손권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후에 과감하게 대전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동오는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천하를 통일한 조위는 기실 화폐정책이 가장 안정적이었던 국가이다. 조비는 시종 오수전의 사용을 견지했다. 그 자체는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누가 합리적인 화폐정책을 쓰는지가 누가 전장에서 승패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확실히 촉한은 이 점에서 가장 엉망인 정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