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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701

북양대학당(北洋大學堂, 천진대학의 전신): 중국근대 최초의 대학 글: 매화서향(梅花書香) 중국 근대 최초의 대학 즉 천진의 북양대학(지금의 천진대학 전신)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895년, 사상유례없던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지 단지 몇달이 지난 후에 천진해관의 성선회(盛宣懷)는 청나라조정에 주청을 올려 천진에 “서학체용(西學體用)”의 북양서학당(北洋西學堂)을 개설할 것을 요청한다. 확실히 패전후에 깊은 반성을 통해, 지방과 중앙정부는 누습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서양식 학당’을 열도록 만들었다. 광서제는 신속히 조서를 내려 허락한다. 그리하여 얼마 후 ‘국립북양대학당’이라고 불리는 신식 대학이 천진 해대도량원문 밖(지금의 대고로 대영문외 해하중학, 해방남원 일대)의 박문서원(博文書院) 옛 부지에서 학생을 모집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성선회는 학당독판(督.. 2022. 6. 2.
우의관(友誼關)의 역사와 현황 글: 소여자대인물(小女子大人物) 자종실관애(自從失關隘) 국탕무번리(國蕩無藩籬) - 유극장(劉克莊), 중화대지에 있어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관애(關隘)는 험요(險要)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중원을 침략하는 자들을 막는 외에 천하의 대문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긴 강물을 살펴보면, 이들 관애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은 부지기수이고, 거기에는 강개비장, 음한매골의 이야기가 있으며 오랑캐를 멀리 쫒아낸 역사는 피를 들끓게 만든다. 관애, 성벽에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예전의 칼자국 도끼자국이 남아 있고, 불에 탄 흔적도 있어, 역사의 창상을 보여준다. 이들 관애중에서 특히 산해관(山海關), 안문관(雁門關), 가욕관(嘉峪關)등 9대관애가 가장 치명적이다. 거기에는 지금의 우의관도 포함된다. 그러나 "우의관"이라는.. 2022. 5. 25.
내가 아는 북경대학 교수들의 집안내력(3): 기타학과 글: 양문리(楊文利) 진대손(陳垈孫) 경제학원 교수 진대손은 복건 민후(閩侯) 사람이다. 나강진씨(螺江陳氏)는 명문거족이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도 계속 이어지고 관료가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증조부 진승구(陳承裘)는 함풍때 진사로 아들 7명을 낳았다. 한명이 요절한 외에 나머지 6명은 모두 인재로 자란다. 장남 진보침(陳寶琛), 차남 진보진(陳寶瑨), 삼남 진보로(陳寶璐)는 전후로 진사가 된다. 사남 진보기(陳寶琦), 육남 진보선(陳寶瑄), 칠남 진보황(陳寶璜)은 모두 거인이 된다. 세칭 "부자4진사, 형제7과갑'이 된다. 집안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조부 진보로는 형부주사를 지냈고, 박학통경했다. 부친 진무예(陳懋豫)는 광서때 거인으로 경방효율학당을 졸업하고, 해군학교에서 재직했다. 진대손은 어려서부터.. 2022. 4. 30.
내가 아는 북경대학 교수들의 집안내력(2): 역사학과, 철학과 글: 양문리(楊文利) 3 주일량(周一良) 가학을 이어받은 역사학과 교수중 내가 아는 분으로는 주일량 선생이 최고이다. 건덕주씨(建德周氏)는 양(良)자배에 이르러 이미 4대동안 인재들이 속속 배출되어 절강에서 유명한 명문집안이 된다. 증조부 주복(周馥)은 양광총독, 병부상서에 이르렀고, 이홍장(李鴻章)이 발탁하여 중용했고, 일찌기 천진무비학당, 복단대학, 안휘공학의 창립에 참여했다. 조부인 주학해(周學海)는 광서때 진사로 의학(醫學)을 깊이 연구했다. 숙조부 주학희(周學熙)는 실업으로 이름을 떨쳤다. '남장북주(南張北周)'(남쪽은 장건(張謇) 북쪽은 주학희)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부친 주숙도(周叔弢)는 실업에 종사하며, 고적의 감별에 뛰어났다. 당숙 주숙가(周叔迦)는 불학에 정통했다. 한때 북경대학에서.. 2022. 4. 30.
내가 아는 북경대학 교수들의 집안내력 (1) : 중문과, 외국어과 글: 양문리(楊文利) 1 임경(林庚) 내가 처음 북경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1980년대가 끝나가는 때였다. "북대중문사로(北大中文四老)"중 한명인 임경(林庚) 교수가 은퇴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이상 본과학생들에게는 수업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너무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했다. 그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없어서 유감으로 여겼다. 그래도 임경 선생의 풍채를 직접 보고, 그의 강의를 들을 기회는 있었다. 개략 당시(唐詩)에 관한 강의였고, 제목은 기억이 희미하다. 나이 팔순의 임선생은 비단장삼을 입고, 소쇄여소년(瀟灑如少年)하고 표일여선자(飄逸如仙子)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임선생은 명문집안 후손인 것을. 부친 임재평(林宰平)은 광서때의 거인(擧人)으로 일찌기 일본으로 건너가 법률을 배웠다. 그러나.. 2022. 4. 30.
상하이 문혁식방역의 4가지 실책 글: 미소(米笑) "왜 문화대혁명을 했는가?" 당시, 나는 의문을 가지고 한 홍위병에게 물어보았다. "만일 문화대혁명을 하지 않아서 중국이 '변수(變修, 수정주의로 바뀜)'되면 어떡할 거냐?" 그는 근심이 가득찬 얼굴로 대답했었다. '변수'는 문혁이 가정한 전제이다. 반수방수(反修防修)의 구호하에 공장의 가동을 멈추고, 생산을 중단하고, 학교를 문닫고 전인민이 운동에 나선다고 해도, 그 모든 미친 짓이 합리화되는 것이다. "만일 청령(淸零, 제로코로나)하지 않아서 사람이 죽으면 어떡할 거냐?" 이것이 상하이방역이 가정한 전제이다. 생명을 보호한다는 구호하에, 공장의 가동도 멈추고, 생산도 중단하고, 학교도 문을 닫았다. 전체인민(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이 운동방역에 나서는 것이고, 모든 미친 짓은 합리화된.. 2022.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