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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우의관(友誼關)의 역사와 현황

by 중은우시 2022. 5. 25.

글: 소여자대인물(小女子大人物)

우의관

자종실관애(自從失關隘)

국탕무번리(國蕩無藩籬)

   - 유극장(劉克莊), <잡흥(雜興)>

 

중화대지에 있어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관애(關隘)는 험요(險要)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중원을 침략하는 자들을 막는 외에 천하의 대문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긴 강물을 살펴보면, 이들 관애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은 부지기수이고, 거기에는 강개비장, 음한매골의 이야기가 있으며 오랑캐를 멀리 쫒아낸 역사는 피를 들끓게 만든다.

 

관애, 성벽에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예전의 칼자국 도끼자국이 남아 있고, 불에 탄 흔적도 있어, 역사의 창상을 보여준다. 이들 관애중에서 특히 산해관(山海關), 안문관(雁門關), 가욕관(嘉峪關)등 9대관애가 가장 치명적이다. 거기에는 지금의 우의관도 포함된다. 그러나 "우의관"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많은 노병들은 원래의 이름으로 되돌리자고 주장한다. 진남관(鎭南關).

 

1. 우의관의 내력

 

우의관은 광서 핑샹시(憑祥市)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핑샹시에서 18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왼쪽은 좌필산(左弼山)성벽이 있고, 오른쪽은 우보산(右輔山) 성벽이 있다. 마치 거대한 뱀이 두 산의 산록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같이 기세가 대단하다. 322번국도의 끝은 우의관을 통과하여, 베트남의 도로와 연결된다. 이는 베트남으로 통하는 중요한 육로통로이자 국가의 1류 통관처이다.

 

다른 유명한 관애들과 마찬가지로, 우의관도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찌기 한(韓)나라때 이미 중화대지의 남쪽끝에 서 있었다. 그 명칭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번 바뀌었다. 한나라때의 이름은 옹계관(雍鷄關)이었고, 대남관(大南關), 계수관(界首關)이라고도 불리웠다.

 

그러나 명나라 홍무연간에 계릉관(鷄陵關)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영락연간에는 진이관(鎭夷關)으로 변경되며, 선덕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진남관이라 칭해진다. 그리고 청나라때도 이 이름으로 계속 불렸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1953년 목남관(睦南關)으로 명칭이 바뀌고,1965년에는 정식으로 우의관이라 칭해진다. 

 

그렇다면, 우의관의 역대명칭변경을 살펴보면 그중 관애성격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근대 목남관 및 우의관이라는 두 명칭의 배후에는 중국베트남간의 우의의 변화가 있다. 그리고 무수한 노병들이 진남관이라는 명칭으로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중국건립초기, 1950년 1월 18일 중국은 베트남과 정식으로 수교한다. 베트남측의 상황이 어려웠으므로, 중국도 스스로 힘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여러번 베트남에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중국베트남수교초기, 베트남은 여전히 내란중이었고, 북베트남은 호치민을 지도자로 하는 사회주의국가였고, 중국,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진영의 지지를 널리 받았다. 남베트남의 배후에는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본주의국가진영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외교사무의 베트남에 대한 원조는 당연히 북베트남을 향했다.

 

중국은 국제적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국가로 승인한 최초의 국가였다. 비록 그때의 베트남은 여전히 분열상태였지만, 중국은 여전히 그들을 굳건하게 지지했다. 그리하여 양국관계가 초보적으로 건립된 후, 호치민은 주은래 총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주은래 총리는 중국이 대량의 군용작전물자를 제공할 것과 베트남이 프랑스식민군에 저항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

 

1950년 5월 15일, 베트남은 식량부족을 이유로, 중국측에 다시 한번 1,500톤 내지 2,000톤의 쌀을 공급하여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주도록 요청했고, 중국은 이를 악물고 이를 도와준다.

 

1950년에서 1954년까지 4년동안, 중국정부는 베트남정부에 1.67조위안의 원조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때 중국정부는 아직 한국전쟁으로 힘든 상태였지만, 베트남에 상당한 수량의 원조를 제공해준 것이다. 그리고 이는 베트남원조의 시작이었고, 그후에도 중국베트남의 우의는 더욱 굳건해진다.

 

1971년 중국과 베트남은 무상원조협의 7건을 체결하고, 원조금액은 36.1조위안에 달한다. 1972년 국가재정부의 대외원조지출은 51.49조위안이었는데, 이는 국가재정지출의 6.7%에 상당했으며, 중국건국이래 대외원조에서의 기록을 계속하여 갱신했다.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원조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베트남의 중대자연재해에도 공동으로 대응했고, 각종 기초군사공업시설의 건설도 도와주었다.

 

신중국도 당시 가난했던 점으로 보면, 이는 주머니를 다 털어서 도와준 셈이다. 그리하여 주은래 총리는 일찌기 베트남지도자에게 이렇게 솔직히 말한 적도 있다: "너희를 지원하기 위하여, 우리는 최대의 민족희생도 감수하고 있다."

 

당연히,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원조는 절대로 경제적인 분야에 그치지 않았다. 더욱 많은 것은 중국의 베트남전쟁때 힘을 아끼지 않고 지원해준 것이다. 만일 중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베트남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베트남전쟁은 1955년 11월부터 1975년 3월까지 진행된다. 사회주의진영의 지지를 받은 북베트남 및 바존주의진영의 지지를 받은 남베트남은 베트남국가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최종결과는 북베트남이 승리하여 베트남전국을 통일하면서 끝난다.

 

이번 전쟁의 전체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한 원조외에 중국은 여러 방면에서 베트남이 국가를 안정시키도록 도와주었다. 1962년에는 베트남의 요청에 따라, 중국은 무상으로 230개 대대를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장비를 제공한다.

 

1965년, 중국은 북베트남에 철도병, 공병, 고사포병등 부대를 파견하여 북베트남이 미군의 폭격에 대항하고, 철도운수를 보수하고 중요도로, 공항을 건설하며, 부근섬에 상륙을 막기 위한 긴급대비공사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65년에서 1969년까지 중국은 17만명을 베트남전쟁에 투입했다.

 

이상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중국이 베트남에 대하여 한 지원은 "목남관" "우의관"이라는 이름에 들어맞는다고. 그러나 모든 것이 이뿐이었다면, 노병들이 진남관으로 이름을 다시 고치자는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전쟁때문이다.

 

2. 중월전쟁

 

베트남이 통일로 독립한 후 자연히 중국의 도움에 감사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두 개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양국관계는 점차 대치하게 된다.

 

최초에 중국과 소련은 같은 공산주의국가로 서로 도와주는 관계였지만, 관계가 그다지 좋지는 못했다. 어쨌든 소련은 그때 실력이 대단했고, 인근국가중 중국같은 대국은 자연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자연히 여러방면에서 중국의 발전을 견제한다. 

 

그러나 나중의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중국은 미국과 완전히 적대관계에 처하게 되면서 소련과 입장을 일치시킨다. 그리하여 점차 소련의 진영에 흡수된다. 그러나 이런 우호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열되고 끝난다. 그동안 대체로 소련은 중국에 공업화를 도와주었고, 다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고 전문가들을 귀국시킨다.

 

중소관계가 파열된 것은 소련측이 강경한 태도로 중국의 발전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지시하자, 중국측이 불만을 갖게 된 것이고, 점차 양국은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트남은 일찌기 자신을 도와주었던 두 국가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때 소련은 중국보다 훨씬 강했다. 그래서 베트남은 소련에 더욱 가까워진다. 중국과의 우호관계는 버리게 된다. 당연히 중소관계 및 중월관계가 깨지게된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

 

중국은 소련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었고, 독립된 개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은 미국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건립하고자 한다. 미국측에서도 중국을 이용하여 소련을 견제하려 한다. 그리하여 쌍방은 입장이 일치했고, 닉슨방중이라는 사건이 벌어진다. 미중관계가 점차 풀리게 된 것이다.

 

이와 도잇에 중소관계는 악화된다. 그리고 베트남은 베트남전쟁때문에 미국에 대하여 여전히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원한을 중국으로 옮겨간다. 이런 두 가지 원인으로 중월관계는 철저히 깨지게 된다.

 

소련의 도발과 종용하에 베트남은 자칭 "제3군사강국"이 되어 중국과의 국경에서 계속 중국영토를 잠식해 들어왔다. 동시에 중국의 우호국인 캄보디아를 침략한다. 소련과 같은 대외확장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베트남이 중국영토를 대거 침입하자, 중국의 국경주변인민들중에 사상자가 발생한다. 인민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영토의 안전이 위험한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중앙군사위는 명령을 하달하여 베트남과 전쟁을 개시한다. "대월자위반격전(중국에서 중월전쟁을 부르는 명칭임)"은 이렇게 시작된다.

 

중국은 베트남의 계속된 도발에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비록 전쟁을 시작했지만, 오랫동안 실전경험이 없었으므로, 강경한 태도로 중국의 실력을 과시함으로써 베트남을 위협하고자 한 것이다.

 

1979년 2월-3월 이미 국경에 결집한 중국부대는 베트남으로 침공한다. 단기간내에 베트남북부의 20여개 중요도시들을 점령한다. 그리고 1달내에 베트남에서 철군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3월 16일 모두 국경선내로 철수한다.

 

그리고 중국군대는 철수하는 과정에서 이전에 베트남에 원조했던 대량의 물자를 회수한다. 또한 베트남의 군사시설, 도로, 철로, 광산도 파괴한다. 이 조치로 베트남은 오랫동안 경제를 회복시키는데 애를 먹었다. 다만 이런 물자는 원래 중국이 원조한 것이고, 중국이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월전쟁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한 전쟁이었다. 어느 정도 베트남북부지역이 함락되었지만 전후로 걸린 시간은 1달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베트남에서는 이렇게 패배하고 끝내려 하지 않은 것이다. 중국군대가 철수한 후, 베트남군대가 신속히 반격한다. 그러나 중국이 국경선에서 막아냈고, 중월전쟁은 그후 10년 가까이 지속된다.

 

중월전쟁과정에서 중국은 막 '십년동탕'이 끝난 때여서, 군대내부가 다 새로 바뀌었다. 절대다수의 군인, 병종, 장비는 모두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다만 전술사상은 여전히 한국전쟁시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전쟁을 경함하지 않은 폐단이 그대로 드러나고 여러가지 문제가 폭로되었다.

 

3. 노병의 숙원

 

전쟁이 있으면 사상자가 발생한다. 중월전쟁과정에서 중국측의 사상자는 27,000여명에 달한다.

 

전쟁은 쌍방 모두에게 참혹한 경험이고, 양국인민들에게도 씻기지 않는 상처이다. 마찬가지로 해를 입은 것은 양국의 경제와 우호관계였다. 

 

그래서, '우의관'이라는 명칭은 이미 명존실망(名存實亡)하게 된다. 그리고 중월전쟁에 참가했던 중국노병에 있어서, 그들이 '우의'라는 두 글자를 보는 것음 심한 아이러니이고, 마음 속으로 도저히 동의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전쟁에서 동포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았고, 베트남인들의 총에 전우가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어찌 '우의'라는 두 글자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진남관이라는 명칭을 보면, 그들이 보기에 훨씬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노병들이 '우의관'이라는 글자에 부정적인 감정을 지니게 된 것에는 또 다른 하나의 사건도 관련이 있다.

 

그때 중월전쟁에서 중국군인들이 철수한 후, 베트남에서 포병부대 하나가 전진하여 우의관부근을 포격했다. 그리하여 중국인민들의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다. 중국군대가 반격할 때 그 포병부대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노병들은 그 포병부대를 궤멸시키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전쟁이 끝난 후, 알 수 있었다. 그 포병부대는 소련의 선진적인 장비를 갖추고 미사일을 쏘았다는 것을. 이 분야의 경험이 부족했던 중국으로서는 그 포병부대의 종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 장비는 당연히 소련이 제공했다.

 

어쨌든 중월전쟁으로 소련이 어부지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중국은 중월전쟁을 벌이면서 대량의 군대를 중소국경에 배치해서 소련의 침공에 대비했다.

 

결론적으로 노병들이 "우의관"에 불만을 가진 것은 주로 베트남측에서 중월우호를 대거 파괴했기 때문이고, 쌍방의 군민에 많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양국우의를 상징하는 우의관까지 포격했다. 실로 노병들이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외에 '진남관'이라는 글자는 후세인들에게 역사의 귀감으로 삼게할 수 있다. 주변국가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동시에 대비하는 마음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들 노병의 숙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마도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이미 중월전쟁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만일 당시에 얘기했더라면 혹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정상화되었고, 서로간에 긴밀한 합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만일 갑자기 "진남관"으로 바꾼다면, 그것이 지닌 의미는 베트남이 민감하게 대응할 것이다. 아마도 베트남만이 아니라 주변국가들이 모두 중국에 호의를 품지않게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 중국이 신속히 강대해지면서, 주변국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만일 중국이 조금만이라도 적의를 드러낸다면, 그것은 모두의 신경을 건드리게 될 것이고, 주변국가들의 위기감을 불러올 것이다. 이는 중국의 발전에 유형무형으로 손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