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문리(楊文利)
1
임경(林庚)
내가 처음 북경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1980년대가 끝나가는 때였다. "북대중문사로(北大中文四老)"중 한명인 임경(林庚) 교수가 은퇴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이상 본과학생들에게는 수업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너무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했다. 그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없어서 유감으로 여겼다. 그래도 임경 선생의 풍채를 직접 보고, 그의 강의를 들을 기회는 있었다. 개략 당시(唐詩)에 관한 강의였고, 제목은 기억이 희미하다. 나이 팔순의 임선생은 비단장삼을 입고, 소쇄여소년(瀟灑如少年)하고 표일여선자(飄逸如仙子)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임선생은 명문집안 후손인 것을. 부친 임재평(林宰平)은 광서때의 거인(擧人)으로 일찌기 일본으로 건너가 법률을 배웠다. 그러나, 많은 분야에 흥미를 가져, 국학, 철학, 불학, 법률에서 시사, 서화까지 모두 밝았다. 한때 북양정부에서 사법부을 지냈고, 나중에 청화연구원의 지도교수가 된다. 임경은 8살때 사숙에 들어가, 시서(詩書)를 배웠고, 그때부터 마음 속에 시가의 씨가 심어진다. 고등학교졸업후 청화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고, 나중에 국문과로 전과한다. 잡지를 펴내고, 신시를 지어 한때 이름을 떨친다. 계선림(季羨林), 오조상(吳組緗), 이장지(李長之)와 나란히 '청화사검객(淸華四劍客)'으로 불리웠다. 임경의 학식과 풍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집안의 전통과 연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소여(吳小如)
중문과 교수인 오소여는 임경의 제자이다. 임재평과는 망년지교였고, 임씨부자에게 제자의 예를 공손히 했다. 아쉽게도 필자가 중문과에서 공부할 때 그는 이미 중고사연구센터(中古史硏究中心)로 옮겨가 있었다. 비록 그의 수업을 듣지는 못했지만, 강좌는 여러번 들을 수 있었다. 제목은 당시, 명청소설, 경극, 서예등에 관련된 것이었다. 재능도 뛰어나고, 학문도 넓으며, 견식도 깊어 인상을 깊게 받았다. 부친 오옥여(吳玉如)는 서예가 발군이었고, 시문도 세상에 유명했다. 오소여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시서를 익혔고, 서예와 경극에도 관심을 둔다. 이렇게 넓은 분야에 학식을 지닌 것은 실로 가학의 훈도때문이라 할 것이다.
원행패(袁行霈)
임경의 또 다른 제자인 원행패도 명문집안 출신이다. 증조부 원적무(袁績懋)는 도광때의 진사, 한림편수로 경사에 박통했다. 증조모 좌석선(左錫璇)은 시인으로 호남순무 좌보(左輔)의 손녀로 시와 그림에 능했다. 증외조부 증영(曾咏)은 도광때의 진사로 관직이 길안지부에 이른다. 증외조모 좌석가(左錫嘉)는 좌석선의 여동생으로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잘했다. 조부인 원학창(袁學昌)은 광서때의 거인으로 관직이 호남제법사에 이른다. 조모인 증의(曾懿)는 의학(醫學)에 능톻하고 시와 그림을 잘했다. 둘째백부 원려준(袁勵準)은 광서때의 진사로 부의(溥儀, 선통제)의 스승이다. 시문에 능했고, 서예가 뛰어났다. 중남해의 남문에 쓰여진 "신화문(新華門)"이라는 편액은 그의 글씨이다. 넷째백부 원려형(袁勵衡)은 중국은행업의 아버지로, 교통은행의 초대행장이다. 당저(堂姐) 원효원(袁曉園)은 중국최초의 여자외교관으로, '원씨병음방안(袁氏拼音方案)의 창립자로 서화를 좋아했다. 당저 원행서(袁行恕)는 대만의 작가 경요(瓊瑤)의 모친이다. 당저 원정(袁靜)은 작가로 <신아녀영웅전(新兒女英雄傳)>으로 문단에 이름을 떨친다. 당형 원행운(袁行雲)은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 재직했고, 서화감상에도 능했다. 그의 부인 사량민(査良敏)은 김용(金庸)의 당저이다. 원행패는 집안의 내력을 이어받아 시서를 익히고 고전문학연구에 힘을 쏟는다. 대학1학년때의 필수과목인 "문학작품상석(賞析)"에서 원행패 교수는 고대문학부분을 강의했다. 그때 나이가 지명(知命, 50살을 가리킴)을 넘었지만, 영준하고 풍류있으며 우아한 모습이었다. 고인들이 말하는 "복유시서기자화(腹有詩書氣自華)"라는 것이 헛말이 아니었다.
전리군(錢理群)
전리군은 당시 중문과의 부교수였고,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교수중 한명이었다. 그는 학문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바로 항주전씨의 후예이다. 외조부 항조형(項藻馨)은 청나라말기 유신파의 인물로 신문을 발행하고, 신학문을 일으키며, 일찌기 절강고등학당감독이 되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절강대학 총장인 셈이다. 부친 전천학(錢天鶴)은 청화대학을 졸업하고, 코넬대학에서 농학석사학위를 받는다. 그후 금릉대학 농림과의 교수로 있다가 나중에 한때 국민정부 농림주상무차관의 직위도 맡은 바 있다. 큰형인 전녕(錢寧)은 중앙대학 토목과를 졸업하고, 캘리포니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인슈타인의 아들인 아인슈타인교수에게서 표사운동(sediment movement)을 연구하고, 청화대학 수리학과에서 교수를 지낸다.
양주(楊鑄)
양주 교수는 내가 졸업한 후에 중문과로 왔다. 부친인 양회(楊晦)는 북경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진상학(陳翔鶴), 풍지(馮至)등과 <침종(沉鐘)>주간을 창간하고, '침종사(沉鐘社)'를 성립한다. 그리고 북경대학 중문과 주임을 10여년간 지냈다. 형인 양겸(楊鎌)은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서 원나라때 문학을 연구했다. 양주는 부친의 학문을 이어받아 문예이론을 연구했다.
오구(吳鷗)
필자가 북경대학에 입학했을 때, 오구는 아직 젊은 조교였다. 고전문헌을 전공하는 친구의 말을 들으니, 그녀는 학문하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대대로 가학을 이어왔다고 한다. 조부인 오매(吳梅)는 곡학(曲學)의 대가로, 왕국유(王國維)와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채원배(蔡元培)가 북대 교장으로 오기 전에, 우연히 서점에서 곡학에 관한 서적인 <고곡진담>을 한번 살펴봤는데, 연구가 깊다는 것을 알아봤다고 한다. 그후 북대 음악연구회를 설립하여 회장이 되고 당시 상하이민립중학에서 가르치고 있던 오매를 곤곡조의 지도교수로 모셔오고, 국문과의 교수를 겸직하게 했다.
진이흔(陳貽焮)
중문과 교수 진이흔의 조부는 학문이 뛰어난 사람으로 독서를 좋아하고 시를 즐겼다. 당구조(堂舅祖) 유영제(劉永濟)는 중국문학사를 연구했고, 시율에 능했다. 표숙(表叔)이자 장인인 이빙(李氷)은 오매의 제자로 사학(詞學)을 깊이 연구했다.
주조모(周祖謨)
주조모 교수의 장인인 여가석(余嘉錫)은 역사, 문헌, 목록학등 여러 분야에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일찌기 보인대학 문학원장을 지낸다. 처구(妻舅) 여손(余孫)은 북경대학 역사학과 교수였다.
2
유대진(兪大縝)
내가 북경대학을 다닐 때, 외어학원(外語學院)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서어계(西語係), 동어계(東語係), 아어계(俄語係)가 독립적으로 존재했고, 서로 계통이 이어지지 않았었다. 서어계의 교수인 유대진은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소흥유씨(紹興兪氏)는 근대중국의 최고명문집안이다. 유명한 유학자와 석학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부인 유문보(兪文葆)는 함풍때의 거인으로 관직이 호남 신녕지현, 동안지현에 이르렀다. 외조부 증기홍(曾紀鴻)은 증국번(曾國藩)의 차남으로, 산술(算術)이 독보적이었다. 외조모 곽균(郭筠)은 양회염운사 곽패림(郭霈霖)의 달이다. 시문에 능했다. 부친 유명이(兪明頤)는 호남학정(湖南學政)을 지낸다. 모친 증광산(曾廣珊)은 시를 잘 지었다. 백부 유명진(兪明震)은 광서때의 진사로 감숙제학사, 남경강남수사학당 교장을 지냈고, 노신(魯迅)의 스승이다. 장서(藏書)로 아주 유명하다. 고모인 유명시(兪明詩)는 어려수부터 시를 짓고, 북과 금을 잘 했다. 호남순무 잔보잠(陳寶箴)의 아들 진삼립(陳三立)에게 시집가서 아들 진인각(陳寅恪)을 낳는다. 유대진은 금릉여자대학을 졸업한 후, 여동생 유대인(兪大絪)과 함께 옥스포드대학으로 가서 영국문학을 공부한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전후로 중앙대학 외문계, 북경대학 서어계에서 교수를 지낸다. 그녀의 형제자매는 9명인데, 모두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큰오빠 유대유(兪大維)는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아인슈타인의 제자이다. 대만정부의 초대 '국방부장'이 된다. 그의 아들 유양화(兪揚和)는 장경국(蔣經國)의 딸 장효장(蔣孝章)을 처로 맞는다. 셋째오빠 유대불(兪大紱)은 아이오와주립대학 박사로 중국과학원 원사, 중국농업대학 교장을 지낸다. 남동생 유대강(兪大綱)은 연경대학을 졸업하고 대만대학 중문과에서 교수를 지낸다. 희곡의 전문가이다. 넷째여동생 유대인은 호강(滬江大學)을 졸업하고, 옥스포드대학, 파리대학,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한 후, 유대진과 함께 북경대학 서어계에서 교수를 지낸다. '문혁'때 자살한다. 매부 증소륜(曾昭掄)은 증국번의 둘째동생 증국황(曾國潢)이 증손자이며, MIT대학의 박사로 저명한 화학자, 중국과학원 원사이다. 일찌기 북경대학 화학과 주임을 맡는다. 다섯째 여동생 유대채(兪大綵)는 연경대학 서어계, 대만대학 외문계의 교수를 지낸다. 매부 부사년(傅斯年)은 역사학자, 고전문학연구전문가로 북경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북경대학 대리교장, 대만대학 교장을 지낸다.
조라유(趙羅蕤)
서어과 교수 조라유도 명문집안 출신이다. 부친 조자신(趙紫宸)은 일찌기 미국유학을 한 기독교 신학자이다. 연경대학 종교학원에서 원장을 역임했다. 조라유의 이름은 부친이 지었는데, 이백의 <고풍기사십사(古風其四十四)>의 "녹라분위유(綠羅紛葳蕤), 요요송백지(繚繞松柏枝)"에서 따왔다. 조라유는 어려서부터 뛰어나서, 7살때 소주경해여자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영어, 피아노를 배우고, 수업시간외에는 부친에게서 시서를 배웠다. 16살에 연경대학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국문과였다가 나중에 서어과로 전과한다. 졸업후에는 다시 청화외국문학연구소에 들어간다. 재능이 뛰어나 전종서(錢鍾書)의 '몽중정인(夢中情人)'이 된다. <위성(圍城)>의 당효부(唐曉芙)의 원형이 바로 그녀이다. 전목(錢穆) 선생은 <사우잡억(師友雜憶)>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그의 서남연대(西南聯大) 동료이자 '신월파(新月派)' 대표시인 겸 고문자학자인 진몽가(陳夢家)의 "부인은 연경대학의 유명한 교화(校花)이며 쫓아다니는 남자들이 있었는데, 유독 진몽가의 장삼을 입은 낙척의 중국문학가기운을 좋아해서 그와 결혼하였다" 문혁때 진몽가는 홍위병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고 목을 매어 자결한다. 조라유도 이 타격으로 한때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그녀의 강좌를 한번 들은 바 있다. 엘리어트의 '황무지'에 관한 것이었다. 나이가 칠십이 넘었지만, 자태는 여전했다. 옛날 대갓집 규수의 풍모를 여전히 볼 수 있었다.
이부녕(李賦寧)
서어과 교수 이부녕도 서향지가(書香之家) 출신이다. 조부인 이동헌(李桐軒)은 관중의 유명한 유학자로 동맹회 회원이다. 섬서성 자의국 부국장, 성수사국총찬(修史國總纂)을 역임했고, 희곡학교 이속사(易俗社)를 창립하여 초대 사장이 되어 희곡의 개량에 힘썼다. 백조부(伯祖父) 이중특(李仲特)은 천한(川漢, 사천-한중)철로의 엔지니어이고 동맹회 섬서분회 회장을 맡았다. 부친 이의지(李義祉)는 수리학자로 경사대학당을 졸업하고, 독일에 유학했다. 황하, 양자강의 치리를 담당했다. 부친의 영향으로 이부녕은 청화대학에 입학할 때 토목공정계를 선택한다. 나중에 외문계로 전과했다. 서남연대 외문계를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 교직을 맡는다. 얼마 후 예일대학에 유학한다. 박사학위를 받을 때쯤 신중국이 성립되었다. 박사학위도 내팽개치고 서남연대의 동창이자 친구로 옥스포드대학에 유학한 왕좌량(王佐良)과 허국장(許國璋), 그리고 시카고대학에 유학한 주각량(周珏良)과 함께 귀국하여 교수가 된다.
정영달(鄭潁達)
동어계 교수 정영달은 관료집안의 자제이다. 증조부 정수렴(鄭守廉)은 함풍때의 진사로, 나중에 관직이 이부고공사주사에 이른다. 증숙조부 정세공(鄭世恭)은 함풍때 진사로 나중에 관직이 호부주사에 이른다. 경학을 깊이 연구했고, 서예에 뛰어났다. 조부 정효서(鄭孝胥)는 광서때 거인으로 일본에 유학한다. 부의가 만주국황제에 오른 후, 만주국 국무총리대신이 된다. 서예가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로 명성을 떨쳤다. 시는 송나라를 배워 동광체의 창도자였다. 부친 정우(鄭禹)는 리버풀대학 토목과를 졸업하고, 만주국 봉천시장을 지낸다. 큰형 정광원(鄭廣元)은 영국에 유학했고, 부의의 둘째여동생 온화(溫和)와 결혼한다. 정영달은 북경대학 동어계 일본어전공이며, <인민일보> 국제부에서 일하다가, 동어계 주임 계선림의 요청으로 모교로 돌아와 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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