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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영락제)

명나라 영락제는 몽골계인가 고려계인가?

by 중은우시 2006. 3. 9.

홍무31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사망했다. 황태손인 주윤문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각지에 있는 숙부인 왕들의 세력이 너무 큰데 두려움을 느끼고 제태, 황자징등의 건의를 받아 번왕을 철폐하는 영을 내린다. 주왕, 상왕, 대돵, 제왕, 민왕등의 왕들은 죄를 물어 왕위에서 폐함을 당했고, 다음으로 연왕 주체의 차례였다. 연왕은 당시 많은 병사를 지니고 있었고, 북경(당시의 명칭은 북평)에 있었는데, 요광효와 상이한 후, 장옥 주능등의 참모를 지휘하여 제태, 황자징등의 간신들을 제거하여 황제의 측근을 청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건문원년 7월에 "정난의 역"을 일으킨다. 병사를 남하시켜 장강남북에서 큰 전투를 치른 후 건문4년 6월에 연왕은 병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금천문을 통하여 남경으로 들어간다. 건문제의 행방은 묘연했고, 주체는 황제에 오르고 년호를 "영락"으로 한다.

 

영락제의 즉위후에 세상에는 두 개의 수수께기가 남았다. 하나는 건문제의 행방이고 다른 하나는 영락제의 신분내력이다.

 

주원장은 비록 하층출신이었지만, 명나라는 예의와 윤리를 기본으로 성립된 나라였다. 정주의 성리학을 정통으로 받들었다. 영락제는 주원장이 정한 황위계승자는 아니었지만, 정난을 명분으로 하여 무력으로 조카의 수중에서 황위를 빼았았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정통신하들과 문인들의 비난을 받아왔다. 정통성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락제가 황위를 빼앗은 것은 명분도 바르지 못하고,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찬국' '불의'라고 보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명나라는 예를 중시하였으므로 적장존비에 대한 관념이 강했다. 의문태자는 장자의 신분으로 태자에 올랐고, 그가 죽은 후에는 손자를 황태손으로 올렸는데, 이것이 적장자계승원칙에 맞는 일이라고 보았다. 영락제는 자신이 즉위를 순조롭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마황후의 소생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태자, 진왕(秦王), 진왕(晋王)과 같이 마황후의 적출이되어야 했다. 현재, 태자와 진왕, 진왕이 모두 죽었고, 건문제는 궁중에서 불에탔는지 행방불명되었으므로 스스로가 적장자가 되어, 황통을 계승한다고 하면, 예법과 정리에도 부합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고려에 의하여, 영락제는 마황후를 모친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영락년간에 <<태조실록>>은 두번에 걸쳐 수정되었는데, 나중에 <<영락실록>>에서는 직접적으로 밝혔다. "고황후(마황후)는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가 의문태자 표이고, 차자가 진왕 상이며, 그 다음이 진왕 강이며, 그 다음이 황상이고, 그 다음이 주왕 숙이었다". 당시에도 이를 믿는자는 많지 않았지만, 영락제의 위력 앞에서 감히 나서서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청나라때 <<명사>>를 쓰면서도 이 설을 그대로 따랐다. <<명사 본기59성조)>>에는 그를 "태조의 넷째 아들이다. 모친은 자효고황후이다". 그러나 <<명사 열전29>>에는 "황자징은 말하기를 주왕은 연왕의 동생이이니, 주왕을 폐하면, 연왕의 날개를 자르는 것이 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연왕과 주왕이 모친이 같다는 취지로 보이고, 의문태자와 모친이 같다는 것은 아니다. <<명사 열전 1(후비)>>에 보면 손귀비는 "홍무칠년구월에 죽었다. 나이 삽십하고 둘이었다. 황제는 비가 아들이 없음으로 주왕 숙에게 3년간 상복을 입도록 하였다....서자가 생모를 위하여 3년간 복식을 입는 것은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주왕이 서자이고, 연왕이 주왕과 모친이 같다면 당연히 적자는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영락제의 생모는 누구인가? 반자장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남경태상시지>>의 기재에 따르면 효릉의 신위중에 "왼쪽의 한 사람은 숙비 이씨이고 의문태자, 진왕 진왕을 낳았다. 오른쪽의 공비(妃)는 성조문황제를 낳았다" 이것은 영락제의 생모가 공비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태자와 진왕, 진왕이 모두 서출이라는 말이 된다. 야사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공비는 고려여인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락제는 고려혈통이라는 말이 된다. 이것은 이후 영락제가 고려미녀를 좋아했던 것과 연결시켜볼 수 있다. 궁중에는 조선에서 진공한 여인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권씨성을 가진 여인이 총애를 받았고, 피리를 잘불어 황제가 매우 아꼈으며, 7년에 현비에 봉하고 그의 부친인 권영균을 광록경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남경태상시지>>는 황릉을 지키는 태감의 말을 기록한 것이고, 이것이 민간에 전해지면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신빙성은 많이 떨어진다. <<명사기사본말>>에 이하면 주원장이 황손인 주윤문에 대하여 불만이 컸다. 태조가 매번 부나 시를 짓게 할 때마다 많은 경우 만족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그에게 댓구를 만들도록 했는데,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다시 연왕에게 만들게 하니 아주 잘 만들었다" 그래서 주원장은 여러 차례 주윤문을 폐하고 연왕을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삼오는 "많일 그렇게 하면 두 진왕은 어떻게 하실 것인지요"라고 했다. 그러자 포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볼 때, 영락제는 적출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더욱 기이한 얘기는 연왕이 원순제 홍지라씨 또는 옹씨(이 두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의 소생이라는 것이다. 임애걸 선생이 몽고의 <<황금사강>>에서 인용한 바에 따르면 "대도성이 무너질 때, 순제의 비인 홍지라씨는 이미 임신3개월이었다. 도망칠 시간이 없어서 큰 항아리에 숨어서 난을 면하였다. 나중에 명군의 수색에 발견되어 주원장의 비가 되었으며 옹씨라고 하였다. 홍지라씨는 당시 만일 칠개월후에 자식을 낳으면 주원장이 적의 자식이라고 하여 죽일 것이다. 만일 10개월후에 낳는다면 자기의 아들로 길러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하늘을 향하여 3개월을 연장하도록 빌었다. 과연 임신 13개월만에 분만하였다.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주체이다"

 

몽고의 사료는 매우 전설적인 면이 보인다. 마치 중국의 한나라 이전의 사서에서와 같다. 신빙성은 많이 떨어진다. 그러나 주체가 "모습이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수염이 아름다웠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주원장의 모습과는 많이 틀리다. 그리고 용감하며 전투를 잘했으며,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몽고인의 모습과 비슷하다. 주의할 점은 주체가 다섯 번에 걸쳐 막북(몽고)지역을 북벌하는데, 몽고의 세력은 많이 쇠약해지고, 이로부터 각부락은 대부분 귀순하거나 멀리 도망치게 된다. 이때부터 몽고족이 다시 중원에서 패자로 설 가능성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마치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안위로 보인다(몽고족의 입장에서). 마치 한족들이 건륭제가 실제는 한족이며, 해녕 진씨의 소생이라는 전설을 만들어낸 것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현존하는 자료를 보면, 주체의 신분내력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하지는 않은 것같다. 주체는 신황조를 설립한 것도 아니고, 어쨋든 주원장의 아들일 것이며 주원장의 방식을 따랐던 것이다. 그가 방효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자면 "이것은 집안 일이다"

 

하나 음미할만한 사실은, 자신이 없는 통치자들은 모두 서적편찬을 좋아했다. 영락5년에 영락제는 <<영락대전>>을 편찬하도록 지시한다. 명목은 고금의 문헌을 모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기에게 불리한 서적을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이로써 관방의 편찬된 서적이외에는 모두 이단으로 몰고, 역사적인 사실을 덮어버리고, 독립적인 사고를 제지하는 역할을 한다. "사상통일"을 시키는 것이다. 황권의 아래에서 권력통치와 사상통제는 칼의 양날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