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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영락제)

영락제(永樂帝)의 모친은 조선인인가?

by 중은우시 2009. 11. 19.

글: 문재봉(文裁縫)

 

명성조(明成祖) 영락제(永樂帝) 주체(朱)는 역사상 복잡한 논쟁거리가 많은 인물이다. 그는 일찌기 막북(漠北)을 다섯번이나 정벌했고, 안남(安南)을 세번이나 토벌했고, 신강, 티벳, 해남등의 지역을 평정했다. <<영락대전>>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정화를 일곱번이나 동남아와 인도양으로 보내어 해외여러나라들과의 교류를 강화했다; 동시에 그는 흉포하고 잔혹했으며,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일찌기 3천궁녀는 잔인하게 학살하여 백성들의 분노를 산 적도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한 논쟁에서 촛점이 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그의 생모가 누구냐는 것이다. 그의 생모가 조선인이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는데, 사실이 그러할까?

 

사실, 명성조(영락제)의 생모가 누구냐는 문제는 그가 등극할 때부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는 이러한 논쟁이 그저 민간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뿐이다. 그러나 수백년후까지도 이 문제는 여전히 결론을 보지 못했다. 오히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뭐가뭔지 모르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수백년의 논의와 고증을 거쳐, 명성조 주체의 생모가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대체로 4가지 견해로 압축된다.

 

제1설: 자효고황후(慈孝高皇后), 즉 마황후 마수영(馬秀英)이라는 설이다. 마수영은 주원장의 본부인이다. 이 주장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에 의한 것이다. 명나라의 사서인 <<태조실록>>, <<태종실록>>, <<정난사적>>등은 모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정난사적>>의 기록을 예로 들면, "고황후는 다섯 아들을 낳았다. 장남이 의문황태자이고, 그 다음이 진민왕 상이며, 그 다음이 진공왕 동이고, 그 다음이 상(上)이며, 그 다음이 주정왕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上)이 바로 영락제 주체이다. 그는 바로 고황후의 넷째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락제 스스로도 여러번 친히 "짐은 고황후의 넷째아들이다"라고 말하였다.

 

청나라때에 만사동(萬斯同)이 편찬한 <<명사.성조본기>>에서도 주체는 "모친이 효자고황후이며, 흥종효강황제(즉, 태자 주표)와 같은 모친이다"라고 하였고, 주호양이 편찬한 <<역대능침비고>>에서도: '황후는 의문태자, 진왕 상, 진왕 동, 성조, 주왕을 낳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명나라때 관방사서의 주장을 답습한 것이다. 즉 주체는 마황후의 넷째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보면, 명성조의 모친은 마황후라는 것이 정사에서는 일관되게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마황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고 한다. 태자인 주표와 연왕인 넷째 주체도 모두 그녀가 낳은 자식이 아니고, 다른 후궁이 낳았는데, 그녀가 빼앗아서 자신의 자식으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제2설: "공비(妃)" 이씨(李氏)라는 설이다. 공비는 고려(高麗)의 미녀로 화용월태를 지녔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원장이 아주 총애했다고 한다. 그녀가 명성조 영락제의 생모라는 근거는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誌)>>이다. 태상시는 명나라에서 제사와 예악을 주관하던 기구이다. 황실종묘의 제사는 모두 그들이 책임졌다. <<태상시지>>의 기록에 따르면, "효릉에는 태조고황제, 고황후 마씨를 모시고 있다. 왼쪽 첫번째는 숙비 이씨로, 의문태자, 진민왕, 진공왕을 낳았다; 왼쪽 두번째는 황비로 초왕, 노왕, 대왕, 영왕, 제왕, 촉왕, 곡왕, 강왕, 이왕, 담왕을 낳았다; 왼쪽 세번째는 황귀비로 상헌왕, 숙왕, 한왕, 심왕을 낳았다; 왼쪽 네번째는 황귀비로 요왕을 낳았다. 왼쪽 다섯째는 황인으로 녕왕, 안왕을 낳았다; 오른쪽 첫번째는 공비로 성조문황제를 낳았다." 이 책은 황실종묘의 제사를 관장하는 중요한 문헌이다. 활실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 기록은 상당한 신뢰성이 있다.

 

이외에 명나라의 심현화(沈玄華)가 쓴 <<경례남도봉선전기사십사운>>에는 "여러 비빈들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 비(妃)만이 서쪽에 있다. 성조를 낳았기 때문에, 다른 비빈들이 감히 나란히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뜻은 공비의 위패가 혼자서 서쪽에 놓여진 이유는 그녀가 명성조 영락제의 친생모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조가 그녀의 위치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 다른 비빈들과 함께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후세 많은 학자들의 찬동을 받는다. 부사년, 오함 등의 역사학자들은 연구와 고증을 거쳐 모두 영락제의 생모는 공비 이씨라고 주장했다.

 

제3설: 원순제(元順帝, 원나라 마지막 황제)의 비인 홍지라(洪吉喇)씨라는 설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주원장이 대도를 함락시켰을 때, 원순제는 황급히 도망쳤다. 주원장은 원순제의 후궁으로 갔는데, 용모가 뛰어난 미녀를 발견한다. 주원장은 기뻐하며 그녀를 후궁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미녀는 바로 원순제의 세번째 부인인 홍지라씨고 태사 홍지라 투크투의 딸이었다. 이때 홍지라씨는 이미 임신중이었는데, 나중에 그녀가 낳은 자식을 주원장이 받아들인다. 그가 바로 명성조 영락제 주체이다. 이렇게 보자면 명성조 영락제는 고황후의 소생이 아닐 뿐아니라, 주원장의 친아들도 아니라는 말이다. 원순제의 유복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원대도가 함락된 것은 지정28년, 즉 1368년이다. 그런데, 명성조 주체는 지정20년, 즉 1360년에 태어난다. 중간에 팔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헛점이 너무나 많다. 그저 민간에서 전해지는 유언비어라고 할 것이다.

 

제4설: 몽고여인 옹씨(瓮氏)라는 설이다. 청나라때의 <<광양잡기>>에 따르면 이런 기록이 있다: "명성조는 마황후의 아들이 아니다. 그의 모친은 옹씨로 몽골인이다. 그녀는 원순제의 비였으므로, 이 사실을 고의로 감춘 것이다. 궁중에 별도의 사당(廟)을 만들어, 신주를 감추고 대대로 제사지냈다. 어떤 사례태감이 팽공암에게 말해준 것이다. 내가 어려서, 북경의 노인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제 이를 믿을 수 있겠다." 그 뜻은 명성조는 마황후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몽골여인 옹씨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옹씨는 원순제의 비였으므로, 사서에서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광양잡기>> 자체가 항간의 소문을 집대성한 것이고, 작자인 유헌정도 그저 노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수준이지,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홍지라씨라는 설의 변형된 버전인 것같다. 그러므로 신뢰성이 없다.

 

이렇게 보면, 명성조 영락제의 친생모친은 마황후와 공비에게 집중된다. 이것이 바로 현재 논의되는 촛점이다. 도대체 누가 진짜 생모인가? 비록 제1설이 <<태조실록>>, <<태종실록>>, <<명사>>등의 정사에 실려있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믿기 어렵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영락제가 국사를 수정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락제가 조카인 건문제 주윤문의 손에서 천하를 빼앗아왔기 때문이다. 당시 건문제가 그의 번왕을 폐지하려고 하자, '청군측(淸君側, 황제 측근의 간악한 무리를 제거한다)"의 명분을 가지고 북평(북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건문제를 토벌하기 시작하고, 4년후에 남경을 함락시키고, 황제위에 오른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정난지역이라고 부른다. 황제에 오른 후, 영락제는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재삼 자신이 마황후의 친아들이며, 주원장의 넷째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두번이나 명을 내려 <<태조실록>>을 수정하도록 했고, <<정난사적>>, <<옥첩>>은 영락제의 뜻에 따라 저술된 것이다. 청나라때의 <<명사>>도 이런 기록을 그대로 답습하여, 명성조 영락제의 모친은 마황후라고 한다.

 

그러나, 명성제의 명령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외국의 기록까지 제한할 수는 없었다. 홍무22년, 조선사신 권근(權近)은 북경에서 연왕 주체를 배알한다. 나중에 권근이 쓴 <<봉사록(奉使錄)>>에 이 일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명성조 생모의 기일이 칠월십오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황후의 기일은 팔월십일이다. 이를 가지고 추단하면, 영락제의 모친은 확실히 마황후가 아니다. 그외에 영락제는 즉위후 남경에 대보은사를 지었는데, 이것은 마황후의 양육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절의 정전(正殿)은 잠궈져 있었고, 외인들이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실제 공비 이씨를 모셨다고 한다.

 

이렇게 보자면, 영락제의 모친은 조선여인 공비 이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 견해를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