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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영락제)

영락제는 왜 비구니를 모두 잡아들였는가?

by 중은우시 2008. 11. 6.

글: 유병광(劉秉光)

 

비구니는 출가수행하는 여승이다. 육근청정(六根淸靜), 사대개공(四大皆空)을 추구하여 조정과 원수질 일이 없다. 그런데, 명나라때 비구니들은 사상유례없는 체포와 침해를 당한 바 있다. 영락18년(1420년), 명성조 주체는 돌연 명을 내려, 전국의 모든 비구니와 여도사를 모조리 잡아서 북경으로 데려오도록 한 후 하나하나 심문하여 진실한 신분을 확인하였다. 이런 전례없는 천하비구니대수색사건은 불문의 천년이래의 속세와 다투지 않는 고요함을 깨트렸을 뿐아니라, 후세인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의혹을 남겼다. 그렇다면, 영락제는 왜 천하의 비구니를 체포했는가?

 

사건의 원인은 바로 산동성 경내에서 발생한 당새아(唐賽兒, 여)가 이끄는 농민반란때문이었다. <<명사>> 및 청나라때의 야사기록에 따르면, 당새아는 영락 18년 2월, 고향인 포태(蒲台, 산동성 빈주)에서 수천의 백련교도를 모아서 홍백기를 들고 일어서서 조정에 대항했다. 산동성 경내에서 발생한 이 농민반란은 규모가 작고, 지속기간이 짧아서 명나라정권을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역사교과서에도 이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당시의 황제인 영락제는 아주 놀랐다. '경영(京營)'의 오천정예인마를 파견했을 뿐아니라, 산동연해에서 '왜구와 싸우던' 군대로 농민반란진압에 동원했다.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외적을 물리치려면 반드시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취지였다.

 

영락제는 왜 이렇게 대규모의 부대를 동원했을까? 필자의 분석으로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반란이 바로 "북경천도" 전날에 발생해서, 황제의 이미지와 업적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미쳤다. 영락제로서는 이러한 시기에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둘째, 반란군은 "백련교"에 의탁하여 신도들은 당새아를 죽기 살기로 따랐고, 그녀의 명이라면 뭐든지 복종했다. 영락제는 "사교"가 민중을 미혹시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셋째, 반란군의 규모는 계속 확대되고, 관군은 연이어 패퇴했다. 그리고, 당새아는 조정의 초안(招安, 귀순권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조정과 영락제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 여러가지 이유로, 영락제는 당새아에 대하여 엄청난 원한을 품게 된다. 그리고 반란군을 미친듯이 진압한다. 중과부적에 앞뒤로 적을 맞이함에 따라, 반란군은 3개월을 버티다가 실패로 끝난다. 다만 당새아는 행방불명이었다.

 

마음 속의 분함을 풀고, 꺼진 불이 다시 불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일벌백계를 위하여, 영락제는 당새아의 행적을 엄밀히 조사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수색체포작업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민간에서 찾아내지 못하자, 영락제는 업무중점을 이동시킨다. 당새아의 체포수색의 중점을 불문(佛門)으로 옮긴다. 영락제가 이렇게 한 것은 필자의 생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수색체포인원은 책임회피를 위하여, 아마도 당새아가 불문에 들어가서 찾기 힘들다고 영락제에게 보고했을 수 있다. 둘째, 불문제자는 세속에서 멀리 떵러져 있으므로, 관부에서 일반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므로, 당새아는 반란실패후 불문에 흘러들어가서 피난했을 가능성이 컸다. 셋째, 당새아가 반란을 일으킬 때, 일찌기 스스로 "불모(佛母)"라 칭한 적이 있어, 영락제는 당새아가 불문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료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영락제는 "당새아가 오랫동안 붙잡히지 않자, 삭발하여 중이 되거나 여도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법사에 명하여, 북경, 산동경내의 비구니와 여도사를 체포하여 북경으로 데려와 심문하게 하였다"(명사기사본말)

 

그리하여, 영락제는 북경, 산동의 비구니, 여도사를 모조리 체포하고, 조정으로 압송하여 심문한다. 같은 해 7월, 영락제는 다시 단명(段明)을 산동좌의정(山東左議政)으로 하여 계속 당새아를 수색하게 한다. 단명은 이 임무를 완성하기 위하여, 산동, 북경의 비구니를 하나하나 조사했을 뿐아니라, 모조리 체포하거나, 심지어 전국의 수만명의 출가부녀까지 체포했다. 이 일에 관하여, <<명사>>에는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영락18년 2월, "산동 포태 당새아가 반란을 일으킨다. 당새아는 붙잡히지 않는다. 천하의 출가한 비구니 만명을 체포한다." 영락제가 병사할 때까지, 그는 오로지 당새아를 붙잡고자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명나라의 강대하고 엄밀한 특무, 순찰기구도 당새아을 체포하는 일에 있어서는 민심을 얻지 못하여, 비록 천하의 비구니를 모두 잡아들이는 황당하고 극단적인 방법을 썼지만, 결국 성과를 얻지 못하고 만다. 얻은 결과는 '당새아는 붙잡히지 않았고,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새아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여러해동안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이 이 건국영웅(巾英雄)의 결말을 알고 싶어했지만, 지금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