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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영락제)

"권비사건(權妃案)" : 영락제와 조선여인의 사랑

by 중은우시 2008. 1. 17.

 

명성조 영락제 주체(朱)는 대명황조의 세번째 황제이며, 명태조 주원장의 넷째아들이다. 육조고도인 남경에서 태어났으며, 홍무3년, 즉 1370년에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홍무13년, 북경으로 간다. 여러번 명태조 주원장의 명을 받아 북방군사활동에 참가하고, 두번은 군대를 이끌고 친히 정벌에 나서기도 했고, 북방군대에서 그의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주원장의 만년에 태자인 주표(朱標), 진왕(秦王) 주상(朱), 진왕(晋王) 주강(朱)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다. 주체는 군사력뿐아니라 가족의 배분에 있어서도 여러 왕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주원장이 죽은 후, 장손인 건문제 주윤문이 황제가 된 후 번왕을 폐지하게 된다. 주체는 건문원년 즉 1399년 여름에 정난지역을 일으킨다. 건문제4년 6월에 남경을 함락시키고 황위를 빼앗는다. 다음 해에 영락으로 연호를 고친다. 이리하여 명성조 주체는 세상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영락제라고 부르게 된다.

 

주체는 즉위후 5번이나 몽고잔당을 치러 북정을 하여, 명나라에 대한 그들의 위협을 완화시킨다. 동시에 남북대운하를 수리하고, 북경으로 수도를 이전한다. 그리하여 북경을 수도로 한 첫번째 한족황제가 된다. 북경은 이후 500년간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한다. 그리고 학자들을 모아서 3.7억자에 달하는 백과전서 <<영락대전>>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를 유명하게 한 정화의 해외원정도 있었는데, 7번에 걸쳐 아프리카동해안까지 가고, 중국과 동남아 인도양연안국가와의 교류를 강화시켜 대명왕조의 영락성세를 맞이한다. 명성조는 비록 정난지역을 일으켜 사람들에게 욕은 먹었지만, 웅재대략의 영명한 군주였다. 청나라때 강희황제는 일찌기 영락제의 신공성덕비에 "치륭당송(治隆唐宋)"이라는 네 글자를 써주었다. 이는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로 볼 수 있다.

 

주체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가 만들어낸 영락성세를 노래하지 않으면서, 그가 일으킨 정난지역으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을 질책했다. 그런데, 그의 감정생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적다. 그의 국경을 넘은 사랑이야기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 국경을 넘은 사람의 남자주인공은 자연히 영락제이다. 여자주인공은 조선에서 온 여인인 권비(權妃)이다. 권비는 조선국의 공조전랑 권집중의 딸이다. 명문집안의 규수라 할 수 있고, 서향세가의 천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글도 알고 이치에도 밝았다. 여기에 용모또한 수려하고 자태가 아름다웠다. 소녀시절부터 원근에 이름난 대미인이었다.

 

원나라때부터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중국조정에 미녀를 바쳐왔다. 명나라초에도 그러했다. 명나라가 개국하자, 태조 주원장의 후궁중에는 적지 않은 조선의 비빈들이 있었다. 성조 영락제는 조선인인 공비의 소생이다. 아마도 절반은 조선혈통을 지녀서 그랬는데, 아니면 조선미녀의 몸에서 자기가 어릴 적에 죽은 모친의 그림자를 찾으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영락제는 즉위후 조선에 조서를 보내어 공녀를 보내라고 재촉했다. 권비는 이때 중국으로 건너온다.

 

1408년, 영락6년, 명성조는 내사 황엄등을 사신으로 조선에 파견한다. 조선국왕에 은1만냥, 사50필, 소선라50필, 숙견100필을 내려서, 조선국왕이 명나라에 바친 말에 대한 보답으로 주었다. 동시에 조선에서 미녀를 뽑아 북경으로 보내라고 요구한다. 그리하여 조선국왕은 전국에 혼인을 금하고 미녀를 선발하여 바칠 준비를 한다. 당시, 조선국왕부터 왕공대신,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자기의 딸을 수천리 떨어진 다른 나라의 궁녀로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뽑혀온 여인들이 모두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황엄은 이들을 보고는 아주 불만스러워했고, 조선조정에 다시 미녀를 뽑으라고 요구했다. 조선조정은 할 수 없이 각도에 다시 선발하라고 요구했고, 동시에 지방관리들에게 조금만 자색이 뛰어나면 모두 한양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숨기도 하고, 침구를 쓰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고약을 붙이는 등의 방법으로 선발을 피한 경우에는 모두 국법으로 다스렸다. 이러한 강제수단을 거쳐, 미모가 뛰어난 여인들이 선발된다. 황엄등은 직접 본 후에 그중 5명을 선발한다. 첫번째는 권비였는데, 당시 18세였다. 나머지는 인우부좌사윤 임첨의 딸인 임씨(任氏), 17세; 공안부판관 이문명의 딸 이씨(李氏) 17세, 호군 여귀진의 딸인 여씨(呂氏), 16세, 중군부사정 최득비의 딸인 최씨(崔氏), 14살이 그들이다. 그녀들은 12명의 시녀, 12명의 요리사와 함께 수천리떨어진 북경으로 간다. 고향을 떠날 때 그녀들의 가족과 친척들은 대성통곡을 했고, 5명의 조선여인들은 자주 뒤돌아보며 눈물을 가득 담고 북경으로 갔다. 이로써 가족들과는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

 

이 5명은 명나라에 입궁한 후, 권비는 현비(賢妃)에 책봉되고, 임씨는 순비(順妃), 이씨는 소의(昭儀), 여씨는 첩여, 최씨는 미인에 책봉된다. 그녀들의 부친과 오라비들도 모두 명나라의 관직을 받는다. 예를 들어 권비의 부친은 광록사경을 받는다. 다만 녹봉은 조선국왕이 지급하였다. 동시에 책립된 후궁에는 한족인 귀비 장씨와 왕씨가 있다.

 

명나라궁중에온 이 5명의 조선비빈중에서 귄비는 가장 영락제의 총애를 받는다. 영락제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뛰어난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영락제가 그녀에게 잘하는 것이 있느냐고 묻자, 권비는 몸에 지니고 온 옥소(玉簫)를 불었다. 피리소리는 그윽하여, 이를 들은 영락제는 마치 취한 것같았다. 그리하여 권비를 여러 비빈들 중에 제일 높은 자리에 앉혔다. 당시 후궁을 다스리던 서비가 이미 죽었으므로, 영락제는 권비로 하여금 후궁의 일을 맡게 하였다.

 

권비는 총명하였고, 우아했다. 영락제가 조정일로 바빠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권비의 궁으로 돌아오면 권비의 아름다운 피리소리는 마치 봄바람처럼 영락제의 피로를 녹여주었다. 권비가 명나라조정에 들어온 후, 과감하고 강인하고, 남성미가 넘치던 영락제는 이 유순하고 온화하며 예쁜 조선여인을 더할 수 없이 아꼈다. 권비는 후궁중 가장 총애를 많이 받았을 뿐아니라, 영락제의 곁을 떠나는 경우가 아주 적었다.

 

1410년, 영락8년 10월, 권비는 영락제를 따라 몽고정벌에 따라간다. 명나라건립후, 북방의 변경은 계속 원나라 잔여세력들이 교란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변방의 화근으로 남아 있었다. 홍무제 후기부터 몽고부락은 자기들끼리 싸웠고, 오이라트, 달단, 우랑하의 3대부로 분열되었다. 영락제가 즉위한 후 분리타격과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보이는 전략을 써서 일시적으로 위협을 완화시켰다. 영락5년, 원나라후예인 번야시리의 세력이 굴기했고, 달단의 태사인 아루타이와 함께 몽고각부를 통일하려고 하였다. 영락7년 2월, 영락제는 달단에 사신을 보내어 수교하고자 한다. 그러나 생각도 못하게 사신이 피살된다. 영락제는 대노하여, 그해 7월 기국공 구복으로 하여금 10만군대를 이끌고 달단을 정벌하게 한다. 달단의 역량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데다 지휘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10만은 크루룬강에서 전멸당하고 만다. 영락제는 대명황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친정에 나선다. 50만대군을 이끌고 막북으로 들어간다. 오난강에서 번야시리의 대군을 격파한다. 번야시리는 겨우 7기를 이끌고 서쪽으로 도망친다.

 

명군이 첫번째 승리를 얻은 후 권비의 아름다운 피리소리는 천리초원에 울려퍼졌다. 이는 정벌에 지친 영락제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소리였다. 영락제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추격한다. 그리하여 아루타이의 대군도 싱안링에서 격파한다. 아루타이는 가족을 대리고 대흥안령의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버린다. 이번 북벌은 명나라군대의 대승으로 끝난다. 그리하여 영락제는 대군을 이끌고 개선한다. 권비도 영락제를 따라 수도(당시 남경)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산동 임성에 도착했을 때, 권비가 돌연 중병을 얻어 죽어버린다. 이때 권비의 나이는 아마 22세였을 것이다. 미인박명이었다. 명성조는 사랑하는 권비를 잃자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그 상처는 병이 되었다. 영락제는 그녀를 산동 봉현에 묻어주고, 현지 지방관아에 분묘를 지키도록 명을 내린다. 권비가 죽은 후, 영락제는 그녀의 가족에게도 후하게 대해주었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과 목소리를 깊이 간직했다. 한번은 권비의 가족들을 만났을 때, 영락제는 비통하게 눈물로 범벅이 되었으며,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권비가 갑자기 죽은 것은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궁중에는 권비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하여 이는 후궁에 큰 사건으로 발전한다(명나라초기에 떠들썩했던 "권비사건"이다). 무고한 비빈과 궁녀가 무수히 죽음을 당한다. 영락제는 이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아주 악독하고 잔인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에서 그가 얼마나 권비를 사랑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