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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영락제)

영락제의 3천궁녀 참살사건

by 중은우시 2006. 5. 29.

명성조(明成朝) 영락제(永樂帝)는 궁녀와 환관 3천여명을 살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에는 조선에서 건너간 후궁과 궁녀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명성조 영락제는 역사상 여러가지 업적을 남긴 황제이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고집스럽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시기심이 많고 의심이 많았으며, 살인을 밥먹듯이 한 인물이기도 하다. 영락제는 말년에 궁녀와 환관을 많이 죽였는데, 이 참살사건에서 죽은 궁녀만 3천여명에 달한다. 명나라 후궁에게 있어서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다.

 

영락제의 궁녀참살사건이 처음 일어난 것은 조선여인인 현비(賢妃) 권씨(權氏)와 관련이 있다. 영락제의 집권이후 국가는 점점 강대해 졌으며, 영락제는 향락을 추구하기 시작하였고, 후궁과 미녀들이 점점 많아졌다. 영락5년(1407년)에 황후 서씨가 병으로 사망한 후, 황후는 새로 세우지 않았지만, 왕귀비(王貴妃)와 현비 권씨가 가장 총애를 받았다. 권씨는 조선에서 뽑혀온 여인이었는데, 미모가 뛰어날 뿐아니라, 총명하였고, 노래와 춤을 잘하였다고 한다. 특히 옥소를 잘불어 영락제가 더욱 아꼈다고 한다.

 

영락8년(1410년), 영락제는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면서, 특히 권현비를 데리고 떠난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아꼈던 권현비는 대군이 개선하는 도중에 임성(臨城)에서 사망하고 만다. 영락제는 매우 상심하여 침통해 했다.

 

당시 궁중에는 여(呂)씨성을 가진 조선궁녀가 두 명이 있었다. 한 여씨는 조선의 상인의 딸이었다. 역사책에는 그래서 고여(賈呂, 고는 장삿군이라는 뜻임)라고 부른다. 그녀는 궁중에 들어온 후 먼저 궁중에 들어와 있던 궁녀 여씨를 만나서는 둘 다 조선사람이고 같은 성씨여서 매우 반가워하며 서로 사귀고자 한다. 그러나 궁녀 여씨는 고여와 어울리기를 거절한다. 고여는 이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가 영락제의 권현비가 죽고, 여씨가 권현비를 모셨었는데, 이에 대하여 고여는 여씨가 권현비가 마시는 차에 독약을 넣어 독살한 것이라고 무고한다.

 

영락제는 비통한 상황에서 이를 듣자 매우 분노하여 내용을 자세히 조사하지도 않고, 여씨와 관련된 수백명의 궁녀와 환관을 죽여버린다.

 

영락18년(1420년)에는 영락제가 아끼고, 황후로 세우고자 하였던 왕귀비까지 죽고 만다. 영락제는 다시 한번 아끼는 후궁을 잃은 슬픔에 잠긴다.

 

그런데, 이 때 고여와 궁인 어씨(魚氏)가 어린 환관과 사귄 사건이 들통난다. 당시 궁녀와 환관이 서로 가짜부부로 맺어지는 것은 흔했고, 명나라때는 궁중에서 이를 대식(對食)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어떤 궁녀는 어떤 환관의 "채호(菜戶)"라고 불렀다.

 

영락제는 불같이 화를 냈다. 고여와 어씨는 모두 화를 당할 것이 두려워 목을 매어 자살했다. 영락제는 이를 기화로 친히 고여의 시비들을 심문한다. 그런데, 생각도 못하게 이 궁녀들로부터 황제를 모살하려 했다는 진술을 받아내게 된다.

 

영락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친히 궁녀들에게 혹형을 가하며, 그 중에 이에 연관되어 주살당한 궁녀가 거의 2800명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영락제는 매번 친히 혹형을 가하였으며 어떤 궁녀는 그 자리에서 영락제를 욕하기도 하였다. "네 자신이 나이가 들어 양기가 쇠하였는데, 궁녀가 환관과 잘 지내는 것이 무슨 죄가 된다는 말인가" 영락제는 화공으로 하여금 환관과 궁녀가 서로 끌어안은 모습을 그리게 하여 궁녀들에게 모욕을 가하고, 모두 죽여버렸다.

 

<<이조실록>>의 기재에 따르면, 궁중의 궁녀들이 참살당할 때, 궁전에 벼락이 내려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궁중의 사람들은 매우 기뻐, 영락제가 하늘을 무서워하여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양락제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이 그대로 죽여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