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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무협지에 나오는 문파들의 현주소

by 중은우시 2006. 2. 7.

1. 소림사

 

소림사는 북위 태화20년(496년)에 창건되었고, "소림사"라는 검은색 편액은 청나라 강희황제가 쓴 글이다. 청나라 중기이후 소림사는 여러번에 걸쳐 화를 당하였는데, 가장 최근의 일들은 1928년 군벌 풍옥상의 부대의 장군 석우란에 의하여 44일간 불에 타 폐허로 변한 적이 있고, 1942년에는 하남성에 가뭄이 들어, 굶어죽는 자가 들판에 널렸으며, 중들고 하나하나 절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몇몇 거동이 불편한 중, 나이가 든 중, 그리고 비적들에게 두 눈이 못쓰게 된 사미승 행정(行正)등이 남아있었다. 맹인승 행정은 나귀를 끌고 절의 살림을 해결했다.

 

문화대혁명기간중에는 100여명의 홍위병이 소림사로 난입하여, 불상을 태우고 전당과 비석을 불태웠다. 당시에 이미 소림사의 주지가 되어 있던 행정이 겨우 모든 불이 불타는 것은 막아냈다. 11기3중전회이후 절은 다시 중들에게 돌려주어 관리하게 하였다. 소림사에는 20무의 산지가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관광객들에게 입장료를 받을 수 있어서, 점점 활력을 찾아갔다.

 

1982년의 영화 <<소림사>>는 소림중흥의 서막이었다. 지금까지 소림사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상표등록을 하고, 회사를 만들고 <<역근경>>, <<세수경>>등 소림 무술비급을 공개하고, 무대극 <<천하소림>>을 만들어 세계각지에서 공연하고, 온라인게임 <<소림전기>>를 라이센스주어 개발하게 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현재는 문에 기대어 혼자 옷으며 휴대폰으로 메세지를 보내는 스님을 볼 수 있을 뿐아니라, 절을 청소하는 것은 이미 고용한 청소원이지 더 이상 중들이 아니게 되었다.

 

영신(永信)법사는 속성은 유씨이고 이름은 응성이다. 1965년 출생으로 안휘성 영상 사람이다. 영신과 얘기하면 그가 자주 쓰는 말은 "역사적으로 보면"과 "국제사회의 입장에서 보면"이다. 그는 불교도들에게 "해외진출"을 강조하고 대중과 직접 대화하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찾아오는 제자들을 막지도 않는다. 제자중에는 F4의 오건호도 있고, 일본의 우상 용택수명도 있다.

 

2. 무당파

 

600년이래로 "차라리 전하지 않을 지언정, 잘못 전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모토아래 무당파의 쿵후는 비전으로 전해내려왔다. 무당파도 도시지역에 500여만위안을 들여 무당국술관, 무당연예관을 지었고, 중국무당쿵후예술단을 조직했다. 그리하여 수십개 국가에서 무당무술을 공연하고 있고, 많은 해외의 제자들이 무당산을 찾아온다.

 

세계문화유산이자 도교관광명승인 무당산의 태자동에는 도인 장금분(張金盆)이 있다. 1961년생으로 1987년에 고향인 죽계현을 떠나 무당산에 와서 출가했다. 일년내내 맨발로 다닌다. 더운 여름이건 눈내리는 겨울이건간에. 항상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적각도인(赤脚道人)이라고 부르고 있다.

 

3. 아미파.

 

아미무술은 소림, 무당과 더불어 정립하는 형세이다. 현재 소림무술, 무당무술은 비교적 명성을 날리고 있지만, 아미무술은 비교적 덜 유명한 편이다. 최근들어 홍(洪), 화(化), 자(字), 회(會), 승(僧), 악(岳), 조(趙), 두(杜)의 팔대무술문파가 성도에 모여 아미파좌담회를 개최하였다. 이로써 다시 아미파무술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소림, 무당에 비할 바는 아니다.

 

장동매(蔣冬梅)의 얼굴에는 아직 청순하고 귀여운 웃음이 있다.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가 무술고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18세에 불과한 미소녀는 바로 아미무술명가인 왕건 선생이 아끼는 제자이다. 일찌기 <<풍운>>, <<웅패천하>>, <<백년호합>>등의 영화를 찍었고, 일찌기 국제적인 스타 정수문의 대역역할을 해냈다. 유명한 감독인 사진 선생이 낙산에서 <<강호제>>라는 영화를 찍을 때 제일 먼저 고른 것이 바로 장동매였다. 장동매는 13세때부터 중국아미무술연구회 회장인 왕건 선생으로부터 아미무술을 배웠고, 아미 월녀검과 아미 화룡권을 배웠다. 그녀는 아미소후왕(峨嵋小후王)이라고 불리는 이룡등과 함께 아미파 신세대의 주목받는 사람이다.

 

4. 청성파

 

청성파는 김용의 무협소설에서는 그다지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김용이 청성산을 방문하였을 때 청성파는 그를 융숭하게 맞이하고 청성무술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김용은 다 본 후에 "청성 태극권검은 양생보건에 좋을 뿐아니라 실용무술이다"라는 글을 써주었다. 이 때, 청성파의 장문인인 유수빈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이제서야 청성파가 비로소 제대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유수빈은 무술관을 확대하고자 하나 "나는 경영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쉽지가 않다. 소림사가 무술학교를 합쳐 13,000여명이 되는데 비하여 청성파의 무술학교는 수백명에 불과하다. 유수빈은 서양제자들은 많아지고 있는데, 국내의 제자들이 늘지 않는 점에 대하여 걱정이 많다.

 

5. 공동파

 

공동파의 제10대장문인은 연비하(燕飛霞)이고, 감숙성 평양시에서 8월에 열리는 전국무술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일본 동경의 공동파무술관에서 공동파제자를 훈련시키다가 피로가 겹치고 옛 병이 도져 2005년 6월 3일 세상을 떠났다. 나이 66세였다.

 

연비하의 원래 이름은 왕진(王進)이었고, 7살때 공동파 제9대 장문인 호비자(胡飛子)의 제자가 되어 체계적으로 공동무술을 배웠다. 17살 때 공동파의 의발을 전수받고, 공동파의 제10대 제자가 되었다. 1981년에는 일본제자인 갑비목자와 결혼하여 일본 동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일본에 공동파무관을 세웠다. 1995년말에 평량시위원회와 시정부의 요청을 받아 귀국하여 무술을 가르친 바 있고, 평량시의 명예시민이 되었다. 이후 10년간 4번에 걸쳐 부인과 제자를 데리고 무당산을 찾아왔다.

 

평량시의 경계내에 공동산이 있으며, 여기가 바로 공동파무술의 발상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