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진의 지도.
제갈진의 한가운데 있는 태극모양의 못.
현재 제갈량의 후예들은 절강성 건덕, 난계, 용유의 세개 시현 인접의 반경 50킬로미터 범위내의 11개촌진에 집중하여 살고 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제갈량의 후손은 약 8천여명이고, 대부분은 제갈량의 49대손과 50대손들이다.
제갈량의 후예가 절강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제갈량의 14대손 제갈리가 오대 때 수창현의 현령으로 부임한데서 시작한다. 오대 때의 수창현은 지금의 절강성 건덕이다. 제갈리는 아들 제갈청을 낳았는데. 제갈청의 맏아들인 제갈승명의 후손들은 남송때 천록촌으로 옮겼는데, 천록촌은 현재의 절강성 난계시이고, 현재 그 촌에는 109호 569명이 살고 있으며, 그 중 450명이 제갈량의 후손들이다. 제갈청의 둘째아들인 제갈승고의 후손들은 수창에서 고판각으로 이주하였으며, 고판각은 현재의 절강성 건덕현 장림향이다. 현재 거기에는 제갈량의 후손 292명이 살고 있다. 제갈청의 넷째아들인 제갈승돌의 후손은 수창에서 절강성 용유현 화룡촌에 거주를 정했는데, 거기는 제갈량의 후예 49호230명이 있다. 제갈청의 셋째아들인 제갈승재의 후손은 남송때 고륭(高隆) 주위의 7개 마을에서 번성하였다. 명나라에 들어 고륭은 제갈진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 명칭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현재 제갈진에는 제갈량의 후손이 2,500명가량 살고 있는데, 제갈량의 후손들이 가장 집중하여 있는 것이고, 이미 제갈량 후손들의 활동중심이 되었다.
제갈진에는 명나라때 건립한 제갈대공당과 승상사당이 있다. 대공당내의 보루에는 <<제갈씨종보>>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 족보는 15번에 걸쳐 수정하였다. 첫번째는 남송초이고, 마지막은 1947년이다. 당시 국민당의 원로였던 진과부가 이 족보의 최종 수정본에 서문을 썼다.
최근 사람들은 제갈진의 건축배치가 제갈량의 팔진도에 따라 설계된 것을 발견하였다. 이 촌은 하나의 못을 중심으로 사방에 대공당, 회덕당, 경여당과 주택 수십채를 배치하였으며, 8개의 작은 골목은 못바깥으로 퍼져나가게 되어 있다. 이 분포은 구궁팔괘형이며, 팔괘도와 은연중 일치한다. 고증에 따르면 이 팔괘고진은 제갈량의 27대손인 제갈대사가 고심하여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민국초기에 북벌군의 소경광부대와 군벌 손전방의 부대는 난계 제갈진 부근에서 3일 밤낮을 싸웠는데, 양쪽 모두 제갈진의 지형이 특수한 것을 보고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하며, 이로 인하여 제갈진은 전쟁의 포화에서 보호될 수 있었다.
제갈진의 제갈량 후손들은 선조의 가풍을 이어받아, 역대에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명청양대에만 진사가 5명, 거인이 11명, 공생이 35명, 수재는 백여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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