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의 공성계(空城計)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중은우시 2006. 11. 20. 15:58

[아래의 글은 최근 중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하문대학 이중천(易中天) 교수의 백가강단에서의 품삼국(品三國)의 강연중 일부분임]

 

....제갈량 이 사람은 최소한 진(晋)나라때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는 대상이 되었다. 당시에 곽충(郭沖)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로 제갈량의 대단한 팬이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제갈량에 대한 평가가 부족하다고 보고 글 하나를 썼다. 글의 내용은 "제갈량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다섯가지 일"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바로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제갈량에 대한 이야기 다섯가지를 소개하는 글이다. 그 중의 세번째 일이 바로 공성계(空城計)이다. 제갈량의 공성계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바로 곽충의 이 글에서 이다.

 

나중에 배송지(裴松之)가 <<삼국지>>에 주(注)를 달면서 이 자료를 인용하고, 그 내용에 대하여 반박했다. 당시에 양평(陽平)이라는 곳에서 곽충이 쓴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왜냐고? 바로 당시 사마의는 형주도독의 관직에 있었고 완성(宛城)에 주재하고 있었으며, 양평 전쟁터에 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갈량과 사마의의 공성계가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공성계의 이야기는 너무 잘 꾸몄다. 그래서 문학작품에서도 계속 이 내용을 쓰게 되고, 희극작품에서도 계속 이 내용을 공연하였다. 그러나, 이 내용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여기서 간단히 공성계를 설명해보자. 개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사마의가 병사를 이끌고 진공해 온다. 제갈량은 마속을 보내서 가정(街亭)을 지키게 한다. 마속 이 자는 책벌레여서 공리공담에 능할 뿐이고 싸움은 못했다. 그래서 가정을 잃었다. 사마의는 수십만군대를 이끌고 몰려왔다. 당시 제갈량의 손에는 이미 병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성문 네 개를 모두 활짝 열고, 20명의 늙은 병사를 문 입구에 보내서 바닥을 쓸게 하였고, 제갈량 자신은 금(琴)을 들고 향을 사르면서, 두명의 아이를 데리고, 성루 위에 앉아서 가라오케를 불렀다. 사마의의 대군이 달려와서 보고는 무슨 일인지 잘 몰랐다. 그 후에 사마의는 말을 타고 달려나와서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제갈량 이 자가 또 무슨 궤계를 꾸미는 것인가? 성문을 다 열고 파티를 벌이고 있다니. 그래서 철군했다는 것이다.

 

이 일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첫째, 성 안에 매복이 있을 것이 두려웠다면, 일부 정찰대원을 보내서 진짜인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 사마의가 친히 말을 몰아 성문 아래에서 제갈량이 성루위에서 태연자약하게 금을 뜯고 있고, 금소리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면, 그것은 거리가 매우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 신전수(神箭手, 활을 잘 쏘는 자)를 하나 파견해서 쏘지 않았는가?

 

셋째, 곽충의 주장과 삼국연의의 내용에 따르면 양군의 병사수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인데, 사마의가 20만대군을 데려왔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십여만대군이라고도 한다. 적어도 10만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을 삼일만 포위하고 공격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왜 병사를 뒤로 돌려 도망친다는 말인가?

 

어느 것 하나 논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성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