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의 일생에 대한 여섯가지 의문점

중은우시 2006. 10. 24. 19:10

첫째, 수족지의(手足之疑) : 형제문제

 

제갈규가 일찌기 죽자 제갈량은 그의 종부인 제갈현에 의탁한다. 제갈현이 예장태수로 부임할 때, 같이 따라간 사람은 제갈량, 그의 동생 제갈균 및 누이 2명이고,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은 빠졌다. 제갈량과 제갈근의 두 형제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제갈근은 혼자 강동에 멀리 피해서 계모를 모시고 살았을까? 그리고, 제갈근이 손권에게 등용되어 영화부귀를 누리면서도 왜 형제들을 전혀 돌보지 않았을까? 제갈근이 애초에 나머지 네 형제자매의 생사를 전혀 돌보지 않은 것이라든지, 나중에 생활이 안정된 후에도 전혀 찾아올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라든지, 제갈근이 형제자매를 버린 것은 아닐까? 제갈량에게 있어서도 형제들간의 미묘한 관계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동시에 서주에는 종제 제갈탄이 있었다. 그는 위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에 대하여 <<세설신오, 품조>>에는 "촉에서는 용을 얻었고, 오에서는 호랑이를 얻었고, 위에서는 개를 얻었다"는 평가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제갈탄은 젊었을 때 이미 상서랑과 이부랑을 지내고 명사들과 교류하며, 당시에 "사총" 및 "팔달"의 칭호를 받을 정도의 유명인사였다. 어사중승대부, 양주자사 소무장군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경력이나 왕래로 봐서는 이 제갈탄의 신분배경도 평범하지는 않고 명문세가임이 분명하다. 제갈량은 어려서부터 홀로 지냈는데, 이런 부귀한 친척이 있는데 왜 종제인 제갈탄에게 가서 의탁하지 않고, 종부인 제갈현을 따라서 머나먼 곳을 떠났을까? 제갈가문에 무슨 말못할 내부적인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둘째, 동창호우(同窓好友)

 

서로 사귀고 서로 추천하는 것은 위나라에서는 순욱, 순유, 종요, 진군, 희지재, 곽가, 엄상, 위강, 왕랑, 순열, 두습, 신비, 조엄, 사마의등이 모두 영여구역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재능있는 사람들이었다. 오나라에서도 장소, 장현, 주유, 노숙 및 제갈근등이 서로서로 이끌어주었다(주유는 노숙을 소개하고, 등당은 여몽을 소개하는 등). 유비는 호협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했고, 촉은 거의 유비 개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그런데, 제갈량은 거의 아는 사람을 끌어오지 못한 것같다. 서서, 석광원 및 맹공위등은 모두 위나라에서 관직을 지냈고, 최주평도 임용되지 못했고, 석도, 허건 및 사마휘도 별로 드러나지 못했다. 제갈량의 사람쓰는 원칙에 있어서 붕당을 형성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제대로 인재를 발굴하지 못한 혐의도 벗어나기 힘들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순욱을 알면 위나라에서 조그만 관직이라도 할 수가 있고, 주유를 알면 오나라에서 조그만 관직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제갈량은 알더라도 촉에서 관직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위 형주집단에서 제갈량은 농사지을 때 사귀었던 친구들중에서 한명도 등용하지 않았다.

 

셋째, 혼인가취(婚姻嫁娶)

 

제갈량이 권문세족에 빌붙었고 그 덕을 보려고 했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융중에서는 은사나 포의들만 사귀었지, 관계를 이용하여 관직을 구하지는 전혀 않았었다. 이 점은 마찬가지로 결혼을 분석하더라도 같다. 제갈량이 황씨집안과 결혼하지만, 이로 인하여 관직을 얻지는 않았다. 제갈가문은 비록 방씨집안, 황씨집안, 붕씨집안, 채씨집안, 습씨집안 및 유표등과 혼인관계를 형성하게 되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람들중 대부분은 유비집단에 몸담지 않게 된다. 붕량, 붕월 방산민 채모등은 위나라로, 방통은 원래 주유의 휘하에서 일을 했었다. 소위 형주의 명문귀족들은 모두 위나라로 갔고, 유비에게 오지 않았다. 방통이 유비에게 가입한 것은 제갈량보다 늦었다. 제갈량이 방통을 이용해서 유비에 접근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제갈량에 대하여 현실에서 권문세가에 아부했다는 내용과 정략결혼을 했다는 얘기는 거의 성립하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유지는 미부인과 결혼하여 미축과 관계를 맺고, 조조는 조정으로 하여금 원담의 딸을 취하도록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런 정략결혼은 유비와 조조에게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제갈량이 황부인을 취한 것은 정치적인 이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앞날에 도움을 준 것도 아니다.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초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은 혼인으로 황친국척이 된 것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는 기초를 닦은 것도 아니었다. 동한시절에는 외척의 정치간여가 심하였지만, 제갈량은 혼인을 정치적인 발전의 디딤돌로 삼지 않았다.

 

넷째, 궁경거소(躬耕居所)

 

융중은 원래 남양군의 관할에 속한다. 형주목 유표는 7개군만을 통치하였는데, 바로 원래의 형주8군중에서 남양군이 빠졌다. 당시의 남양군은 장수(張繡)가 점거하고 있었다. 장수는 나중에 조조에 투항하므로, 남양군은 장수가 아니라 조조의 통치하에 들어간다. 양양은 원래 남군의 관할을 받았다. 그러나, 남군의 치소는 강릉에 있었고, 장강의 변에 있었으므로 약간 북쪽에 있던 양양이 지리적인 위치때문에 오히려 중요한 성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유표는 양양성을 친히 지켰다.만의 하나 남양으로부터의 남칭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융중 및 신야는 비록 남양에 속하지만, 양양에서 매우 가까웠다. 이것은 왜 유표가 유비를 신야에 주둔하게 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박망에는 가짜 매복을 설치하여 하후돈과 우금을 막아두고 유비가 남양군내를 드나들며 삼고초려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융중과 신야는 유표의 세력범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남양이 조조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융중에 거주하므로 유표의 통치를 받았다. 남양군은 위에 속하여 조조의 세력범위이지만, 양양은 유표가 스스로 이끌었고 그의 세력은 일찌감치 융중을 포함하고 있었다. 만일 생활이 안정된 조조의 관할지역에 있었다면, 제갈가족이 조조가 다스리는 서주에서부터 이렇게 멀리 도망쳐올 리가 없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난 후에 다시 조조의 세력범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융중은 명의상으로는 남양군에 속하지만, 제갈량이 장기적으로 거주할 수 있었고, 유비는 그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표의 형주의 세력범위와 영향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는 듯하다.

 

다섯째, 유경치학(儒經治學)

 

양한시대에는 경학이 발달하였고, 스승관계로 다툼이 많았다. 특히 고문지쟁이 그것이다. 제갈량은 어려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므로, 큰 유학자의 가르침을 받거나 집안배경의 지원을 받지는 못하였다. 학습이나 학문에 있어서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만 못했고, 출발이 늦었던 것이다.  유비는 자주 구강태수 노숙에게 가서 배웠고, 손권은 일찌기 사경과 춘추외전을 읽었고, 조조는 본인이 효렴출신으로 시도 짓고 부도 만들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생활이 매우 곤란하였으며, 학업에 정진할 상황이 아니었다. 고문경은 실사구시를 중시하는데, 그는 원문원전을 구할 수 없어서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만일 장안에 있었다면 비림에 가서 경문을 구경하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서주에 있었다. 금문경은 춘추필법을 사용하여 가르침과 주석이 없다면 아무리 읽어도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유선을 가르칠 때 사용했던 "신자, 한비자, 관자 및 육도"는 예를 많이 들어놓았기 때문에 흥미를 일으키는 초보교재로 적합했고, 이야기형식으로 가르칠 수 있었다. 유비와 융중대를 얘기할 때나, 유기에게 계액을 올릴때, 손권과 적벽동맹전을 유세할 때, 왕을 칭하고 존호를 받으라고 진언할 때, 오나라가 칭제하더라도 결맹을 깨지 말자고 할 때 등등의 경우에 제갈량은 대량의 역사전례를 인용하고, 그가 아는 시대는 일찌감치 춘추전국시대를 넘어섰으며 견식이 넓고 여러 방면에 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해지기로 <<장원>>과 <<편의십육책>>은 그의 병법작품이라고 하며, 치군, 용장, 군신 및 정사에 대한 각종 견해를 밝혔다고 한다. 그는 문장의 아름다움보다는 그 실질을 중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갈량의 학문은 어떤 고정적인 학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학파의 장점을 아울렀던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위략다오(魏略多誤) : 삼고초려의 사실여부

 

두개 이상의 서로 다른 기록이 충돌되고 있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판단하기 매우 힘들다. 정사의 <<삼국지>>에서는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방문한 것으로 나오고, <<출사표>>에도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방문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위략>>에서는 제갈량이 북으로 가서 유비를 만났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위략>>은 우선 지리적인 위치부터 착오를 일으켰다. 예를 들어 삼국연의의 '광공과오관참육장'에서도 방향감이 잘못되었다. 유비가 만일 병사를 번성에 주둔시켰다면 제갈량이 북행을 하려면 반드시 그가 번성보다 북쪽에 거주해야 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융중에 거주하고 있고, 융중은 바로 양양의 서북쪽이다. 습착치의 <<제갈량택명>>과 성홍의 <<형주기>>에서는 "양양서북십여리에 이름을 융중이라고 하는 곳이 있고, 제갈공명의 집이 있다"고 적고 있다. 만일 제갈량이 융중에서 번성으로 갔다면 바향은 동행 또는 남하가 되어야 한다. 혹은 제갈량이 반드시 번성의 남쪽에 있어야 북행이 완성되는데, 번성의 남쪽에는 양양이나 강릉등이 있다. 제갈량이 만일 언젠가 고향을 떠나 남쪽에 내려와 있었다면 북행이라는 것이 맞을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