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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삼고초려의 진실은?

by 중은우시 2006. 12. 28.

작자: 미상

 

기로에서 방황하던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은 그들을 막다른 골목에서 구해내고 이후 그들의 사업은 욱일승천하게 된다. 그러나, 의문점은 그들 두 사람은 도대체 누가 누구를 찾아간 것일까 하는 점이다. 유비가 현사를 찾아 제갈량을 찾은 것인가? 아니면 제갈량이 꿈을 안고 유비에게 투신한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견해가 있어 왔다. <<위략(魏略)>>과 <<구주춘추(九州春秋)>>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유비가 형주(荊州)로 온 후에 번성(樊城)에 병사를 주둔시켰다. 건안12년, 조조가 북방을 평정하였고, 제갈량은 다음 목표는 반드시 형주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표는 "성격이 느리고, 군사를 잘 몰랐다." 그래서, 다시 발걸음을 북쪽으로 돌려 유비를 만난다. 유비는 제갈량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 섞여 있는 이 젊은이를 중시하지 않았고, 그저 일반적인 선비를 대하는 예우로 맞이하였다. 얘기를 끝낸 후 사람들은 서로 헤어졌으나 제갈량은 떠나지 않고 남았다. 유비는 그에게 더 말하고 싶으것이 있느냐고 물어보면서, 소꼬리로 공예품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제갈량은 참지 못하고, 장군의 큰 뜻은 겨우 소꼬리를 마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유비는 그제서야 제갈량이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그저 심심풀이로 하는 것뿐일세" 제갈량은 "장군께서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유진남(유표)을 조공상(조조)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못미치네" 제갈량이 다시 물었다. "그럼 장군 자신은 어떻습니까?" 유비는 말했다. "역시 못미치네". 제갈량은 말했다. "둘 다 미치지 못하면 그저 남이 하는대로 죽임을 당할 생각입니까" 유비가 말했다. "나도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데, 어떡하면 좋겠는가?" 제갈량은 그에게 아이디어를 내주었고, 유비로 하여금 유표를 도와 유목민들이 자력갱생하도록 해주고, 등기관리하도록 하여 형주의 실력을 증가시키도록 하였다.

 

이 얘기는 명백히 <<출사표>>와 다르다. 그래서 배송지는 위 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갈량이 유비를 먼저 찾은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도 밝혔다. 사실상 <<위략>>과 <<구주춘추>>의 주장은 주류의 관점은 아니지만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유소(劉嘯) 선생은 <<삼고초려의 의문>>에서 이 설에 찬성했다. 유소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비가 현사(賢士)를 갈구한 것은 알고 있지만, 제갈량도 사실 유비를 필요로 했다는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첫째, 제갈량은 반드시 하산해야 했다. 그리고 유비는 바로 그가 가장 원하던 보스였다. 만일 유비가 삼고초려를 해야만 하산할 것이었다면, 이것은 "너 유비가 나를 세번 찾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남양에서 농사나 짓고 살 것이다"라는 것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둘째, 유비는 인재를 급히 구하고는 있었지만, 제갈량을 만나기 이전에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한 무리의 사람들 즉, 일군(一群)의 현신(賢臣)이었지, 반드시 누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갈량이 구하는 것은 오히려 1사람이었다. 즉, 명군(明君)이었으며 바로 유비이다. 제갈량에게 선택의 여지는 훨씬 적었고 심지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셋째, 제갈량이 유비보다 총명했는데, 제갈량이 유비를 더 먼저 발견하였으면 하였지, 유비가 그를 더 먼저 발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어찌 융중에서 앉아서 세번이나 찾아오도록 기다릴 수 있었을까? 특히 당시의 형세가 아주 다급하였는데, 융중에서 폼이나 잡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소 선생은 삼고초려를 했다는 점에 대한 논리적인 결론을 실제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고 보았다.

 

유소 선생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출사표>>의 내용도 부정할 수는 없다. <<출사표(즉, 전출사표)>>가 제갈량의 작품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제갈량은 아주 분명하게 밝혔다. "신은 원래 포의로, 남양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고, 난세의 생명을 구차하게 이어가고 있었으며, 제후들로부터 영달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스스로 몸을 굽혀 신을 초려에 세번 방문하는 중에 신에게 당세의 일을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하여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명확할 수 없다. 첫째, 유비는 확실히 친히 융중으로 제갈량을 찾아왔고, 그것도 여러번 찾아왔다. 둘째, 유비는 융중에서 제갈량을 찾아 '당세의 일'을 논의했다. 셋째, 제갈량이 하산을 결정한 직접적인 원인은 유비의 삼고초려이다. 고인의 자술을 100%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삼고초려의 고사를 날조한다는 것은 제갈량의 인격으로 보나,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당시는 하산하여 출사표를 쓸 때까지가 겨우 21년이 경과하였으므로, 많은 관련 당사자들이 살아있는데, 제갈량이 그런 당대의 인물들을 앞에두고 완전히 거짓말을 날조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수는 제갈량전을 지을 때 스스로 찾아갔다(登門自薦)는 설을 취하지 않고, 삼고초려설을 취했다. 이외에 진수는 그의 <<상제갈량집표>>에서 아주 명확하게 묘사했다. 진수는 "좌장군 유비는 제갈량이 뛰어난 것을 알고 세번 제갈량을 초려에 찾아갔다. 제갈량은 유비의 영웅스런 모습이 뛰어난 것을 보고, 마침내...받아들였다" 이것은 전후의 인과관계를 아주 명확히 표현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주장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설'적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제갈량이 설마 유비가 삼고초려할 것이라는 것까지 미리 계산했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저 한번만 찾아오거나 두번만 찾아왔더라면, 제갈량은 그저 융중에서 곱게 늙어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다시 말해서, 매번 자기 자신을 관중, 낙의에 비유하던 사람이 융중에 남아서 도대체 뭘할 수 있는가?

 

<<위략>>과 <<구주춘추>>의 주장은 쉽게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만일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동시에 <<출사표>>와 <<삼국지>>를 부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저 한 가지 가능성밖에는 없을 것이다. 즉, 두 가지 주장이 모두 사실일 것이라는 것이다. 즉, 스스로 찾아간 것이 먼저이고, 삼고초려가 뒤일 것이다. 즉,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고, 유비도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를 중시하지 않자, 제갈량은 다시 돌아갔다. 유비가 나중에 제갈량의 가치를 알고 나서 친히 삼고초려를 했고, 다시 제갈량을 불러낸 것이다. 이렇게 여러번 곡절을 겪었고, 친히 나섰으므로 삼고가 된 것이고, 일고가 아닌 것이다. 역사상 이런 주장은 없었다. 이런 가설이 너무 대담한 것인가?

 

사실 이 안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건안6년(201년)에서 건안12년(207년)까지, 유비는 형주에 6,7년을 머물러 있었다. 그와 제갈량은 왜 한번도 만나지 못했는가? 그들이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면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유비가 천하의 효웅이라는 명성은 제갈량이 일찌기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유소 선생의 주장이 성립된다면, 그는 왜 더 일찍 유비를 찾아가지 않고, 정말 유비가 화급해 졌을 때야 비로소 하산한 것일까?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제갈량이 꾹 참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비는 6년후에나 비로소 제갈량이라는 최고급 인재를 발견하였단 말인가? 6년사이에 3번을 찾아간다는 것이 가능한가? 유비의 진취적인 성격이나 긴박한 상황으로 볼 때 이렇게 몇년씩 미룬다는 것이 그리고 한번, 두번 계속 헛발걸음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제갈량이 아주 잘 은거해 숨어있어서 찾기 힘들었다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유비가 어떤 사람인가? 그의 수하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만일 한 사람을 반드시 찾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디 찾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제갈량은 이름을 숨기고 원수를 피해 산속에 숨어있는 신비인물도 아니고, 그는 형주의 관료사회에서 형주의 선비집단에서, 상류사회와 내왕과 교분이 있던 사람인데, 어떻게 찾지 못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윤운선생의 해석은 이렇다. 삼고초려전에 유비는 비록 제갈량에 대하여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들의 평가가 일치하지는 않았다. 비록 사마휘, 방덕공은 그를 '와룡'이라고 했고, 제갈량도 스스로를 관중 낙의에 비유했지만, 이것은 그의 주변에 있는 소집단내에서의 말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었다. 유비는 아마도 뭐가 맞는 말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했을 때 유비는 그대도 같이 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볼 때 제갈량을 무슨 신과도 같은 인물로 보지는 않았고 그저 서서가 추천하니 같이 오라는 정도로 생각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유표는 제갈량의 이모부인데도 그를 중시하여 등용하지 않았었는데, 아무런 인척관계없었던 유비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제갈량은 심리적으로도 어느 정도 거리낌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비, 관우, 장비의 관계가 너무 밀접하다는 것이다. <<삼국지. 관우전>>에 따르면, 그들 세 사랑믄 "같은 침대에서 자고 마치 형제와 같았다"는 것이다. 관계가 가깝기가 더 이상 가까울 수 없을 정도이어서, 다른 사람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즉, 유비 집단은 배타성이 너무 강한 소집단이었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은 주류에 끼어들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스스로 재상이 되고 싶었다. 그는 천리마이다. 100%확신이 없으면 유비집단에 가담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비에 대하여 관찰하고 이해하고 시험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것은 이치에 맞다. 그러나 필자는 또 하나의 문제에 주의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연령이다. 유비가 제갈량보다 꼭 20살이 많다. 그리고, 제갈량이 하산할 때의 나이는 26살이었다. 46세의 사람이, 26살의 사람에게 완전히 승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가 42살, 43살일때, 22살, 23살짜리를 찾아 가기는 더욱 어렵지 않았겠는가. 이로써 6년의 시간이 그저 흘러간 것만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