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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諸葛亮)의 10가지 실책

by 중은우시 2005. 9. 2.


 

 

첫째, 유선(劉禪)을 허수아비로 만든 점. 유비가 죽은 후 유선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제갈량이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다. 유선이 성인이 된 후에는 제갈량이 당연히 대권을 유선에게 넘겨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 정치의 모든 권한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였고, 사람을 보내어 후주 유선의 일거일동을 감시하였다. 유선은 할 말이 있어도 감히 말을 못했고, 대권을 가져오고 싶었으나, 조정의 신하가 모두 제갈량의 편이었다. 할 수 없이 환관 황호(黃皓)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고, 결국 망국으로 치닫는다.

 

둘째, 전쟁을 일으켜, 나라와 백성에게 해를 입힌 점. 제갈량의 집정기간동안 단지 "선주(先主)의 심원(心願)"을 완성하고 자기의 "융중대(隆中對)"의 책략을 완성하기 위하여, 국력과 민력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여섯번 기산(祁山)에서 출병한다. 그러나 역량의 차이가 너무 커서 중원을 회복하지도 못하고, 촉나라에 부담만 안겨준다. 이로 인하여 그의 후계자인 강유도 영향을 받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셋째, 새로운 인재를 발굴, 흡수, 배양하지 않은 점. 유비의 사후에 제갈량은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거나 흡수하거나 배양하지 않았다. 원래의 사람들만 썼고, 인재의 세대교체를 이루지 못하였다. "촉중무대장, 요화당선봉(촉에는 대장이 없어서, 요화가 선봉에 섰다)"는 비극적인 국면이 펼쳐지게 되고, 결국 촉의 멸망으로 몰아간다.

 

넷째, 원래의 우수한 인재를 억압하고 배제했다는 점. 유비의 사후에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중용되지 못했다. 조운(趙雲)도 중용되지 못하고 죽으며, 오히려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은 중용된다.

 

다섯째, 내부갈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점. 내부 장군들간의 갈등에 대하여 제갈량은 양쪽을 다독거리는 방법을 썼다. 유비가 살아있을 때에는 관우, 조운, 장비, 마초, 황충을 오호대장에 임명했으나 그 때는 관우가 이를 받지 않았다. 제갈량은 관우에게 잘보이려고 했고, 이는 관우로 하여금 더욱 교만하게 만들어 형주를 잃는 화근이 되었다. 위연과 양의의 갈등에 대하여도 양측을 다독거리는 방법을 썼는데, 두 사람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하고 결국 위연이 반역하는 화근을 만든다.

 

여섯째, 유비의 과실에 직언하지 못하고, 유비의 잘못을 저지시키지 못하였다는 점. 유비가 제갈량을 사천으로 들어가게 하였을 때, 관우를 남겨 형주를 지키게 하였다. 제갈량은 관우가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조운으로 하여금 관우를 대신하여 형주성을 지키도록 조치하지 않았고, 결국 형주를 잃은데 대한 책임에서 전혀 벗어날 수는 없다. 유비가 동오를 정벌하고자 할 때 유불리를 직언하지 못하고, 단지 병사를 따라가지 않고 후방업무를 맡음으로써 유비가 패전하고, 백제성에서 사망하도록 한다. 유비는 만일 제갈량이 있었다면 어찌 이번 패배가 있었겠는가라고 하여 제갈량에 대한 실망을 표현한 바 있다.

 

일곱째, 후계자를 잘못 고른 점. 제갈량은 자기의 후계자로 단지 전투만을 할 줄아는 강유를 선택했다. 강유는 재상에 오른 후 백성의 생활이나 국력의 강약은 돌보지 않고, 중원을 아홉번이나 정벌하나 아무런 성과없이 회군하여, 촉의 멸망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여덟째, 후사처리를 제대로 못하였다는 점.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임종전에 대권을 일개 서생인 양의에게 넘겨주었는데, 양의는 위연과 원수지간이어서, 대권을 얻은 후 위연의 병권을 박탈하여, 위연으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도록 한다.

 

아홉째, 강동에 대하여는 계속 양보하여, 강동으로 하여금 계속 촉을 침식하도록 허용한 점. 융중책이라는 것이 단지 손권과는 화합하고, 조조와는 싸우는 것이었던지?

 

열번째, 친한 사람위주의 인사를 하였다는 점. 가정과 같은 중요한 지방을 유비의 임종시 주의하도록 그렇게 얘기한 마속에게 맡긴다든지, 우수한 인재인 조통, 조광과 같은 사람을 기용하지 않았다.